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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악비전 (14)

담백하고 절약했던 악비의 풍모

글/ 유적(柳笛)

악비가 평생 생각했던 것은 절도사(節度使)나 제후에 봉해져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라 북벌에 성공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구국(救國)의 대업이었다.(에포크타임스)

한미(寒微)한 가문에서 태어나 군대에서 일어선 악비는 여러 차례 혁혁한 전공을 세워 단번에 송나라에서 가장 젊은 사령관이 되었다.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면 두터운 봉록과 공명 및 권세로 인해 종종 사람을 크게 변하게 만든다. 하지만 악비는 끊임없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위대한 공훈을 세웠음에도 오히려 생활이 아주 소박하고 수수했다.

금군(金軍)의 말발굽아래 잃어버린 강토를 되찾고 포로로 잡혀간 두 분 황제를 모셔와 정강(靖康)의 치욕을 깨끗이 씻기 전에는 악비는 그 무엇으로도 신하의 한을 풀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담은 것은 나라와 백성이었고 평생 생각한 것은 절도사나 제후에 봉해져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라 북벌에 성공해 강산을 되찾는 구국의 대업이었다. 때문에 그는 공명에 대해서는 초개처럼 여겼고 항금(抗金) 전투에서 밤낮으로 분주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사(詞)에서 쓴 것처럼 “서른이 되도록 쌓은 공명은 먼지와 흙에 불과하고 8천리 원정길에는 구름과 달뿐(三十功名塵與土,八千裏路雲和月)”이었다.

한번은 고종이 절도사 부(府)와 저택 건설을 준비할 때 악비는 극력으로 받지 않겠다면서 정중히 사양했다.

“아직 적을 멸망시키지 못했는데 어찌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이 천하는 언제쯤 태평해질까요? 라고 묻자 악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문신들이 돈을 사랑하지 않고 무신들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게 되면 천하는 태평해질 것입니다.”[1]

강직하면서도 간결한 이 말 속에서 그의 인생관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또한 평생 그의 언행에서 준칙이 되었다.

악비의 일상생활은 아주 검소하고 간소했다. 사진은 악비의 초상(에포크타임스 제작)

거친 차와 의복으로 검소하게 살다

악비의 손자 악가(岳珂)가 쓴 《악국금타졸편(鄂國金佗稡編)》에는 악비의 일상생활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매번 식사 때면 고기반찬이 2가지를 넘지 않았고 집안에서는 소박하고 거친 옷만 입었으며 사용한 그릇이나 도구도 기본적인 요구만 만족시키면 충분했다. 정교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첩을 두어 시중드는 일은 더욱 없었다.[2]

악비의 이런 생활은 일반 평민과 다르지 않으니 어디에 조정 일품(一品) 대신의 모습이 있는가? 하지만 악비는 필경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런 일상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타파’하려는 사람이 늘 존재했다. 그렇다면 악비는 이에 대해 어떻게 했을까?

한번은 학정(郝政)이란 장군이 악비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특별히 아주 맛있는 ‘만두’를 올렸다. 하지만 악비는 한 개만 맛보고는 나머지는 전부 거두어 저녁에 쓰라고 부하에게 분부했다. 학정은 악비가 이렇게까지 절약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몹시 부끄러웠다.

또 한번는 악비가 여러 장수들과 식사를 하는데 원래 정해진 메뉴는 볶은 돼지고기에 국수뿐이었다. 그런데 주방에서 요리를 올릴 때 닭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악비가 “왜 닭 한 마리를 더 죽였는가?”라고 묻자 주방장이 대답했다. “같은 주(州)의 어느 관리가 보내준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악비는 앞으로는 이런 선물을 더이상 받지 말라고 분부했다.[3]

오개가 보낸 미녀를 거부한 악비. 그림은 청나라 때 개기(改琦)의 《사녀도(仕女圖)》

사천지방에서 다년간 금나라에 맞서 싸워왔던 오개(吳玠)란 장군이 평소 악비의 뛰어난 용병술에 탄복해 특별히 절세가인(絶世佳人)을 찾아내 푸짐한 혼수품과 함께 악비에게 보냈다. 이 ‘훌륭한 선물’에 대해 악비는 기뻐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자를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때 한 장수가 악비에게 권했다.

“장군께서는 섬서(陝西)지역에서 전장(戰場)을 개척할 준비를 하시는데 왜 그녀를 남겨 오 사령관과 친분을 맺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해 악비는 “오 사령관이 사람을 대함이 후하긴 하지만 아직 나라의 치욕을 설욕하지 못했고 두 분 황제께선 북쪽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계시네. 지금이 어디 장수가 즐거움을 누릴 때인가?”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자 더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개는 거절당한 것을 알고도 오히려 악비를 더욱 존경하고 탄복했다. [4]

악비는 이렇게 대외적으로 원칙을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엄격하게 집안을 다스렸다. 어느 날 아내가 비단으로 된 명품 옷을 입은 것을 본 악비가 권고했다.

“포로로 잡혀가신 황후마마와 비빈(妃嬪)들은 북방에서 간고하게 어렵게 살고 있다고 들었소. 당신이 기왕 나와 고락을 같이 하고 시름을 함께 한다면 이렇게 좋은 옷을 입는 것은 적당하지 않소.” 아내는 이 말을 듣자 즉각 화려한 옷을 벗고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5]

악비는 자녀들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독서는 한가한 시간에 하되 학습과 농사 모두 힘써야 한다.”는 내부규칙을 정했다. 악비의 말로 표현하자면 “농사의 어려움을 몰라서는 안 된다.”[6]

악비의 서법

명리에 담백하고 은총을 회피

당시 장수들은 서로 공(功)을 다투거나 심지어 승진을 위해 전공(戰功)을 과장해서 허위로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군사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악비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매번 상을 받을 때마다 그는 늘 자신에게는 공이 없다는 이유로 두세 번씩 고사했고 때로는 예닐곱 번씩 고사하면서 절대 함부로 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는 형식적인 겉치레가 아니라 ‘국사(國士)’를 자처한 악비의 천성에 따른 것이었다.

첫 번째 북벌에 앞서 재상 주승(朱勝)이 악비에게 이번 전투에 승리하기만 하면 ‘절도사’ 승진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악비는 “저는 의리로 책임질 뿐이지 이익에 이끌리진 않습니다. 양양(襄陽) 수복은 임금께 충성하는 일입니다. 만약 절도사가 되지 못한다 하여 좌시하며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성(城) 하나를 수복하면 하나의 관작을 주는 이것은 보통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지 국사를 대하는 방법은 아닙니다.”[7]

고종 역시 일찍이 악비에게 내린 조서에서 “겸허하고 삼가는 충실을 지녔고 단순히 예를 차리기 위한 거짓이 아님을 진실로 알겠노라”[8]며 칭찬했다. 즉 악비의 겸손하면서도 성실한 품성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충의(忠義)로 목숨을 바치는 대애(大愛)정신을 칭찬한 것이다. 군자는 의리에서 깨닫는다는 말처럼 악비의 뜻은 강산의 통일에 있었고 사명은 충신양장(忠臣良將)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국가대의를 위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었으며 공명(功名)이나 이록(利祿)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또 행군하고 전투할 때 의지하는 것은 전체 병사들의 목숨을 건 치열한 분전이라 여겼다. 마치 그가 매번 관직을 사양할 때마다 “제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모두 장수들이 목숨을 바쳐 얻어온 것이지 제게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9]라고 한 말과 같았다.

이렇게 스스로에게는 인색한 악비였지만 남에게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하급 관리에서 문관에 이르기까지 또 모든 병사들이 “조금이라도 공을 세운 게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을 받지 못한 것을 발견하면 조정에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상을 청했고 혹여 그가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할까 근심했다.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악운(하경분/에포크타임스 제작)

하지만 단 한 명, 소년 영웅만은 예외였다. 그는 바로 십대부터 악비를 따라 종군한 큰아들 악운(岳雲)이었다. 장수 가문의 용감한 후예 악운은 양양 6군을 수복한 전투에서 두 차례나 가장 큰 공을 세워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또 양요(楊么)를 평정한 전투에서도 최고의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악운의 전공에 대해 악비는 오히려 숨기며 보고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관원들은 모두 악운을 위해 “공평하지 못하다고 불평했다.”

악비는 병사들이 포탄과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장을 죽이고 적진을 격파해야만 뛰어난 공을 세웠다고 인정해왔다. 그런데 만약 악운이 너무 빨리 승진하게 되면 어떻게 여러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또한 젊은이들은 마음이 들뜨거나 조급해지기 쉽기 때문에 너무 일찍 공명을 얻으면 나태하고 교만한 마음이 생겨나 큰 그릇이 되지 못할까 우려한 것이다. 때문에 설사 조종에서 먼저 악운의 관작을 올려주려 했음에도 악비가 극력 사양했다.

악비의 고매한 인품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악가군에 한 막료(幕僚)가 있었는데 첫 전투에서 전공을 보고하면서 조정에 악비의 모친을 ‘위국부인(魏國夫人)’에 봉하고 둘째 아들 악뢰(岳雷)에게 ‘문자(文資 문관)’의 관직을 수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임명장이 내려온 후 악비는 깜짝 놀라서 절대 사사로운 일로 조정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며 고종에게 명령을 거두고 또 막료를 처벌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일은 조정 안팎에서 미담으로 전해졌고 사관(史官)들은 악비에 대해 “고대 어진 장수의 풍모가 있다”[10]며 칭찬했다.

(계속)

주석:

[1] 《宋史》卷365:帝初爲飛營第,飛辭曰:“敵未滅,何以家爲?”或問天下何時太平,飛曰:“文臣不愛錢,武臣不惜死,天下太平矣。”

[2] 《鄂國金佗稡編》卷9:奉身儉薄,不二胾(指切成大塊的肉)。居家惟禦布素服,食器用取足而已,不求華巧。旁無姬妾。

[3] 事見《鄂國金佗續編》卷27。

[4][5][6] 事見《鄂國金佗稡編》卷9。

[7] 《鄂國金佗稡編》卷9:乃謝使者曰:“爲飛善辭丞相:岳飛可以義責,不可以利驅。襄陽之役,君事也。使訖事不授節,將坐視不爲乎?拔一城而予一爵者,所以待眾人,而非所以待國士也。”

[8] 《鄂國金佗稡編》卷9:上常賜詔曰:“卿每拜官,必力懇避。誠知懐沖遜之實,非但爲禮文之虛也。”

[9] 《鄂國金佗稡編》卷9:每辭官,必雲:“某所之戰,皆將士竭力,在臣何功?”

[10] 《建炎以來系年要錄》卷84:中外翕然稱美,謂有古賢將之風。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1/19/n1086195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