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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오제(五帝) 2: 치우를 토벌한 황제

2. 황제 (1)

(1) 의상(衣裳)을 드리우고 천하를 다스려

황제(黃帝)는 오제(五帝)의 시초다. 황제 시기는 약 5천년에 달하는 중국역사의 시작이자 화하(華夏)문명을 다진 시기다. 중국인들은 늘 ‘염황의 자손(炎黃子孫)’이란 말을 쓰곤 하는데 염제(炎帝)와 황제(黃帝)가 화하민족의 공동시조란 뜻이다.

《여씨춘추》에 따르면 “신농씨는 모두 17세대를 전했는데 이들 모두 신농씨란 호칭을 답습했으며 모두 염제로 불렸다. 마지막 염제의 이름이 유망(榆罔)이었다”라고 한다.

유망 시기에 신농씨의 통치는 이미 쇠미해졌다. 이때 화하 대지에 또 한 분의 대단한 인물이 탄생했으니 그가 바로 ‘화하시조(華夏始祖)’ 또는 ‘인문초조(人文初祖)’로 불리는 황제다.

《노사(路史)》에 따르면 “처음에 소전씨(少典氏)가 유교씨(有喬氏)의 딸 안등[安登 또는 여등(女登)이라고도 함]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낳았다. 그중 한 아들이 바로 황제의 조상인 욱(勖)인데 소전씨의 지위를 이어받아 소전부락의 수령이 되었다. 또 다른 한 아들이 바로 염제 신농씨였는데 당시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여러 세대가 지난 후 신농씨 통치의 말기가 되었다. 이때 황제의 부친이 소전부락의 수령이었다. 그 역시 유교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름이 부보(附寶)였다. 그녀가 바로 황제의 모친이다. 어느 날 부보는 거대한 빛이 북두칠성의 천추성(天樞星)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보았는데 빛이 밤하늘을 관통해 들판을 환희 비췄다. 부보가 이에 뭔가를 느껴 임신했고 24개월 후인 3월 초사흘 황제를 낳았다.

때문에 민간에 “2월 2일에 용이 머리를 들고 3월 3일에 헌원을 낳았다(二月二,龍抬頭;三月三,生軒轅)”는 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할 수 있었고 신령(神靈)했으며 일반인과는 달랐다고 한다.

황제(黃帝) 초상 《Portraits de Chinois celebres》 18세기 그림.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황제는 성이 공손(公孫)이고 헌원(軒轅) 언덕[또는 수구(壽丘)라 한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헌원으로 지어 공손헌원(公孫軒轅)으로 불렸다. 나중에 성장한 후 희수(姬水) 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을 또 ‘희(姬)’로 바꿨다. 헌원황제는 성년이 된 후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아 소전국의 임금이 되었으며 나중에 사방에서 귀순해오자 소전국은 끊임없이 강대해졌다. 마침내 나라 이름을 ‘웅(熊)’으로 바꿨는데 이 때문에 황제를 또 ‘유웅씨’(有熊氏)라고도 부른다.

판천(阪泉) 전투

신농씨의 천하가 마지막인 유강에 이르렀을 때 도덕은 이미 쇠패(衰敗)해졌고 천하는 모두 도덕을 상실했다. 제후들 간에도 힘만 믿고 약자를 무시했으며 전쟁이 끊이지 않자 백성들은 재난에 처했다. 염제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점차 위망(威望)을 잃어가자 각국 제후들 역시 더는 그의 호령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염제 유강은 또 난을 일으킨 그런 제후들을 토벌하거나 단속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신농염제의 초상, 청나라 고궁 남훈전(南薰殿) 구장 역대성군현신전신상책(曆代聖君賢臣全身像冊), 대만 고궁박물관 소장

고본 《죽자(鬻子)》(《태평어람》에서 인용)에 따르면 황제는 열 살 때 염제의 정치가 옳지 않은 곳을 보고 그가 시행한 정령(政令)을 고쳤다. 황제는 아주 젊을 때 지위를 이어받아 유웅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자신의 덕행(德行)을 대단히 중시했으며 도덕으로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점차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사회도 조화롭고 편안해졌으며 백성들의 생활도 행복해졌다. 심지어 주변 부락들마저 모두 그에게 감화되어 그를 대단히 존중했으며 황제의 덕행을 널리 전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도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동시에 또 적극적으로 무력을 증강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방어능력을 강화했다. 그는 수레와 배를 발명해 교통이 아주 편리해지게 했다. 또한 이를 군사적으로 활용해 수레를 전투에 활용했고 활과 화살 등 선진무기로 군대를 무장했다. 소와 말을 훈련시켜 수레를 끌거나 올라타게 했으며 식량을 수송하게 했다. 곰(熊), 비(羆 큰곰), 비(貔), 휴(貅), 이리(䝙), 호랑이(虎) 등의 맹수를 훈련시켜 전투에 투입시켜 군대의 전투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유웅국은 잘 다스려져 아주 강성해졌고 제후들 사이에서의 위망(威望)도 점점 더 높아졌다. 황제는 곧 천자(天子)를 대신해 난을 일으킨 그런 제후들의 책임을 묻고자 했다. 그는 약한 부족들을 보호하고 부족 사이의 질서를 수호해 백성들의 생활이 점점 안정되게 했다. 염제 유망은 본인이 천자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으로 천하를 교화하고 천하의 안녕을 지키기는커녕 스스로 앞장서서 늘 약소한 제후들을 능멸하곤 했다. 그러자 제후들이 앞 다퉈 염제를 배반해 황제에게 귀부했고 황제의 위망이 점차 커져서 명성이 천하에 널리 전해졌다.

황제의 위망이 끊임없이 올라가고 제후들도 계속해서 그에게 귀부하자 결국 염제 유강과 황제는 판천 들판에서 대전(大戰)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판천(阪泉) 전투다. 쌍방은 3차례에 걸쳐 큰 전투를 치렀고 황제가 대승을 거뒀다. 염제는 패배를 승복하고 스스로 제위를 황제에게 양보하고 황제를 도와 농업을 발전시켰다. 때문에 후인들은 염황(炎黃)을 함께 지칭해 중화민족의 시조라 부른다. 이 전투는 염제와 황제 두 큰 부족 사이의 대융합을 촉진시켰고 여기서부터 화하민족이 탄생했다.

꿈에 좋은 장수를 얻다

염황 부락이 융합된 후 아직 남아 있던 동방의 구리(九黎)가 반란을 일으켜 복종을 거부했다. 천하 제후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난폭한 이가 치우(蚩尤)였는데 그가 바로 구리부족의 수령이었다. 구리 부족은 풍속이 사납고 야만적이라 싸움을 잘했다. 치우의 81형제가 통솔했는데 치우가 부락 전체의 수령이었다.

《성씨심원(姓氏尋源)》의 기록에 따르면 치우는 모친이 같은 형제가 8명이었고 그 외 배다른 형제와 사촌형제들이 72명이라 모두 81명의 형제가 있었다고 한다. 치우는 거칠고 싸움을 잘했으며 요술(妖術)을 지녔으며 귀신과 요괴를 호령하고 비와 바람을 불러올 수 있었다. 또 자신의 싸움을 도와줄 귀신을 청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전신(戰神 전쟁의 신)’으로 불릴 정도로 아주 강력한 적수였다.

《용어하도(龍魚河圖)》의 기록에 따르면 치우에게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구리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졌고 신력(神力)을 갖췄다고 한다. 그는 또 운무(雲霧)를 변화시킬 수 있었으며 모래와 돌을 먹었고 무도하게 살인을 즐겼다. 인자(仁慈)하지 못했고 무력을 남용해 전쟁과 혼란을 좋아했다.

《태백양경(太白陽經)》에는 치우부터 청동기를 단련해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각종 강력한 무기를 제조해 천하에 횡포를 부리자 천하 제후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해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나라 화상석에 나오는 황제와 치우의 싸움

판천 전투 이후 황제는 근심이 깊어져 밤낮으로 자신을 도와줄 어진 신하와 뛰어난 장수들이 나타나 치우를 평정해주길 기원했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어느 날 밤 황제가 꿈에 큰 바람이 불어 천하의 먼지를 깨끗이 불어 날리고 이어서 한 사람이 손에 천근 궁노(弓弩)를 들도 나타나 수만 마리 양떼를 몰았다. 깨어난 후 황제는 곧 꿈속에 본 상황에 근거해 점을 쳐보았다. 풍(風)은 집권자의 호령을 대표하고 천하의 먼지를 불어 날린 것은 후(后)였다.

‘설마 하늘이 나를 도와 천하를 다스리도록 배치한 인물의 성이 풍이고 이름이 후란 말인가? 천하의 먼지를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손에 천근의 궁노를 든 것은 일반인보다 뛰어난 힘을 지녔음을 표시하고 수만의 양떼를 몬 것은 천하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 선(善)으로 이끌 수 있음을 표시한다. 설마 하늘이 성이 역(力)이고 이름이 목(牧)인 사람을 배치해 내가 백성을 다스려 만민을 선으로 향하도록 이끌게 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이에 황제는 사람을 각지에 파견해 이들을 찾게 했고 결국 아주 먼 해안가에서 풍후(風后)를 찾아냈으며 또 대택(大澤) 주변에서 역목(力牧)을 찾아냈다. 황제는 풍후와 역목을 장상(將相)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황제를 보좌해 휘황한 공적을 세웠고 천고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황제는 이에 《점몽경(占夢經)》 11권을 저술해 후세에 전했다.

구천현녀가 천서를 전하다

치우가 마침내 염제부락에 전쟁을 일으켜 천하를 차지하려 했다. 염제는 치우를 상대할 수 없었고 곧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황제가 여러 제후들을 이끌고 치우 토벌에 나섰지만 치우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황제도 일시적으로 승리할 방법이 없었다. 《황제현녀전법(黃帝玄女戰法)》에는 황제가 치우와 아홉 번 싸워서 아홉 번 패했다고 한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태산(泰山)으로 물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심을 다해 하늘에 기도를 올려 하늘을 감동시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큰 안개가 내려와 3일 밤낮을 뒤덮었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한 부인이 나타났는데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였으며 9가지 색깔의 옷을 입고 황제 앞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그녀가 바로 신령(神靈)임을 알고는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 부인은 황제에게 자신은 구천현녀(九天玄女)이며 서왕모(西王母)가 황제를 도와 치우를 물리치도록 파견했다고 했다.

구천현녀는 황제에게 천상(天上)의 문자로 된 천서(天書)인 《용갑신장(龍甲神章)》이란 책을 전수했다. 이 천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천지의 도(道), 음양의 요지, 병법(兵法), 포진(布陣), 귀신을 호령하는 등의 천기(天機) 비술(祕術)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황제는 풍후에게 명령해 천서의 내용에 근거해 병법(兵法) 13장, 고허법(孤虛法 역주: 고대에 간지를 이용해 길흉화복을 따지던 술법) 12장, 기문둔갑(奇門遁甲) 1080국 등을 풀어내게 했다. 나중에 이들 비학은 줄곧 세외(世外)에서 비밀리에 유전되었다. 일찍이 강자아(姜子牙), 황석노인(黃石公) 등에게 전해졌으며 나중에 또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유백온(劉伯溫) 등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삼국시기 제갈량이 돌로 팔괘진(八卦陳)을 펼쳐 동오(東吳)의 몇십 만 대군을 곤경에 빠뜨렸다고 하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는 기문둔갑에 근거해 펼쳐진 진법으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구천현녀는 또 황제에게 80면(面)의 기우고(夔牛鼓)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산해경・대황동경》에는 “동해 해안에서 7천리 떨어진 곳에 유파산(流波山)이란 큰 산이 있고 이 산에 신수(神獸)가 사는데 모습은 소와 비슷하고 온몸이 흰색이며 뿔은 없고 다리가 하나뿐이다. 이 짐승이 물을 드나들 때마다 큰 비바람을 일며 몸에서는 해나 달과 같은 광채가 뿜어져 나오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낸다. 이 짐승의 이름이 기(夔)다. 황제가 일찍이 그것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고 뼈로 북채를 만들어 두드리니 소리가 5백리 밖까지 들렸다.”는 기록이 있다.

《황제내전(黃帝內傳)》에도 구천현녀가 황제에게 기우고(夔牛鼓) 80면 제작법을 가르쳐주었고 한번 울리면 5백리까지 전해졌으며 심지어 3800 리까지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서적:

1. 《여씨춘추‧신세(慎勢)》
2. 《노사(路史)》
3. 《시함신무(詩含神霧)》
4. 《사기》
5. 《죽자(鬻子)》
6. 《용어하도(龍魚河圖)》
7. 《태양백경(太白陽經)》
8. 《황제현녀전법(黃帝玄女戰法)》
9. 《산해경‧대황동경》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