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계의 청조 투항과 이자성의 최후
글/유효(劉曉)

대순 정권이 건립된 초기 숭정 황제와 대신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상의했다. 출정해서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남쪽으로 천도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조정 내 의견이 분분했지만 어느 한쪽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외 또 한 가지 대책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산해관 밖에 주둔해 있던 오삼계의 정예병력 4~5만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조(明朝)가 영원(寧遠)과 산해관 밖의 광활한 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숭정제와 대신들 모두 미루기만 하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순군에 의해 태원(太原)이 함락되면서 북경에 위급함을 알리자, 숭정제는 1644년 3월 4일 마침내 북방 변경을 지키던 오삼계를 평서백(平西伯 서쪽을 평정한다는 뜻으로 대순군을 염두에 둔 것)에 봉하고 3월 6일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경성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오삼계는 신속히 병사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향했고 3월 13일에는 산해관에 들어왔다. 하지만 관문 밖에서 군대를 따라온 십여 만 명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에야 경성으로 떠날 수 있었다.
오삼계군은 이틀에 300리를 달리는 강행군을 한 끝에 20일에는 하북 풍윤(豐潤 지금의 당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성이 하루 전에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자성은 경성에 진입한 후 사람을 보내 오삼계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3월 29일 이자성은 당통(唐通)에게 오양(吳襄)의 편지와 4만 냥의 은자를 주고 오삼계를 찾아가 투항을 권고하게 했다. 오삼계도 처음에는 순순히 수락할 뜻을 비쳤다.
하지만 도중에 오삼계는 부친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자신이 아끼던 애첩 진원원(陳圓圓)이 유종민에게 강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몹시 분개했다. 바로 저 유명한 “머리끝까지 분노한 것은 미인을 위함(沖冠一怒爲紅顏)”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오삼계는 군사를 산해관으로 되돌아가 당시 관문을 지키던 2만의 대순군을 단숨에 격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자성이 크게 분노해 4월 13일 직접 10여 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양을 군중에 압송한 상태로 산해관으로 향했다. 동시에 별도의 장수를 파견해 일편석(一片石 산해관 부근의 지명)에서 산해관 밖으로 향하게 했다. 일종의 양면작적이었다. 또 우금성과 유량(劉亮) 및 이모(李侔) 등을 남겨 북경을 지키게 했다.
이때 금주(錦州)를 지키던 청나라 장수 애도례(艾度禮) 등은 ‘도망자’들로부터 “영원(寧遠) 일대의 인심이 흉흉해 소문만 듣고도 달아난다”는 정보를 얻었다. 3월 16일 이 소식이 청나라 도성이 있던 심양(瀋陽)에 전해지자 청나라 정부는 즉각 “무기를 정비하고 양초를 마련해 4월 초 대대적인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조선 사신 정태화(鄭太和)가 4월 14일 쓴 편지에는 “청나라 사신 정명수(鄭命壽)가 그러는데 지난번에 구왕(九王)이 중국 본진이 텅 비어 수일 내로 긴급히 출동에 나서며 남자 정남(丁男) 70이하 10세 이상은 모두 종군한다고 합니다. 이번 한차례에 성패가 갈린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 병력을 증파할 때 명조는 이미 멸망했고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이자성과 천하를 쟁패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오삼계가 두 세력 사이에서 아주 중요한 행동에 나선다. 바로 대청에 항복해 청병을 이끌고 관내로 들어간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이후 전투의 향방을 결정했다.
4월 22일 이자성은 관내(關內)에서 진영을 펼쳐 북쪽 산악지대에서 해변까지 연결해 오삼계와 일편석에서 전투를 벌였다. 오삼계의 군대가 먼저 대순군과 격렬하게 싸웠다. 처음에는 오삼계가 승기를 잡았으나 이후 수적인 열세에 몰려 점차 패색이 짙어졌다. 이때 느닷없이 오삼계 진영 오른쪽에서 청군이 공격에 나서자 잘 싸우던 이자성의 군대가 크게 어지러웠졌다.
주장(主將)인 유종민이 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자 이자성은 황급히 후퇴명령을 내렸다. 청군은 40리를 추격했고 이 과정에서 대순군이 서로 짓밟아 사상자가 무수히 발생했다.
북경에서 제위에 오른 이자성
며칠 후 이자성은 경성으로 돌아왔고 이때 남은 병력은 3만여 명에 불과했다. 이자성은 그동안 모은 황금과 궁궐 내 창고에 보관하던 물건 등을 전부 녹여 월병 모양으로 만들었다. 한 개 당 천금의 가치를 지닌 이런 병(餠)이 수만 개에 달했고 이를 수레에 실어 서안까지 운반했다.
4월 29일 이자성은 무영전(武英殿)에서 제위에 올랐고 부친인 이계를 태조로 삼은 외에 7대 조상을 모두 황제와 황후로 추증했다. 또 본처 고(高) 씨를 황후로 삼고 우금성을 시켜 교외에서 하늘에 예를 올리게 했다. 이날 저녁 자금성과 북경의 일부 건물이 불에 탔다.
이튿날 명나라 태자, 영왕, 정왕 등을 인질로 잡고 산서와 하남 두 갈래로 길을 나눠 철수에 나섰다. 결국 대순왕조가 북경을 통치한 시기는 총 42일에 불과했다.
청군의 북경진입과 이암의 피살
이자성이 북경을 떠난 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은 오삼계에게 경성에 들어가지 말고 직접 이자성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했다. 보정(保定) 남쪽 망도(望都 망도현)에서 일전을 펼쳐 대순군이 청군에 큰 타격을 가했다. 하지만 5월 2일 정주(定州) 청수하(清水河 지금의 하북성 정주시)에서 이자성군이 또 다시 크게 패해 대장 곡가성(谷可成)을 잃었다.
5월 3일 도르곤이 북경에 들어와 중원에 들어와 새로운 조대(朝代)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명조(明朝) 대신들과 백성들을 위로하는 동시에 두 갈래로 대군을 파견했다. 한쪽은 다탁(多鐸 황태극의 16째 아들)의 인솔 하에 남쪽으로 내려가 남명(南明)정권을 공격하게 했고 다른 한쪽은 아제격(阿濟格 황태극의 15째 아들 다이곤)의 인솔하에 이자성군을 추격하게 했다.
아제격과 오삼계의 부대는 보덕주(保德州 지금의 산서성 보덕현)에서 황하를 건너 대순군의 북쪽 방어선을 돌파해 수덕(綏德)과 연안(延安)을 거쳐 서안까지 직접 압박해왔다. 이자성군은 7월에 황하를 건너 서안으로 쫓기듯 돌아왔다.

1644년 12월 동관 공격에 나섰지만 대순군이 진을 펼치며 응전했다. 이때 청군은 아직 주력부대와 대포가 도착하기 전이라 굳게 지키기만 하면서 싸우지 않았다.
1645년 청군이 홍의대포(紅衣大炮 서양식 대포)로 동관을 무너뜨리자 이자성은 서안을 포기하고 등주(鄧州), 양양(襄陽)을 거쳐 호북(湖北)으로 들어가, 무창(武昌 지금의 무한)에 있던 명나라 총병 좌량옥(左良玉)과 연합해 청나라에 맞서려 했다. 이때 남명의 홍광제(弘光帝 만력제의 손자이자 숭정제의 사촌) 조정이 건립되면서 대순군에 투항했던 원래 명조 출신의 장수들이 대거 남명이나 청나라로 투신했다. 이때 이자성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승상 우금성의 참언에 속아 충직한 군사(軍師)이자 대순의 버팀목이었던 이암을 죽인 것이다.
이자성의 최후
1645년 4월 이자성은 마침내 무창에 입성했으나 청군에게 격파 당했다. 5월 강서(江西)에서 또 다시 패배하자 호북 통산현(通山縣) 남쪽에 있는 구궁산(九宮山)에서 정구백(程九伯) 등 명조에 충성하던 지방 자위단에게 살해당했다.
이자성이 전사한 후 대순군은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고 즉시 구궁산 지역에 대한 소탕에 나서 현지 단련(團練 지방 자위단)에 보복 공격을 가했다. 이자성의 아내 고 씨는 태후가 되었고 이금(李錦)은 이자성의 셋째 동생인 이자경(李自敬)을 수령으로 천거했다. 이들은 나중에 남명정권에 투항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당시 이자성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현존 사료만으로 보자면 이자성은 당시 구궁산에서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
이자성이 세상을 떠나면서 대순정권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망망한 하늘의 뜻을 뉘라서 알 수 있겠는가! 성공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급격히 몰락한 대순왕조의 역사는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겼다.
(시리즈 종결)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7/22/n812759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