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인정 베풀어
글/ 유효(劉曉)

명태조 주원장 시기에 재상인 호유용(胡惟庸)이 사적으로 파당을 결성해 이익을 꾀하다가 끝내 역모혐의로 처형당한 사건이 있었다. 주원장은 이후 예전 여러 조대(朝代)에 걸쳐 존속해왔던 중서성(中書省)과 재상(宰相) 제도를 아예 폐지해버리고 육부(六部) 상서(尙書)가 직접 황제에게 업무를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자 황제의 업무량이 폭증해 근면 성실한 주원장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영락제는 기본적으로 모든 정부 부서나 기구를 태조 때와 동일하게 유지하면서도 시독(侍讀 황제의 학술자문) 해진(解縉)과 호광(胡廣) 등 신임하는 대신들을 직접 문연각(文淵閣)에 들어와 정무에 참여하게 했다. 사실상의 내각(內閣) 시스템이 이때부터 형성되었고 이후 상설기구로 변모해 관료기구를 안정시켰다.
영락제는 또 이들의 직책과 정무 참여에 대해 명확히 규정했다. 주로 각종 의견을 내거나 상주문을 검토하고 답변하며 황제의 비답(批答)에 대한 의견을 적는다. 또 각종 조서나 명령을 기초하고 부서에서 올리는 상주를 심사하며 황제가 순시할 때 호종하며 경연에서 강의하고 중요한 의식을 주관하는 등이다. 한마디로 이때의 내각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유사해 일부 특권만을 지닐 뿐 실질적인 재상의 권한이 없어서 직접 정부기관을 지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각의 출현으로 명태조가 재상을 폐지한 후 나타난 행정기구의 공백을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영락제가 천하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다
영락제는 즉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법에 따라 천하를 다스릴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라가 점차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고 명조(明朝)가 276년이나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한번은 전에 전공(戰功)을 세운 한 장수가 형법(刑法)을 어긴 일이 있었다. 형부(刑部)의 관원이 장수를 위해 청원하면서 “공을 감안해 죄를 정해 주길” 원했다.
영락제는 형부 관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법집행이란 마땅히 공정(公正)해야 하며 상벌(賞罰)은 마땅히 분명해야 한다. 그는 과거에 공을 세운 적이 있어 조정에서 이미 포상해주었다. 지금 법을 어겼다면 그럼 마땅히 법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만약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이는 악을 방종 하는 것으로 악을 방종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공을 감안해 죄를 정’해선 안 되며 법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영락 초년 성조는 또 형과(刑科) 급사중(給事中) 양공(楊恭) 등을 불러 만나본 후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서 죄인을 처벌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목적은 소인들이 두려워 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악을 저지르려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더라도 윗사람이 법을 집행함에 마땅히 너그럽고 어질어야 하며 너무 엄하게 다루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대함에 진심으로 해야 하고 거짓으로 대해선 안 된다. 법이 너무 엄하면 백성들이 견딜 수 없고 거짓으로 대하면 백성들이 더 이상 믿고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다.”

영락제가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약 1년 전쯤 그가 도처에 급사중을 어사(御史)로 파견해 백성들을 안무하게 한 적이 있었다. 출발에 앞서 거듭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데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그 후 급사중 정염(丁琰)이 상소를 올려 사천(四川)에 가보니 법을 어긴 사람이 없어서 몰래 심복을 보내 돈으로 죄를 짓도록 유도했더니 과연 법을 어긴 백성이 있었고 그를 체포했다는 것이다.
영락제는 이런 행동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고 정염의 행동이 너무 각박하다고 보았다. 영락제는 고인이 천하를 다스림에 공평정대한 도를 행했다고 보았다. 과거 당태종 때도 일부러 함정수사를 펼쳐 뇌물을 건네고는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죄를 주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위징이 강력하게 건언해 결국 처벌하지 않아다. 함정 수사는 백성을 속이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때문에 영락제 역시 이를 귀감으로 삼았다. 그는 공을 세우기 위해 선량한 백성을 함정에 빠뜨린 정염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죄를 물었고 동시에 억울하게 체포된 백성을 석방시켰다.
영락 6년 법을 주관하는 부서에서 상주문을 올려 당장 사형을 집행해야 할 죄수가 3백여 명이 있다고 했다. 영락제는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삼백여 명 중에 꼭 죽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소. 한 명이라도 있다면 죽는 사람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이오. 그대들이 잘 심사해보기 바라오. 하루에 끝내지 못하면 이틀이나 사흘이 걸려도 좋고 열흘이 걸려도 상관없소. 반드시 이들 중에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오.”
심사해보니 과연 약 20여 명이 사형죄에 해당하지 않았다.
한편 명나라 때는 무고(誣告)를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영락 초년 규정에 따르면 만약 3~4명을 무고한 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타지로 유배를 보냈고, 5~6명을 무고하면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를 보냈다. 10명 이상을 무고하면 능지처사로 다스리고 그 목을 잘라 고향에 효수했으며 가족은 먼 변방으로 이주시켰다.
영락 8년 도어사(都御史) 진영(陳瑛)이 융평후(隆平候) 장신(張信)이 연호(練湖 강소 단양에 있는 호수) 80여 리 및 강음현(江陰縣)의 관전(官田) 70여 경(頃)을 강제로 차지했다고 탄핵하자 영락제가 말했다.
“옛날 중산왕(中山王)에게 모래섬이 하나 있었는데 농사에 필요한 수로(水路)가 섬을 지나갔었소. 중산왕 집안의 한 하인이 수로를 점거하고 폭리를 취하자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땅을 관아에 돌려주었다고 하오. 지금 장신이 어찌 감히 백성들을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이오?”
이에 법에 따라 장신의 죄를 다스리게 했다.
영락제는 법을 주관하는 부서에서 상주한 사건 심사기록에 대해 이렇게 분부했다.
“형벌을 토론할 때는 반드시 범인이 군자(君子)인지 아니면 소인(小人)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만약 군자에게 허물이 있다면 이는 발을 헛디뎌 도랑이나 계곡에 빠진 것으로 우연히 저지른 죄이니 상황을 고려해 보호해야 한다. 만약 소인이 죄가 있다면 이는 마치 음식을 탐하는 것처럼 멋대로 한 것이니 의도하지 않은 잘못이 아니다. 군자가 죄를 범했을 때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善)을 돕는 도가 아니고 소인이 의도적으로 법을 어겼는데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는 악을 방종 하는 실수가 있는 것이다. 그대들이 정(正)과 사(邪)를 판단해 정확하게 균형을 잡되 마땅히 일률적으로 논하지 말아야 한다.”
영락제는 또 외척에 대한 단속을 아주 엄하게 했다. 외척이 “사건을 저질러 법을 파괴하면” 모두 사형에 처했다.
영락 11년 태자의 손위 처남인 장욱(張旭)이 하인들을 방종해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 영락제가 이를 알고는 직접 장욱을 불러다가 말했다.
“그대는 짐의 친척이니 마땅히 법을 가장 잘 지켜야 한다. 지금 그대가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한 단계 가중해서 처벌할 것이다. 개평왕(開平王), 영성후(永城侯), 덕경후(德慶侯)의 집안은 외척임을 믿고 법을 파괴하는 일을 저질러 모두 멸망당했다. 이런 사례들이 멀지 않다. 네가 지금은 부귀하지만 가난하고 미천했을 때를 잊지 말아야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모두들 다 백성을 속이고 능멸할 것이니 천하가 어찌 잘 다스려질 수 있겠느냐? 네가 명심하기 바란다!”
이외에도 사망한 부마 부양후(富陽侯) 이양(李讓)의 가족 중에서 소금을 허위로 매매해 이득을 취한 자가 있었다. 금의위에서 범인을 체포하자 부양후의 아들이 찾아와서는 그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영락제는 “법도(法度)는 천하와 함께 하는 것인데 어찌 사사로이 폐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법률에 의거해 그의 죄를 다스리게 했다.
백성의 입장에서 인정을 베풀다
영락제가 즉위한 직후 조서를 내려 병부(兵部)의 대신에게 출정에 나갔다가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병으로 사망한 병사들의 가족을 돌봐주게 했다. 또 각 위소(衛所)에 명령을 내려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고 사망한 병사에게 15세가 넘는 아들이 있으면 병부로 보내 원래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게 하고 14세 이하의 아들이나 여자는 경성으로 보내 보살펴주게 했다. 또 아들이 없거나 집안에 과부와 어린 자녀들만 있는 경우에도 똑같이 우대하게 했다. 만약 의지할 친척이 있거나 경성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은 전례에 따라 봉급과 식량을 지급하게 했다.
영락 초년 일부 대신들을 각 군국(郡國)에 파견해 민정(民情)을 시찰하게 했는데 출발에 앞서 이들에게 말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함에 추워지기 전에 미리 옷을 준비하고 배가 고프기 전에 미리 음식을 준비하며 각 방면에서 모두 진심을 다하오. 백성의 부모가 되는 임금으로서 마땅히 같은 도리를 따라야 하오. 나는 깊은 궁궐에 거처하면서 한 가지 음식을 먹거나 마셔도 늘 병사와 백성들을 생각하지만 그들의 실정을 다 알 수는 없소. 때문에 그대들이 조정의 눈이 되어 마음을 다해 조사해서 수재(水災)나 가뭄 등의 문제가 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만약 지방 정부가 속이고 보고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실대로 보고해주기 바라오. 그대들이 알다시피 병사와 백성들 중에서 이익이 되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발전시켜야 하고 폐단이 되는 것이 있다면 혁파해야 하오.”
영락제는 이렇게 알아낸 백성들의 실정에 근거해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어, 정난(靖難)의 전역 기간에 하북, 하남, 산동 세 지역은 전쟁으로 크게 파괴된 데다 적지 않은 군사비까지 부담해야 했다. 영락제는 호부(戶部)에 명령을 내려 지역별 상황에 근거해 요역과 세금부담을 3년에서 2년, 1년까지 절반으로 줄여주거나 또는 농민들에게 농기구를 하사해 전쟁으로 도망간 사람들이 원래 고향에 돌아오도록 격려하고 정부에서 종자, 소, 농기구 등을 제공하게 했다. 즉위 초기 영락제가 채택한 것은 백성들과 함께 성장하는 경제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영락 초년 성조가 시신(侍臣)들과 정사를 논하다가 말했다.
“나는 즉위한 시간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늘 백성들을 실망시킬까 두렵소. 저녁이면 늘 궁중에서 촛불을 붙잡고 홀로 앉아 주군(州郡)의 지적도와 호적을 살피며 심사숙고하곤 하오. 어느 지역에 최근 기근이 들었다면 마땅히 더욱 보살펴야 하고, 어느 지역이 변경에 위치하면 마땅히 수비해야 하오. 아침에 일어나 조회에 참석할 때는 늘 여러 신하들과 무엇을 상의해야 할지 생각하오. 최근 하남(河南) 여러 곳에서 누리떼 피해와 가뭄피해가 발생해 먹고 잠자는 것마저 편치 않으니 이에 사신을 파견해 조사하게 했소. 만약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소원이오.”
영락제는 또 지방에서 누리떼나 가뭄 피해가 발생하면 식량의 낭비를 막기 위해 환관들에게 황성 내에서 닭 등을 기르지 못하게 했다. 또한 다시 법을 어긴 게 발견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경고했다.
또 한 번은 영락제가 어마감(禦馬監)에서 흰 코끼리에게 줄 식량을 호부에 요구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관계자를 불러다가 말했다.
“흰 코끼리가 하루에 먹는 양식은 농부 몇 가족이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임금의 직책은 바로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그대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짐이 천하의 민심을 잃게 하는 것이다.”
영락제는 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만약 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또 한 번은 영락제가 도연 등을 소호(蘇湖) 지역에 파견해 이재민을 구휼하게 했다. 파견에 앞서 그들에게 말했다.
“임금이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은 모두 백성들이 제공한 것으로 백성들이 가난해서 먹고 입을게 없는데 임금이 어찌 그들을 연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금이 아버지라면 백성은 아들이다. 아들은 당연히 효도하고 순종해야 하고 아비는 당연히 자애로워야 하니 각자 그 도리를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대들이 재물(財物)을 풀어 민심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어진 사람의 정치가 될 것이다.”
영락 연간에 어떤 환관이 몰래 응천부(應天府 남경) 부윤(府尹)에게 공장(工匠)을 사적인 활동에 제공해달라고 요구했다. 영락제가 이 사실을 알고는 부윤을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는 마땅히 정직하고 아첨하지 말아야 하며 나라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절실히 알아야 하는데 어찌 궁궐에 갇혀 사는 자(역주: 환관)를 두려워하는가? 만약 또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주살할 것이다.”
동시에 영락제는 사적인 부탁을 한 환관을 잡아다가 “짐은 천자의 신분임에도 함부로 일개 백성을 부리지 못하는데 네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함부로 부리는가?”라고 말했다.
영락 4년 어느 날 영락제가 시신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경사(京師 역주: 수도인 남경)에 병이 있어도 제때 의약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내부(內府)에 저장된 약재가 아주 많은데 궁문 밖의 사람을 구제할 수 없다면 이런 저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태의원에 명령해 처방에 따라 약을 만들어 경성 내외에 베풀어주게 했다.
영락제는 또 “짐은 옷 하나를 입거나 음식 하나를 먹어도 늘 천하인들의 어려움을 잊지 않노라. 가까이 지척 간에 있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한다면 어찌 먼 곳의 이들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영락 7년, 산서(山西) 영구현(靈丘縣)의 백성 이문수(李文秀)의 처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관례에 따르면 관아에서 여덟 살까지 식량을 공급하는데 영락제가 이를 알고는 10살까지 연장해서 지급하게 했다.
영락 8년, 온주부(溫州府)의 부민들이 매년 북경으로 백반(白礬)을 운송하는데 산길이 가로막혀 운반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공부(工部) 대신에게 백반의 사용처를 묻자 대신이 옷감을 염색하는데 쓴다고 대답했다. 영락제는 이에 “옷감 염색 때문에 수천 리 밖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느니 그들의 공납을 취소하고 오늘부터 옷감을 만들 때 염색하지 않아도 되게 하라.”라고 했다.
영락 연간에는 이처럼 백성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인정(仁政)을 베풀 일들이 늘 존재했다. 영락제는 이처럼 일대의 걸출한 제왕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5/29/n7942216.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