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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만방에 위덕 떨친 영락대제(永樂大帝)

 5차례 막북(漠北) 친정과 혁혁한 무공

글/유효(劉曉)

明成祖朱棣着衮龙袍像。(公有领域)
곤룡포를 입은 영락제 초상

《명사(明史)》에서는 성조(成祖) 영락제에 대해 평가하면서 “뛰어난 무용은 고조(高祖)와 같고 여러 차례 친정에 나서 막북(漠北)을 깨끗이 평정했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영락제 재위 기간에 5차례 막북 친정에 나서 북방 변경을 지켜낸 것을 중요한 공적의 하나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저명한 한학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동양소사(東洋小史)》에서는 옛날 한무제(漢武帝)・당태종(唐太宗)은 비록 여러 차례 북방을 어지럽힌 부족들을 격파하긴 했지만 모두 대장을 파견한 것이지 친정은 아니었다. 한인(漢人) 천자로 멀리 고비사막을 넘어 친정에 나선 것은 오직 명 성조 한사람뿐이었다고 했다.

영락제 당시 몽골의 상황

영락 초년(1403년) 몽골은 이미 크게 두 부분으로 분열되었다. 즉 서쪽의 오이라트(瓦剌)와 동쪽의 타타르(韃靼)로 갈라져 명나라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영락제는 군사정복을 위주로 하되 정치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정책을 보조로 삼았다.

타타르 칸은 구일리치(鬼力赤 Guilichi)였고 아룩타이(阿魯台 Aruγtai)가 태사(太師)였다. 구일리치는 여러 차례 영락제가 제안한 “사신을 파견해 서로 우호관계를 맺고 한 집안처럼 지내자”는 건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아룩타이는 명나라 사신에게 여러 차례 “진심으로 귀부”할 뜻을 비쳤다.

그런데 영락 6년(1408년) 구일리치가 아룩타이에게 피살당했다. 같은 해 겨울 원 순제(順帝)의 후예 본야시리[本雅失里 Buniyasiri 울제이 테무르(Öljei Temür)라고도 한다]를 몽골 대칸으로 옹립하고 아룩타이가 태사가 되었다. 아룩타이 태사의 협조 하에 타타르 부는 막북에서 사람과 말을 끌어 모았다. 영락 7년에는 남하해 명나라 북쪽 변경을 침략했고 또 명나라에서 파견한 사신을 살해했다.

이때 영락제는 이미 자신의 제위를 공고하게 다진 상태였고 백성들도 휴식을 취해 명나라 경제 역시 어느 정도 회복되어 발전한 상태였다. 이에 영락제는 출격하기로 결정하고 무력으로 몽골을 제압해 변경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명나라는 우선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오이라트에 사람을 파견해 분야시리와 아룩타이의 관계를 갈라놓고 또 코이드(輝特部 köide)의 바투 볼라드(禿孛羅)를 안락왕(安樂王)에 봉하고 초로스 부의 마하무드(馬哈木)를 순녕왕(順寧王), 케레이트 부의 타이핑(太平)을 현의왕(賢義王)에 봉해 서몽골을 안정화시켰다.

영락 7년(1409년) 영락제는 또 몽골족 집단 거주지에 관직을 설치하고 또 각지에 위소(衛所)를 설치했다. 또 각 부락에 도독(都督), 지휘(指揮), 천호장(千戶長), 백호장(百戶長)과 진무(鎭撫) 등의 관직을 설치하고 부락의 크기에 따라 봉건주를 임명했다. 오이라트 부는 명나라와 정식으로 신속(臣屬)관계를 맺었다.

5차례 친정

몽골 타타르 부를 공략하기 위해 영락 8년(1410년)부터 영락제는 5차례 걸친 친정에 나섰다. 황제가 직접 막북까지 출병했고 결국 마지막 친정 도중 유목천(榆木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중국 역사상 명 성조는 가장 많은 친정을 했던 황제라고 할 수 있으며 또 한족(漢族) 황제로서는 거의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잦은 친정이야말로 영락제의 웅대한 담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 제1차 친정: 영락 8년 봄, 성조는 황장손(皇長孫 역주: 영락제의 장자 주고치의 장자 주첨기로 훗날의 선덕제. 영락제는 아들보다 자신을 닮은 장손을 총애했다.)에게 북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이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제1차 막북 원정을 시작했다. 타타르의 본야시리 칸을 유목천(楡木川 내몽골 다륜多倫현 서북쪽)에서 격파하니 본야시리는 겨우 7기만 거느리고 서쪽으로 도주했다. 명군은 다시 동쪽으로 진격해 타타르 부의 태사 아룩타이를 흥안령(興安嶺)에서 격파했다. 당시 영락제는 직접 정예기병을 이끌고 큰 활약을 펼쳐 1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아룩타이도 가족을 이끌고 멀리 도주했다.

명나라 대군이 금호산(擒胡山)에 도달했을 때 영락제는 명령을 내려 전각으로 명문을 새기게 했다. “한해를 손잡이로 삼고 천산을 칼날로 삼아 단번에 오랑캐 먼지 쓸어버리니 사막을 영원히 깨끗이 했네”(瀚海爲鐔,天山爲鍔,一掃胡塵,永清沙漠)

또 청류천(清流泉)에 도달했을 때는 명문으로 “오 아름다운 제왕이 부대로 오랑캐를 섬멸하니 산은 높고 물은 맑아 영원히 나의 무위를 펼치리라”(於鑠六師,用殲醜虜。山高水清,永彰我武)라고 적었다.

이를 통해 막북 정복에 대한 웅심(雄心)을 표현했다. 영락제는 제1차 북벌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411년 12월 아룩타이가 사신을 보해 귀순할 뜻을 밝히면서 좋은 말을 바쳤다. 영락제는 토번(吐藩) 등 부락을 관장하려는 그의 요구에 대해 응답하지 않았다.

1412년 오이라트의 마하무드가 본야시리를 제거하고 그의 아들인 델베그(答里巴)를 옹립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마하무드가 차지했다. 아룩타이는 영락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명나라가 자신을 대신해 원래 군주에 대한 원수를 갚아달라고 요청했다. 영락제는 그가 귀부하려는 뜻이 진심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의 조공을 받아들이고 그를 화녕왕(和寧王)에 봉했다. 이때부터 아룩타이는 매년 한두 차례씩 조공을 바쳐왔다. 반대로 마하무드는 이를 구실로 조공을 중단했다.

◎ 제2차 친정. 영락 12년(1414년) 2월 영락제는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오이라트 부를 토벌하러 나섰다. 황태손 주첨기(朱瞻基)가 수행했다. 영락제는 대신들에게 장손이 “총명하고 영준하며 지혜와 용기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장손을 원정에 수행시킨 이유는 병사들의 노고와 정벌의 어려움을 직접 알게 하려던 것이다. 또 수하의 시신(侍臣)과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병영에서 한가할 때는 황태손에게 문치(文治)에 관한 일과 무비(武備)에 관해 설명하게 했다.

6월 명군이 델베그 마하무드가 이끄는 3만의 병력과 전투를 벌였다. 영락제는 직접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했다. 명군이 오이라트 군대를 대파하자 마하무드는 북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여기서 명군의 손실 역지 적지 않았다. 도중에 아룩타이가 자신의 부락장 이하 관리들을 파견해 영락제를 알현하게 했다. 영락제는 그들을 등급에 따라 50석의 쌀, 육포, 술과 음식 및 비단 등을 상으로 주었다. 그 후 대군이 경사로 돌아왔다.

1415년 마하무드가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며 사죄를 청했다. 1416년 3월 아룩타이가 사신을 파견해 자신이 마하무드를 격파했다고 보고하면서 아울러 포로들을 바쳤다. 영락제가 이에 대해 포상했다. 9월 마하무드 등이 들어와 조공하자 영락제는 마찬가지로 비단을 하사했다.

영락 19년(1421년) 아룩타이가 반란을 일으켜 여러 차례에 걸쳐 변경 관문을 약탈했다. 영락제는 조공 온 사신에게 마땅히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아룩타이가 따르지 않았고 더는 명조에 순종하려 하지 않았다. 또 명나라 사자를 업신여기고 조공도 바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대군을 동원해 흥화성(興和城)을 포위공격하고 방어 책임을 맡은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전사시켰다.

◎ 제3차 친정. 영락 20년(1422년) 영락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아룩타이 정벌에 나섰다. 아룩타이가 명나라 대군이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자 그의 모친과 처자가 그를 책망했다. “대명(大明) 황제가 네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기어이 배반하려 하느냐!” 이에 아룩타이는 활란해(闊灤海) 옆에 있던 군용물자와 말 등 가축을 전부 포기하고 처자식 등만 데리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영락제가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달아난 것이다.

이에 영락제는 아룩타이가 남겨둔 군용물자를 불태우고 그가 버리고 간 가축들을 거두고 군대를 이끌고 회군했다.

◎ 제4차 친정. 영락 21년(1423년) 가을 국경 관문을 지키던 장수들이 아룩타이가 곧 명나라를 침입할 거라고 말했다. 영락제는 “그는 분명 내가 직접 친정하진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내 마땅히 선봉에 서서 국경관문 요지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부서를 배치하고 영양후(寧陽侯) 진무(陳懋)를 선봉으로 파견했다. 숙위산에 이르러 적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다른 부락의 왕자인 에센토곤(也先土干 Esentoγon)이 처자식과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해왔다. 영락제는 그를 충용왕(忠勇王)에 봉하고 김충(金忠)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충용왕은 경사에 돌아와 여러 차례 아룩타이가 백성들을 해치고 국경에 재앙을 초래한다면 출격해서 적을 공격하면 자신이 앞장서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영락제는 “잠시 기다려보라!”고 했다.

◎ 제5차 친정. 영락 22년(1424년) 아룩타이가 부대를 거느리고 대동을 공격해오자 영락제가 태자에게 감국을 명하고 재차 친정에 나섰다. 충용왕 김용이 선봉에 섰다.

군대가 달란 네무르게(Dalan nemürge 答蘭納木兒)하에 주둔했을 때 체포된 첩자를 통해 아룩타이가 이미 무서워서 멀리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락제는 원정에 흥미를 잃고 조서를 내려 아룩타이의 죄를 널리 알리고 그의 부하들에게 투항하면 관대하게 대해주고 죽이지 않겠노라고 했다. 영락제는 말을 타고 경성으로 돌아오던 도중 유목천에서 붕어했다.

얼마 후 아룩타이가 사자를 파견해 조정에 말을 바쳤다. 이때 영락제의 장자 인종(仁宗)이 되어 제위에 있을 때라 조서를 내려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이들은 또 영락연간과 마찬가지로 매년 조공을 바쳤다.

친정의 의미

5차례에 걸친 영락제의 북정(北征)은 단순히 몽골 여러 부락들을 위협하고 대명(大明)의 위엄을 사막에 널리 퍼뜨려 그들이 복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북방의 우환을 감소시켰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 민족들 사이에 명조의 위망을 제고시킨 것이다. 이는 명조(明朝)가 비록 원조(元朝)를 대신했지만, 유라시아 원정을 통해 수많은 나라들 사이에 몽골의 위망이 아주 높았고 또 명나라는 주변국들은 모두 일찍이 원나라와 혼인 또는 맹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몽골의 대외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명나라가 진정으로 원나라 정권을 대신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지표가 되었다.

영락제는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펼쳐내 바로 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명나라 사람들은 “북쪽으로는 사막을 깨끗이 하고 남쪽으로는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북부)를 평정했으니 그 위덕은 한고조(漢高祖 유방)를 훨씬 능가한다.”고 칭송했던 것이다. 태자소사(太子少師) 도연(道衍)은 영락제의 업적에 대해 “신묘한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하늘과 나란히 할 만하다”고 찬양했다.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5/29/n79423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