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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대순(大順)황제 이자성 (6)

북경 진입과 명조의 멸망

글/ 유효(劉曉)

화의제안이 거절당한 후 이자성에게 남은 선택은 오직 전면적인 공성(攻城)뿐이었다. 아직 공격이 시작되기 전 명나라 대태감(大太監) 조화순(曹化淳) 등이 앞을 다퉈 북경 외성(外城 북경성은 외성, 내성, 황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다)의 성문을 열고 틈왕의 군대를 맞이했다. 이렇게 해서 외성은 손쉽게 함락되었다.

틈왕의 군대가 내성(內城)을 향해 다가오자 남대문인 정양문(正陽門)을 지키던 병부상서 장진언(張縉彥)과 선무문(宣武門)을 수비하던 태감 왕상요(王相堯), 제화문(齊化門 또는 조양문朝陽門이라고도 한다)을 지키던 성국공 주순신(朱純臣) 등이 두려움에 휩싸여 서로 경쟁하듯 성문을 열었다. 숭정제가 기대했던 치열한 시가전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다.

제화문(齊化門) 및 전루(箭樓)

내성이 함락될 당시 숭정제 주변에는 불과 몇 사람 남지 않았다. 그는 급히 사후조치를 준비했다. 가장 먼저 주필(硃筆 황제 전용 붓)로 내각에 전하는 편지를 써서 내외 군사업무를 주관하고 태자를 보좌하라고 명했다. 그 후 주연을 열어 주(周)황후 및 원(袁)귀비 등과 함께 통쾌하게 마시고 영원히 결별할 뜻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세 아들인 태자, 영왕(永王), 정왕(定王)에게 옷을 갈아입고 각자 도망치게 했다. 동시에 “사직이 기울어졌으니 분명 천지조종(天地祖宗)이 진노하게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비의 죄다. 다만 짐 역시 이미 몸과 마음이 다 지친데다 문무 여러 신하들이 각자 사심(私心)을 위하고 집안보다 나라를 앞세우려 하지 않아 이 지경까지 패괴(敗壞)된 것이니 어찌하겠느냐? 지금은 더 이상 화복(禍福)을 따지지 말고 오직 정리(情理)에 따라야 한다. 짐은 마음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노라.”라고 했다.

숭정은 이어서 아들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조심해야 한다. 만약 관리를 만나면 노인이면 당연히 나리라 불러야 하고 젊으면 상공(相公)이라 불러라. 만약 평민을 만나면 노인이면 어르신이라 부르고 젊으면 노형(老兄) 또는 장형(長兄)이라 불러라. 선비를 만나면 선생님이라 하고 군인을 만나면 호장(戶長) 또는 장관(長官)이라 불러야 한다.”

또 “만약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부모의 큰 원수를 갚을 때 오늘 내가 한 말을 잊지 말거라!”라고 했다.

이어서 주 황후가 자진하자 숭정은 “여러 비빈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손수 다 죽였다.” 이중 원(袁) 귀비는 원래 목을 매달아 자진하려 했으나 중간에 줄이 끊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본 숭정제가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칼로 3차례 내리쳤다. 숭정은 또 16세의 큰딸 장평(長平)공주에게 칼을 휘둘렀으나 죽지 않고 한쪽 팔만 잘랐다.

3월 19일 오경(五更 새벽 3~5시)이 되자 숭정은 습관적으로 대전에 나아가 직접 종을 치며 백관을 소집했다. 하지만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텅 빈 대전을 바라보며 탄식하던 숭정은 내원을 거쳐 황궁 뒤편에 있던 매산(煤山 지금의 경산)에 올라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후 홀로 자신을 따르던 환관 왕승은과 함께 산 위에서 목을 매달아 자진했다.

숭정제는 피로 쓴 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짐이 등극한지 17년, 비록 박덕(薄德)했으나 몸을 돌보지 않고 백성을 돌보았음에도 하늘을 노하게 했노라. 이는 모두 여러 신하들이 짐을 망친 탓이다. 짐은 죽어서도 지하에 계신 조종(祖宗)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스스로 면류관을 벗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노라. 도적들아, 짐의 시신은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백성은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말라.”

대학사 범경문(范景文) 이하 여러 문신들과 훈척 유문병(劉文炳) 등 40여 명이 따라서 순절했다. 또 궁녀 위(魏) 씨 등이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약 2백여 명이 따라 죽었다.

명조(明朝)의 멸망

중국 역사상 무려 276년을 버텨온 대명(大明)왕조는 이렇게 멸망했다. 숭정제 개인으로 보자면 큰 포부와 희망이 있었고 또 포악한 황제도 아니었지만 망국(亡國)의 비극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명조의 황제들은 그리 탐욕스럽지 않았고 정부의 부세(賦稅)도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래로 갈수록 탐오한 것”으로 이는 상층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

명조의 멸망은 마치 어느 왕조든 언젠가는 멸망하기 마련이며 역사는 영원히 미리 정해진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행하며, 인류는 영원히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음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숭정제의 장례와 관리들에 대한 고문

이자성은 황궁에 들어온 후 황극전(皇極殿)에 올라가 어좌에 앉아서 숭정황제가 이미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명령을 내려 황후를 찾아보게 했다. 또한 문무백관들과 3일 후 조회를 하자고 약속했다.

얼마 후 주 황후 역시 자진한 것을 안 이자성은 곧 숭정제와 주황후의 시신을 담은 관을 동화문(東華門) 밖에 공개했다가 나중에 불사(佛寺)로 옮겼다. 3월 27일 숭정제를 전(田)귀비의 묘에 장례 지냈다. 달아났던 명나라 태자와 영왕 및 정왕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자성이 북경에 들어온 지 3일 후 날이 밝자 성국공 주순신, 대학사 위조덕 등이 문무백관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와 하례를 올렸다. 이들은 모두 소복(素服)을 입고 대전 앞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이자성이 나타나 명조 관원들을 조견한 후 남면하고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대순정권의 우금성, 유종민, 송기교(松杞橋) 등이 좌우에 앉아서 순서대로 이름을 불러 관직을 3등급으로 나눴다. 소첨사(少詹事) 양소양(梁紹陽) 양관광(楊觀光) 등 4품 이하 관원들은 모두 원래 직위에 임명했고 3품 이상의 관원들 중에는 오직 시랑 후순(侯恂)만이 원래 직위에 임명되었다. 주규, 주순신(朱純臣), 진연(陳演), 위조덕 등 약 8백여 명의 척신과 대신들은 모두 유종민의 군영으로 보내 고문을 받게 했다.

대순 병사들은 북경에 들어온 초기 “함부로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이나 부녀자를 빼앗는 자는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는 이자성의 명령을 잘 따랐기 때문에 성내는 질서가 아주 좋았다. 점포들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었고 일반 백성들 역시 모두들 기뻐했다.

하지만 대내부고(大內府庫)에 불과 황금 17만 냥과 백은 13만 냥만 남은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이자성이 유종민에게 명나라 관원들을 고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장 출신인 유종민은 각종 고문을 사용해 명나라 관원들을 협박해 은 7천여 만 냥을 거둬들였다.

이자성은 유종민의 거친 행동에 찬성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왜 내가 좋은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지 않는가?”라고 말했지만 유종민은 그의 권고에 따르지 않았다. 이는 대순 정권이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고 대순 정권이 성공의 순간 실패하게 된 복선이 되었다.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7/21/n81241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