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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창세기(創世記) 4: 삼황이 문명을 열다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 연구팀

【정견망】

1. 구황십기(九皇十紀)

처음 창조된 인류는 마치 막 태어난 영아처럼 백지와 같아서 내함(內涵)이나 문화라고는 전혀 없었고 자연계에 대한 인지능력이나 감당능력도 없었으며 사상이나 의식의 형성은 더욱이 없었다.

마치 세상의 부모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각기 다른 역사 시기에 고층 경계(境界)에서 속속 일부 신(神)들이 세상에 내려와 성인(聖人)으로 전생해 신적(神跡)을 보이고 신언(神言)을 남겨 인류에게 다양한 문화와 기능을 전수했고 인류가 기나긴 역사과정을 걸어갈 수 있도록 수호했다. 일찍이 아주 긴 한 단락 역사시기에 인류는 신통(神通)을 크게 드러낸 복희(伏羲)나 신농(神農) 등 성인으로부터 직접 교화와 인도를 받았다.

신은 사람의 형상과 상태로 세상에 머물며(반신半神) 직접 “사람과 신이 함께 존재(人神同在)”하는 특수한 역사시기와 찬란한 문화를 펼쳐내 신화와 전설의 방식으로 지금까지 대대로 전승되게 했다.

그 후 상천(上天)과 신명(神明)은 서로 다른 역사 시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줄곧 미혹 중의 인간세상을 배치하고 가호하며 점화해왔다. 다시 말해 ‘인신동재(人神同在)’는 이때부터 줄곧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되어 사람이 완전히 미실(迷失)되지 않게 하거나 심지어 다시 신(神)으로 회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도록 했다. 다만 사람이 갈수록 더 눈앞의 현실에 미혹되고 갈수록 하늘을 공경하던 그런 원시의 경건한 기억이 흐려졌으며 날로 도(道)에서 멀어져갔다. 이는 나중의 일이니 후세 각 조대(朝代)의 역사정술(曆史正述)을 참고하기 바란다.

(1) 삼황의 전설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아득히 멀고 끝이 없다. 대지 위에서 예부터 지금까지 무진(無盡)한 중생은, 매 사람이 길거나 짧은 인생을 기록하면 바로 한 부의 역사 전기(傳記)가 되는데 이것이 역사의 폭이다. 또 전체 인류는 망망한 역사세월을 뛰어넘어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할 정도로 긴 세월을 윤회하고 멸망하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이렇게 지나온 무진한 시간은 역사의 깊이라 할 수 있다. 아득히 먼 역사의 장하(長河)를 마주해 인류가 아는 것은 이렇게 미미하고 가련해 창해일속(滄海一粟 큰 바다에 던져진 한알의 좁쌀)에 불과하다.

시간이 너무나 오래되었고 여기에 인류의 발전과정 중에 각종 천재인화(天災人禍)가 나타나 상고(上古)시기 사료가 대량 유실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신화와 고서 기록 중에서 우리는 현재 다만 대략적인 역사과정과 일부 중대한 사건들만을 정리할 수 있을 뿐이며 앞으로 끊임없는 발견과 보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중한 전설과 기록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중화민족의 고귀한 원류와 크고 거대한 역사를 인식하고 경건한 감사를 올리기에는 충분하다.

삼황(三皇)이란 말이 등장한 최초의 서적은 《주례(周禮)》이고 그 다음이 《여씨춘추(呂氏春秋)》다. 사마천은 《사기‧진시황본기》에서 진나라 박사의 말을 인용해 “고대에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귀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삼황이라고 하면 천황, 지황, 인황을 말하지만 이 삼황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어왔다.

《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는 《춘추위운두추(春秋緯運斗樞)》를 인용해 삼황은 복희씨(伏羲氏),여와씨(女媧氏),신농씨(神農氏)라고 했다.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삼황을 복희, 신농, 축융(祝融)이라 했다.

《상서대전(尚書大傳)》에서는 삼황을 수인씨(燧人氏),복희씨, 신농씨로 보았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삼황을 복희, 신농, 황제(黃帝)로 보았다.

《잠부론(潛夫論)》에서는 “세상에 전해지는 삼황오제는 대부분 복희, 신농을 삼황에 포함시키는데 나머지 한 분은 수인이라고 하거나 또는 축융이라고 하거나 또는 여와라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현재 일반적으로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따라 삼황을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로 본다.

신농씨 초상. 명나라 구영(仇英)이 그린 《제왕도통만년도(帝王道統萬年圖)》 중 일부.

(2) 구황십기(九皇十紀)

또 다른 고서인 《상서대전(尚書大傳)》에서는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를 후삼황(後三皇)이라 하고 이에 앞서 또 초삼황(初三皇)과 중삼황(中三皇)이 있었다고 한다. 가장 초기에 나타난 초삼황[初三皇 초천황(初天皇), 초지황(初地皇), 초인황(初人皇)]이 있은 후 중삼황[중천황, 중지황, 태황씨(泰皇氏)]이 존재했으며 마지막에야 비로소 후삼황[수인씨(燧人氏),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 합하면 구황(九皇)이 있었으며 구황의 시기가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오제(五帝)가 있었다.

현재 남겨진 사료로부터 보자면 초삼황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중삼황에 관한 기록마저도 아주 희박하다. 중삼황 시기의 인황을 태황씨라 하는데 태황씨 이후를 시간 순서에 따라 모두 10기(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구두기(九頭紀), 오룡기(五龍紀), 섭제기(攝提紀), 합락기(合雒紀), 연통기(連通紀), 서명기(敘命紀), 순비기(循蜚紀), 인제기(因提紀), 선통기(禪通紀), 소흘기(疏仡紀)가 된다.

이중 제1기는 태황씨를 기원으로 하며 구두기라 하고, 제10기는 오제(五帝)의 하나인 헌원황제(軒轅黃帝)를 기원으로 하며 소흘기라 하는데 이 사이에 무수히 많은 상고의 제왕들이 출현했다.

예를 들면, 거령씨(巨靈氏), 구강씨(句強氏), 초명씨(譙明氏), 탁광씨(涿光氏), 구진씨(鉤陣氏), 황신씨(黃神氏), 거신씨(犭+巨神氏), 이령씨(犁靈氏), 대귀씨(大騩氏), 귀귀씨(鬼騩氏), 엄자씨(弇茲氏), 태방씨(泰逄氏), 염상씨(冉相氏), 개영씨(蓋盈氏), 대돈씨(大敦氏), 운양씨(雲陽氏), 무상씨(巫常氏), 태일씨(泰壹氏), 공상씨(空桑氏), 신민씨(神民氏), 의제씨(倚帝氏), 차민씨(次民氏), 진방씨(辰放氏), 촉산씨(蜀山氏), 회괴씨(豗傀氏), 혼돈씨(渾沌氏), 동호씨(東扈氏), 황담씨(皇覃氏), 계통씨(啟統氏), 길이씨(吉夷氏), 기거씨(幾遽氏), 희위씨(狶韋氏), 유소씨(有巢氏), 수인씨(燧人氏), 용성씨(庸成氏), 사황씨(史皇氏), 백황씨(柏皇氏), 중황씨(中皇氏), 대정씨(大庭氏), 율륙씨(栗陸氏), 곤련씨(昆連氏), 혁서씨(赫胥氏), 갈천씨(葛天氏), 존로씨(尊盧氏), 축융씨(祝融氏), 호영씨(昊英氏), 주양씨(朱襄氏), 무회씨(無懷氏), 복희씨, 신농씨, 헌원씨 등이다.

아마 매 한 기 모두 서로 다른 인류문명 주기(週期)였을 것이며 매 한 기의 인류문명이 훼멸된 후 다시 새로운 기로 진입했을 것이다.

《춘추위(春秋緯)》에는 “태황씨 이래 춘추시대 노나라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년)까지 10기를 거치며 모두 326만7천 년이 흘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나라 때 위서(緯書)와 도교 서적 중에도 구황십기에 관해 적지 않은 기록이 남아 있고, 후대의 서적 중에도 적지 않은 인용이 있다. 아마 한나라 때까지만 해도 고대역사의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현재 송나라 때 나비장(羅泌將)이 저술한 구황십기에 관한 상고시기 역사서인 《노사(路史)》에 비교적 전면적인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당나라 현종 때 저명한 사학자 사마정(司馬貞)이 《사기》를 증보했는데 그중 삼황본기 내용을 보충해 구황십기에 관한 일부 내용을 추가했다.

하지만 구황십기에 관한 기록이 책마다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노사》에 기록된 십기(十紀) 중에 나타나는 제왕의 순서는 《한서(漢書)‧고금인표(古今人表)》에 나오는 제왕의 순서와 다르다. 이런 것들은 아마도 기나긴 유전 과정 중에 잦은 유실로 인해 와전되었을 것이다. 현재로선 그 어느 것도 고증할 방법이 없고 다만 대략전인 이해만 할 뿐이다.

명대(明代) 《개벽연역(開辟衍繹)》 삽화 중 천황이 간지(干支)와 갑자(甲子)를 정하다
명대(明代) 《개벽연역》 삽화 중 지황이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정하다
명대(明代) 《개벽연역》 삽화 중 인황이 산천구구(山川九區)를 정하다

(3) 원고(遠古)의 인기(印記)

중국 고대에 가장 크고 중요한 예절은 바로 천지(天地)에 대한 제사였고 천지에 대한 제사 중에서도 가장 성대한 것이 태산(泰山) 봉선(封禪)이었다. 진시황 때부터 시작해서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에선 총 4백여 명의 황제가 있었지만 역사 기록 중에 태산에 가서 진정한 봉선을 한 인물은 불과 여섯 분의 황제에 불과하다.

춘추시기 《관자‧봉선(封禪)》에는 “상고시대부터 주(周)나라 때까지 태산에 봉선한 72가(家) 제왕이 있지만 관자가 아는 것은 겨우 12가에 불과하다. 이를 순서대로 언급하면 무회씨(無懷氏), 복희씨, 신농씨, 염제, 황제,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우(禹), 상나라 탕(湯)임금, 주나라 성왕(成王)이다.”라고 했다.

또한 서한 시기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상고시기 태산에서 봉선한 사람은 모두 1만여 가의 제왕이 있었지만 공자도 이를 전부 알진 못했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가 태산에서 봉선한 다양한 성씨의 제왕을 조사하고 알아낸 것이 70여 분으로 만여 분을 구별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논형》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상고시기 태산에 가서 봉선한 제왕 중 그나마 흔적을 남겨 식별할 수 있는 건 72가에 불과하다. 세월이 오래 흘렀기 때문에 파손되어 식별할 수 없는 것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다.

《환담신론(桓譚新論)》에선 “태산 정상에 상고시대 제왕이 남긴 석각(石刻)이 1800여 곳에 있는데 이중 인지할 수 있는 것은 72곳이다.”라고 했다.

이상의 기록에 근거해 추론해보자면 상고 이전에도 아득히 멀고 긴 중화문명의 역사가 존재했으며 수많은 제황(帝皇)의 조대(朝代)가 있었다. 이들은 시간적으로 사전문명(史前文明) 학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근대 ‘사전문명’의 발견과 점차적인 실증 역시 중국의 오래 전 수많은 전설과 사료들을 입증한다.

현재 남아 있는 상고시기 사료(史料)와 전설에서 일부 기록들이 서로 충돌하는데 가장 큰 충돌은 바로 동일 인물이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여러 번 나타나면서 시간이 혼란한 것이다. 가령 여와씨(女媧氏)의 경우 삼황 이전에도 출현하지만 복희 이후에 또 출현한다. 유소씨의 경우 수인씨 이전에 출현한 적이 있는데 복희씨 이후에 또 나타난다. 이외에도 여와씨, 공공씨(共工氏), 후예(后羿) 등이 모두 서로 다른 시기에 중복해서 등장한다.

이처럼 상고 전설 중에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동일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대부분 동일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이다. 아마 이름이 비슷하거나 아니면 같았기 때문에 길고 긴 유전(流傳) 과정 중에서 동일인으로 혼동되었을 것이다. 또는 서로 다른 인류문명 시기에 그들이 인류에게 비슷한 문화를 전수하거나 또는 동일한 일을 했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혼동되었을 수 있다. 또는 아주 오랜 세월의 유전과정 중에서 이들의 이름이 세월에 의해 모호해지거나 와전되어 한사람으로 혼동되었을 수 있다.

현존 사료가 좀 어지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중심(中心)정보를 반영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원고시대에 삼황(三皇)이란 반신(半神)이 세상을 다스리던 아주 오랜 역사시기가 있었다. 이들 제황(帝皇)은 신통을 크게 드러내 인간을 교화했으며 인류를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이끌어 개화(開化)로 나아가게 했고, 한 걸음 한 걸음 수렵문명에서 농경문명으로 나아가게 했으며, 최후에 5천년 인문교화를 개창한 황제(黃帝)시대로 진입하게 했다.

이어서 우리는 이 오래고 먼 삼황시기에 광범위하게 전해진 다섯 분의 가장 대표적인 반신 및 이 시기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바로 유소씨, 수인씨,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다.

참고문헌:

1.《관자‧봉선》
2. 《한시외전》
3. 《논형》
4. 《환담신론》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