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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오제(五帝) 7: 여러 왕조의 시조 제곡

7. 제곡(帝嚳)

(1) 기이한 탄생

전욱이 붕어한 후 그의 조카인 고신씨(高辛氏)가 제위를 전하니 이가 바로 제곡(帝嚳)이다. 제곡은 소호(少昊)의 손자로 교극(蟜極)의 아들인데 성은 희(姬)이고 이름이 거(倨)였다. 교극은 진풍씨(陳豐氏)의 딸 악부(握裒)를 처로 삼았다. 어느 날 악부가 거대한 발자국을 밟은 후 감응이 생겨 제곡을 낳았다.

《사기》에는 제곡이 태어날 때부터 아주 신이(神異)했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말했다고 한다.

《제왕세기》에는 제곡이 막 출생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거(倨)’라 말했고 태어날 때부터 가지런한 치아(駢齒)가 있어 성인의 덕을 지녔다는 기록이 있다.

제곡의 초상,《역대제왕선현명신대유유상(曆代帝王聖賢名臣大儒遺像)》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제곡은 어려서부터 아주 어질고 총명했다. 15세 때 전욱에게 발탁되어 전욱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를 도왔고 나중에 신지(辛地)에 봉해졌기 때문에 고신씨(高辛氏)로 불렸다. 제곡이 서른 살 때 전욱이 붕어하자 전욱의 뒤를 이어 천하의 주인이 되니 목덕(木德)을 지녔다.

(2) 천하를 잘 다스리다

제곡은 제위를 이은 후 전욱이 나라를 다스렸던 도(道)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자 천하가 아주 잘 다스려졌다. 《사기》에는 제곡이 나라를 다스림은 마치 비가 밭에 내리는 것처럼 공정하고 무사해서 치우침이 없었으며 천하에 두루 미쳤으며,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나 비바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귀순하여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했다.

전욱 시기 공공이 한차례 난을 일으켰다가 전욱에게 크게 패한 후 화가 난 나머지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 공공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술기(術器)가 공공의 지위를 이어받아 새로운 공공이 되었다.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에 따르면 술기는 제곡이 즉위한 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곡에게 소멸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곡이 제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어 다시 숙부인 중(重 전욱 시기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었던 인물)을 파견해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유회(有鄶)란 부족의 제후를 제거했다.

제곡이 재위 할 때 함흑(咸黑)에게 명령해 《구초(九招)》, 《육렬(六列)》, 《육영(六英)》 등 몇 가지 악무(樂舞)를 창작하게 했다. 또 유수(有倕)란 사람이 작은 북(鼙), 북(鼓), 종(鍾), 반(盤), 취령(吹苓 고대 관악기), 관(管), 훈(塤), 저(篪), 도(鞀), 추(椎) 등의 악기를 발명했다. 제곡이 사람들에게 이런 악기들로 앞에 언급한 악곡을 연주하게 하자 봉황과 천계(天鷄) 등 신조(神鳥)가 날아와 나풀나풀 춤을 췄다. 제곡이 크게 기뻐하며 이들 악곡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천제(天帝)의 덕을 찬송하게 했다.

(3) 여러 조(朝)의 시조

이외에도 제곡은 여러 조(朝)의 시조였다. 요임금, 상조(商朝), 주조(周朝) 등이 모두 제곡의 자손이었다. 《대대례기》에는 제곡의 4명의 비(妃) 소생의 아들에 대해 점을 치니 모두 천하를 차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제곡의 원비(元妃)는 유태씨(有邰氏)의 딸 강원(姜嫄)이었다. 강원이 교외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쁨이 일어 발자국을 따라 밟았는데 여기서 감응을 느껴 임신했고 나중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강원은 이 아이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그를 작은 골목에 갖다 버렸다. 그러자 소나 말이 길을 갈 때면 모두 피해가며 아이를 밟지 않았다. 이에 숲속에 가져다 버리려 했으나 마침 숲속에 사람이 많았고 또 언 강물 위에 버리자 새가 날아와 날개로 덮어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강원은 이에 신기함을 느껴 아이를 데려다 기르게 되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의 이름을 ‘기(棄 버린다는 뜻)’라 했다.

기는 순임금 때 백성들에게 온갖 곡식의 파종을 가르쳐 태(邰 지명)에 봉해졌다. 나중에 이름을 후직(后稷)이라 했고 희(姬)씨 성을 하사받았다. 그가 바로 주(周)나라의 시조가 된다.

명나라 때 구영(仇英)이 그린 《제왕도통만년도(帝王道統萬年圖)》. 기는 순임금 때 백성들에게 곡식의 파종을 가르쳐 태 땅에 봉해진 후 주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시경(詩經)‧생민(生民)》에서는 강원이 천제(天帝)의 발자국에서 엄지가 있던 곳을 밟자 감응을 느껴 주나라의 시조 후직을 낳았다고 했다. 《중후직기(中候稷起)》와 《안륙왕비(安陸王碑)》 주(注)에서는 강원이 밟은 발자국이 다섯 천제(天帝) 중 동방 창제(蒼帝)의 발자국이었기 때문에 후직은 창제가 인간세상에서 감응해 태어난 것으로 주나라의 시조가 되었고 이 때문에 주나라가 목덕(木德)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다.

한편, 제곡의 두 번째 비는 유융씨(有娀氏)의 딸 간적(簡狄)이었다. 어느 날 간적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목욕을 하다가 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보았다. 간적이 새알을 들어서 삼켰고 결국 임신이 되어 사내아이를 하나 낳았다. 이 아이의 이름이 바로설(契)이다. 설은 나중에 우임금이 물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상(商) 땅에 봉해졌고 상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설(契)의 초상,《역대제왕선현명신대유유상(曆代帝王聖賢名臣大儒遺像)》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제곡의 셋째 비는 진봉씨(陳峰氏)의 딸 경도(慶都)였다. 전설에 따르면 경도는 태어날 때부터 신비로웠고 늘 노란구름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경도가 강가에 놀러나갔다가 한 마리 적룡(赤龍)을 만나 감응해서 임신했고 14개월 후에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방훈(放勛)이라 했다. 이가 바로 훗날 성군의 대명사 요임금(帝堯)이다.

제곡의 네 번 째 비는 추자씨(娵訾氏)로 이름이 상의(常儀)인데 지(摯)를 낳았다. 상의는 제곡의 네 비 중 가장 서열이 낮았지만 지가 형제 중 가장 연장이었기 때문에 제곡이 붕어한 후 제위를 계승했다.

제곡은 30세에 제위에 올라 105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약 70여 년간 재위했다. 《산해경》에는 제곡이 사망한 후 적산(狄山 탕산湯山 또는 악산嶽山이라고도 함)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서적:

1. 《대대례기》
2. 《노사(路史)》
3. 《사기》
4. 《제왕세기》
5. 《강감이지록(綱鑒易知錄)》
6. 《죽자(鬻子)》
7. 《山海經》
8. 《고본죽서기년》
9. 《여씨춘추》
10. 《좌전》
11. 《시경‧생민(生民)》
12. 《안륙왕비(安陸王碑)》 주 《중후직기(中候稷起)》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