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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오제(五帝) 6: 천지를 단절시킨 전욱

6. 전욱(顓頊)

(1)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황제(黃帝)의 정비(正妃) 누조(嫘祖)는 창의(昌意)를 낳았고 두 번째 비 방뢰씨(方雷氏)는 이름이 여절(女節)인데 현효(玄囂)를 낳았다. 현효의 성(姓)은 기(己)씨 또는 이(羸)씨라고 하는데 이름이 지(摯) 또는 소호(少昊), 청양씨(青陽氏), 궁상씨(窮桑氏), 금천씨(金天氏)라고도 한다.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해서 신선이 된 후 현효가 황제의 뒤를 이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일찍이 여절은 꿈에 큰 별이 일곱 색깔 무지개 빛을 내면서 화서(華胥)에 강림하는 것을 보았고 이에 감응해 현효를 낳았다. 전설에 따르면 현효에게는 태호(太昊 복희)의 덕(德)이 있어 소호로 불렸다고 한다. 오행에서 토(土)는 금(金)을 낳는데 소호는 황제의 위치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금덕(金德)을 지녀 금천씨로도 불린다. 소호가 제위를 이은 후 궁상(窮桑)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또 궁상씨라고도 한다.

소호가 제위를 이을 때 봉황(鳳凰)이 날아왔기 때문에 봉황의 상서로움을 지녔기 때문에 새로 관직을 기록하고 새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았다. 소호는 또 아주 어진 덕을 지닌 제왕으로 84년간 재위하면서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다. 소호는 또 《구연(九淵)》이란 음악을 지었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 나오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초상화.

(2) 전욱이 제위에 오르다

소호가 붕어한 후 조카인 전욱(顓頊)이 제위에 올랐다. 다시 말해 소호의 동생 창의의 아들인 고양(高陽)이 천자의 자리를 이어받으니 이가 바로 전욱제(顓頊帝)다.

전욱의 부친 창의는 덕행(德行)이 높지 못해 황제로부터 약수(若水) 지역 제후로 분봉(分封) 받았다. 창의는 촉산씨(蜀山氏)의 딸 창부(昌仆 또는 여추女樞)를 아내로 맞았다. 소호씨 통치 후기 어느 날 밤에 북두(北斗)의 요광(瑤光)이란 별이 일곱 색깔 무지개 빛으로 달을 관통하자 창부가 유방(幽房)에 있는 궁궐에서 이에 감응해 잉태한 후 전욱을 낳았다.

청나라 사람이 그린 전욱의 초상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전욱은 10살 때 소호를 보좌하기 시작했고 열두 살 때 관례(冠禮)를 올렸으며 스무 살에 제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산해경》에도 “동해 밖에 소호의 나라가 있는데 소호제(少昊帝)가 일찍이 그곳에서 전욱을 양육하고 가르쳤는데, 그가 전욱에게 연주를 가르쳤던 금슬(琴瑟)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전욱은 제위에 오르기 전 일찍이 고양의 군주로 분봉받았기 때문에 고양씨(高陽氏)로도 불린다. 오행에서는 금(金)이 수(水)를 낳으니 금덕을 지닌 소호의 제위를 이었기 때문에 수덕을 지녀 물(水)로 관직명을 삼았다.

(3) 분노한 공공이 부주산을 들이받다

기록에 따르면 전욱의 재위 기간에 두 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공공(共工)과의 대전(大戰)이었고 또 하나는 하늘과 땅의 소통을 단절시킨 것이다.

공공(共工)이란 이 명칭은 지금에 와서는 이미 똑똑히 밝히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공공은 물을 관장하던 반신(半神)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상고시기 사람들 특히 각 부족의 제후나 수령 및 제왕(帝王)‧대신(大臣) 등은 모두 신통(神通)이 있어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상태가 나타났다. 다만 뒤로 갈수록 신통이 점점 줄어들었을 뿐이다. 하(夏) 왕조 초기까지만 해도 이런 신통에 관한 기록이 여전이 남아 있었다.

공공은 또 상고시기 사람이름인 동시에 상고시기 관직명으로 백공(百工)을 관리해 치수(治水)를 책임진 직책이었고 이 직책을 맡은 사람도 공공이라 불렀다. 이외에도 공공은 상고시기 제후국과 씨족의 이름이었으며 이 제후국과 씨족의 수령 역시 모두 공공이라 불렸다. 때문에 상고시기에 수많은 공공씨가 출현했고 여와씨, 신농씨, 전욱, 요, 순, 우 등의 시기에도 줄곧 출현했기 때문에 그 사적(事跡)이 한데 뒤섞여 똑똑히 밝히기 어려워졌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공공을 또 염제(炎帝)의 후손이라 했다.

전욱이 상제가 된 후에 공공은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여겨 질투심이 생겨 하늘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 전욱과 제위를 다퉜지만 결과는 예상하다시피 당연히 패배했다.

《열자(列子)》의 기록에 따르면 공공이 전욱과 제위를 다투다 패배하자 분노와 수치심에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 부주산이 충격으로 부러지면서 대지를 고정하던 줄인 지유(地維)도 단절되었다. 여기서 부주산은 전설에 나오는 신선(神仙)의 산으로 전설에 따르면 하늘을 지탱하는 8개의 하늘기둥[天柱] 중 하나라고 한다. 하늘기둥이 충격으로 무너지고 지유가 끊어진 후 천지가 제위치를 벗어났다. 이때부터 하늘은 서북방향으로 기울고 일월성신(日月星辰)도 서북으로 치우치고 대지(大地)는 동남으로 기울어져 강과 하천 및 호수와 바다가 동남방향으로 흘러 모이게 되었다.

분노한 공공이 부주산을 들이받다(샤오핑肖平/비천제도)

(4) 전욱이 하늘과 땅의 소통을 끊다

기록에 따르면 전욱 이전에는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할 수 있었고 사람도 천상의 천인(天人)이나 반신(半神)과 비교적 자유롭게 소통하고 천상의 신(神)이나 천인 역시 늘 지상에 내려올 수 있었다. 또한 지상에서 충분한 덕행과 능력을 지닌 사람인 상고의 무당(巫) 역시 아주 쉽게 신과 통할 수 있었고 신통을 구비했으며 심지어 신의 힘에 의지해 비바람을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통하는 사람은 덕행에 대해 상당히 높은 규범과 요구가 있었으며 동시에 또 함부로 이렇게 할 수 없었다. 이외에도 덕성(德性)의 경계가 서로 다른 무당은 소통할 수 있는 신 또는 천인의 경계나 높이도 서로 달랐다.

그때 동방 구리(九黎)부락은 비교적 난잡한 것을 신봉했고 집집마다 무당이 되어, 사사로이 비교적 경계가 낮은 신이나 천인과 소통했다. 신에 대해 아무런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없었고 사람과 신을 뒤섞어 장차 사람과 신을 동등한 지위에 놓았으며 도를 어지럽히고 덕을 부패시켰다.

치우는 그 한 가지 예였다. 그는 포악하고 무도했지만 무술(巫術)을 이용해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저층의 신선들이 전투를 돕게 했고 인간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신과 너무 가까워서 인신(人神)이 뒤섞여 나타난 혼란상이다.

《국어(國語)》에는 초나라 소왕(昭王)과 관역보(觀射父)가 전욱이 하늘과 땅의 소통을 단절시킨 것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관역보는 “아주 먼 옛날 오직 정신이 전일(專一)하고 민감하게 통달하며 순결하고 고상한 사람은 신명(神明)이 그의 몸에 강림해 그로 하여금 신과 통하게 하고 사람과 신이 소통하는 매체가 되게 했습니다. 이런 사람 중에서 남자를 격(覡)이라 하고 여자는 무(巫)라 했습니다. …중략…. 그러다 소호씨 후기에 이르러 구리족이 도덕을 어지럽히고 사람마다 모두 멋대로 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무사(巫史)르 두어 사람과 신이 한데 뒤섞여 구별이 없어지게 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신과 동등한 지위에 두었고 신령(神靈)에 대한 경외가 사라져 천지가 원래 있었던 질서법칙이 사라지게 되자 인간세상에서는 오곡이 자라지 않고 재앙이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욱제가 이런 상황을 보고 목정(木正)인 중(重)에게 명령해 하늘을 주관하게 하고 화정(火正)인 여(黎)에게 명령해 땅을 주관하게 했으며 이로써 사람과 신을 분리해 각자 그 지위에 위치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천지의 질서를 다시 회복했고 사람과 신의 직접적인 소통을 단절시켰습니다.”

《상서》에도 상고시기 치우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후예인 삼묘(三苗 묘족)이 모두 포악하고 무도해지자 전욱이 중과 여에게 명령해 하늘과 땅의 연계를 단절시키게 하여 사람과 신이 더는 멋대로 오고가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욱이 하늘과 땅을 단절시켜 천지 질서를 바로잡자 상고시기 특유의 사람과 신이 함께 존재하는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했고, 중화(中華)는 점차 인문(人文)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후 인류에 대한 신의 가호와 교화 및 인도는 서서히 직접적으로 신적(神跡)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더욱 은폐된 방식으로 전환했다. 가령 제사(祭祀), 무복(巫卜), 이상(異象), 예언(預言) 등으로 인류를 계발하거나 경고하고 이끌었다.

불도(佛道) 양가(兩家)의 수련문화가 역대로 전승되면서 사람이 수련을 통해 도를 얻고 성불하여 천계(天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진실을 보여주었다. 또 역대로 천명을 받든 성왕(聖王)…성현(聖賢)을 통해 역사문화 속에 다채로운 연기 등을 통해 상천(上天 신)의 뜻과 교화를 계통적으로 드러내게 했다.

(5)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전욱

전욱은 제위에 오른 후 오관(五官)을 설치해 소호의 네 아들 중(重), 해(該), 수(修), 희(熙)를 중용했다. 중을 목정(木正)에 임명해 구망(勾芒)이라 불렀고, 해를 금정(金正)으로 삼아 욕수(蓐收)라 불렀으며, 수와 희를 교대로 수정(水正)에 임명하고 현명(玄冥)이라 불렀다. 또 염제의 후손인 구룡(句龍)을 토정(土正)으로 삼고 후토(后土)라 불렀으며, 자신의 손자 여(黎)를 화정(火正)으로 삼고 축융(祝融)이라 불렀다.

전욱은 제위에 있을 때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려 천하가 아주 잘 다스려졌다.

颛顼像,汉武梁祠画像石。(公有领域)
전욱 초상. 한 무량사(武梁祠) 화상석(畫像石) 중에서

돈황 사본(寫本) 《천지개벽이래제왕기(天地開辟以來帝王紀)》에 따르면 전욱의 재위기간에 일찍이 5년간 큰 가뭄을 겪은 적이 있다. 전욱은 자신에게 덕이 없어 하늘이 큰 가뭄을 내리고 백성들이 재앙을 당했다고 책망하면서 하늘에 비를 내려줄 것을 빌면서, 자신을 제사의 희생으로 삼아 대해(大海)에 투신해, 하늘에 대한 경앙과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표명했다. 그가 바다에 뛰어든 후 해신(海神)이 받지 못했고 큰물고기가 전욱을 등에 지고 수면위로 나타났다. 하늘이 전욱의 진심에 감동해 곧 큰 비가 내렸는데 이 해에 천하에 큰 풍년이 들었다.

《대대례기(大戴禮記)》에는 재아(宰我 공자의 제자)와 공자의 대화가 실려 있다. 공자는 황제의 손자 전욱제가 용을 타고 천하를 순시하다가 북쪽으로는 유릉(幽陵)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교지(交址)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유사(流沙)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반목(蟠木)에 도달했다고 했다. 이 범위 내의 모든 생명이 있고 영성(靈性)이 있는 것들 및 해와 달이 비출 수 있는 곳에서 모두가 전욱에게 순종했다.

이외에도 전욱은 황력(黃曆)의 기초 위에서 이를 수정해 전욱력(顓頊曆)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황력(黃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 노력(魯曆)과 더불어 6개의 고대 달력으로 불린다. 전욱력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초기 때 널리 사용되었고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때문에 전욱은 ‘역종(曆宗 달력의 조종이란 뜻)’으로도 불린다.

(6) 전욱의 후예

전설에 따르면 전욱에게는 모두 24명의 아들이 있었고 춘추전국시기 초(楚)나라 임금이 전욱의 후예라고 한다. 굴원(屈原)은 초나라 왕과 동족이었기 때문에 《이소(離騷)》에서 자신을 전욱의 후손이라 칭하며 자부심을 표현했다.

제곡(帝嚳)의 초상. 《역대군신도감(曆代君臣圖鑒)》. 하버드 옌칭 도서관 소장

《좌전(左傳)》에 따르면 전욱에게는 아주 어질고 능력 있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이들을 ‘팔개(八愷)’라 불렀다. 이들의 이름은 창서(蒼舒), 퇴애(隤敳), 도인(檮戭), 대림(大臨), 방강(尨降), 정견(庭堅), 중용(仲容), 숙달(叔達)이다.

《사기》에는 순임금이 팔개를 후토(后土)의 관직에 추천해 온갖 일을 관리하게 하자 모든 것들이 다 질서정연하게 다스려졌다고 한다.

이외에도 전욱에게는 또 못난 아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궁선(窮蟬)이다. 궁선은 순임금의 조상으로 동생인 망량(魍魎)과 제위를 다투다 망량을 뇌택(雷澤)으로 몰아냈다. 결국 망량은 뇌택에서 죽었고 사람을 해치는 귀신으로 변했다.

전욱은 거듭 숙고한 후 제위를 인후(仁厚)하고 어진 덕을 지닌 곡(嚳)에게 전했다. 곡은 전욱의 조카로 바로 소호의 손자였다. 결과적으로 궁선은 천자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봉국(封國)조차 받지 못한 평민이 되어 원한을 품고 우울해하다 죽었다.

이외에도 전욱에게는 또 도올(檮杌)이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쁜 짓을 저지르길 좋아하고 다스릴 방법이 없었다. 그는 황제의 후손 혼돈(渾敦), 소호의 후예 궁기(窮奇), 진운씨(縉雲氏)의 후예 도철(饕餮)과 함께 ‘사흉(四凶)’으로 불린다. 나중에 이들은 순임금 때 사방의 황량한 변방 지역으로 유배당했다.

전욱제는 모두 78년간 재위했고 98세에 붕어했다. 《산해경》에는 전욱제가 사망한 후 9명의 비빈(妃嬪)들을 대황(大荒)의 부우(附禺)의 산에 장례 지냈는데 전욱은 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아홉 비빈은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참고서적:

1. 《제왕세기》
2. 《고사고(古史考)》
3. 《좌전》
4. 《세본(世本)》
5. 《하도》
6. 《산해경》
7. 《열자》
8. 《국어(國語)》
9. 《상서》
10. 돈황사본 《천지개벽이래제왕기(天地開辟以來帝王紀)》
11. 《대대례기(大戴禮記)》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