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심어(心語)
【정견망】
사람은 출생한 후 끊임없이 각종 지식과 기능을 학습(學習)해야 하는데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학교를 다녀야 하고, 또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사회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데 각 업종에서도 끊임없이 학습해야 한다. 사람이 학습하는 목적은 끊임없이 보다 높은 층차로 발전하려는 것이다.
고인(古人) 역시 “배움에는 끝이 없다(學無止境)”거나 “책의 산에서는 근면이 길이고 배움의 바다에는 끝이 없으니 고생을 배로 삼아야 한다(書山有路勤爲徑,學海無涯苦作舟)”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은 바로 끊임없는 학습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끊임없는 학습은 더 잘살기 위함이고 보다 높은 생활수준에 도달하거나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함이다. 또는 사회에서 명예와 이익을 위하고 속인 중의 강자가 되거나 또는 끊임없이 자신을 충실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끊임없는 학습은 바로 끊임없이 보다 높은 층차로 발전할 것을 요구하는데 설마 겨우 속인 중의 이 일체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보다 높은 층차의 것이 단지 이런 것뿐일까?
한자(漢字)의 각도에서 학습(學習)을 바라보고 본래 뜻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내함(內涵)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학(學)이란 글자는 쟈오(jiào) 또는 쉐(xué)로 읽는데 애초 갑골문에서 본래 뜻은 바로 아이들에게 계몽교육을 시켜 깨닫게(覺悟) 한다는 의미다. 《설문해자》에서는 “(배움은) 깨달음이다.”라고 풀이한 것으로 이럴 때는 쟈오로 읽는다. 반면 쉐로 읽을 때는 원래 교육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즉 學이란 글자가 대표하는 것은 교육을 받아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습(習)은 원래 우(羽)와 일(日) 두 글자가 조합된 회의문자였는데 나중에 우(羽)+백(白)으로 변했다. 옛날 한자의 모양을 보면 일반적으로 새가 햇살 아래 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설에서는 새가 햇살 아래 비행을 연습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습(習)이란 한낮에 새가 날거나 또는 비행을 연습하는 것으로 최종적인 목적은 날아오르는 것이다. 즉, 최종적으로 백일비승(白日飛升)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습이란 글자의 고대 자형(字形) 변화를 보자면 아래에 있던 일(日)이 백(白)으로 와전된 것이다(물론 白에도 日이 포함되어 있다). 한 쌍의 날개와 대낮의 조합인데 글자 모양을 보면 확실히 백일비승의 모습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학습하는 목적은 마치 작은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람이 끊임없이 학습하고 학습해서 최종적으로 새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 때가 되면 곧 성공(成功)이 된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학습의 보다 고층의 목적이거나 또는 최종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보다 높은 생활수준’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공간의 사람이 다 날아오를 수 있다고 보며, 모든 공간이 다 아주 아름답고 또 고생도 없지만 오직 인류 이 신체만이 날아오를 수 없고 사람이 생활하는 이 공간만이 아주 고생스럽다고 하는데 또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과연 날아오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사람이 공중에 날아오른 기록이 있는데 각종 종교에서도 사람이 날아올랐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가령 명나라 때 유명한 도사 장삼풍(張三豐)이 대궐에서 날아오른 일화가 있고 황제(黃帝)는 용을 타고 백일비승(白日飛升)해 하늘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는가? 수련계에서는 대주천(大周天)이 통하기만 하면 사람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한다. 대주천은 바로 진정한 수련이며 바로 진정한 연공이다.
수련인은 정진(精進)을 중시하는데 정진에서 진(進)은 走+隹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즉 갈수록 더 좋아진다는 뜻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 갈수록 더 좋아진다.
그런데, 가(佳)자에는 표준에 도달한 사람이란 또 한 층의 함의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가면 갈수록 더 좋아져서 부동한 층차의 표준에 도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도가(道家)의 말로 하자면 바로 진인(真人)에 도달하고 이 한 걸음에 도달했을 때 도가에서는 또 백일비승(白日飛升) 또는 우화비천(羽化飛天)이라고 한다.
수련인의 정진에서 진(進)에는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隹는 본래 꼬리가 짧은 새(鳥)를 뜻한다. 그렇다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새와 같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바로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햇살 아래 비행하는 것이 바로 백일비승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이 높은 곳을 향하고 보다 좋은 생활수준이나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면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한 층 한 층 과거시험을 통과하고 마지막 최후 관문을 통과하면 진사(進士)가 되는데 인생에서 날아오르는 소망을 실현한 셈이다. 진사에서 진(進)은 마찬가지로 사람이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최종적으로 새처럼 날아오른다는 내함을 체현한 것이다. 수련인이 중시하는 정진에서 진(進)의 내함과 서로 관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높은 층차에서 보자면 사람이 학습하는 최종 목적은 수련해서 도(道)를 얻는 것으로 도가의 말로 하자면 바로 반본귀진(返本歸真)이고 불가(佛家)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바로 각오(覺悟)원만(圓滿)이다. 모종의 각도에서 보자면 사람의 학습은 사실 수련의 또 다른 일종 형식의 체현이다.
기러기나 백조, 두루미처럼 일부 조류가 하늘을 날아오를 때 잠시 일(一)자를 형성하다가 또 인(人)자를 형성한다. 왜 잠시 일(一)자를 이루다 또 인(人)자를 이루는가? 이것은 사람이 천상을 나는 것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일(一)자에는 또 특수한 함의가 담겨 있으니 바로 도(道)와 관련이 있다. 도가에서는 “도(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으며 셋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다. 여기서 일(一)은 생명의 처음 상태를 대표하는데 도가에서는 구구귀일(九九歸一)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구구귀진(九九歸真)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 새들이 사람은 반본귀진(返本歸真)해야만 하늘을 날 수 있다며 인류를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비교적 유명한 새와 관련이 있는 건축물로는 황학루(黃鶴樓), 대안탑(大雁塔), 소안탑(小雁塔), 관작루(鸛鵲樓) 등이 있다. 이들 유명한 누각은 역사적으로 확실히 모두 수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대안탑, 소안탑은 바로 현장(玄奘)과 의정(義淨)이 경전을 얻고 법을 구한 일화를 말하고 있고 탑 안에 불경(佛經)을 보관하고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불법(佛法)은 사람을 원만해서 하늘에 올라가게 할 수 있다.
황학루를 말하자면 사람들은 최호(崔顥)의 유명한 《황학루》란 시를 떠올리곤 한다. 이 시는 겉으로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이해로는 어디에서 명사(名師)를 찾아 법(法)을 얻고 도(道)를 얻어 천국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말하고 있다.
또 관작루를 말하자면 사람들은 왕지환(王之渙)의 《관작루에 올라(登鸛雀樓)》라는 천고의 절구(絶句)를 떠올리곤 한다. 관작루는 이 시 때문에 더 유명해졌는데 시에서 “멀리 천리 바깥을 더 보려고, 다시 누각 한 층을 또 오르네(欲窮千리(里)目,更上一層樓)”라고 표현한 것 역시 수련과 관련된 내함이 있다.
현장이나 의정은 당나라 때의 유명한 승려이자 역경사(譯經師)였고 최호와 왕지환 역시 당나라 때 저명한 시인들이다. 당조(唐朝)는 그야말로 수련의 성세(盛世)였다. 내 생각에 이들 유명한 누각들에 담긴 문화적 내함 역시 사람들에게 새가 나는 것을 보고 반본귀진을 일깨워주려는 것이다.
여기서 문득 미국 뉴욕에 있는 ‘비천(飛天)대학’이 떠오르는데 나는 듣자마자 이름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주는 감각이 아주 직관적이고 간단하면서도 학습의 목적 및 대학에 다니는 목적이 바로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느끼고 깨달은 것뿐이며 비천대학에는 아마 보다 풍부한 내함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사회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어쩌면 장래 인류가 학습하는 교과서의 지식 역시 사람 이 한 층의 법리를 관통하고 수련의 내함을 관통시키 보다 높은 층차의 학습내함을 안에 관통시킬지 모른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9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