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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隱者)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

글/ 연교(蓮橋)

【정견망】

방대한 5천년 전통문화 중에서 중화문명에는 불도선(佛道仙)을 찾는 한 가닥 흐름이 연면히 이어져왔다. 제왕이나 장상(將相)이 신선이 산다는 선산(仙山)이나 경도(瓊島)를 찾거나 시인・묵객들이 명산대천을 두루 다니고, 나무꾼이나 일반 백성이 우연히 세외(世外) 무릉도원에 들어간다든가 하는 등등. 이렇게 연면히 끊이지 않으며 수행문화를 동경하고 고층생명 및 고층공간에 대한 탐색을 연기해왔다.

허나 황실의 사자들은 대부분 망망대해에서 아득해졌고, 시인・도객(道客)이 은자를 찾는다고 해도 꼭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며, 세외의 선부(仙府 신선이 사는 곳)는 일단 나가면 다시 들어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안타까움에 손목을 움켜쥐고 탄식하는 외에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전통문화에 대한 창세주의 이런 배치는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대체 어떤 계시를 남겨주시는 것일까? 이 자리에서 개인의 소견을 함께 나누고 여러분들의 보다 좋은 의견을 기다려본다.

대천세계(大千世界)에서 도법(道法)은 바로 가장 만나기 어렵고 찾기 힘든 진귀한 보배이다. 만약 우연히 만날 수 있다거나 또는 엿볼 수 있다면 이는 모두 대단히 드문 일이며 아주 큰 연분이 있어야만 한다. 또 속인이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방문하고, 얻으려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대법(大法)대도(大道)의 바른 흐름이 한창 세상에 전해짐에도 왜 대부분의 세인들이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자신과 무관하다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신에게 이런 인연이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속인은 단지 보고 싶다거나 찾고 싶다는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며, 보거나 보지 못하는 것은 선인(仙人)이나 은자・고층생명이 결정하는 것이다. 방문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 고대에는 늘 “사부가 도제를 찾는다”고 말하는데, 다시 말해 비록 당신이 신선이나 은자를 찾아 온 산천을 두루 다녔다 해도 그것은 단지 “도제가 사부를 찾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아(自我)를 강조하고 주관적인 찾음을 중시하며 하늘의 뜻을 성실하게 공경하지 못한다. 특히 그 ‘자아’란 고층생명이 두는 바둑판 위의 바둑돌에 불과하며, 바둑돌이 어떻게 하고 싶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신불(神佛)의 선택을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모른다.

은자를 찾아가는 시인 ‘심은시(尋隱詩)’에는 종종 찾아가는 도중의 그윽한 의취(意趣)를 기술하는데, 은자가 거처하는 곳의 청정(淸淨)하고 고원(高遠)함과, 신선동부(神仙洞府)의 수승한 현묘함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바깥의 오묘함은 엿볼 수 있어도 결국에는 그 실체를 볼 수 없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탄식하고 돌아오면서 의심하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심지(心志)가 더 굳건해질 것인가? 이것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찾아오는 이가 도에 입문할 수 있는가 여부를 시험하는 게 아닌가? 사실 도를 찾는 사람이든 아니면 수련자의 수행과정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마찬가지 고험에 반복적으로 직면할 것이다.

유유한 천년 세월, 끝없이 도를 찾고, 깊이 탄식하면서, 여러 번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끝끝내 만나지 못하는 이것은 설마 창세주(創世主)께서 지금 사람들에게 남겨주신 한 갈래 실마리이자 하나의 수수께끼가 아닌가? 설마 천만년을 만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은 단지 토대를 다지는 것에 불과하고 진법(真法)과 진도(真道)가 아니면 세상에 전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설마 기존 역사에서 만나지 못했던 일체는 모두 오늘날 대법을 만나 연분을 잇기 위해 깔아둔 복선이란 말인가?

여러분은 지금 세상에 유전되는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일체 미혹을 타파하고 아주 쉽고 분명하게 말하며 세상 모든 이들이 만날 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그는 깊은 산에 감춰진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찰이나 도관(道觀)에 있는 것도 아니며, 창해(蒼海)에 숨어 있거나 동부(洞府)에 숨지 않고 정정당당하고 명명백백하게 당신을 만나고 있다. 만고의 기연이니 부디 이 기회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