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중국역사정술】 하(夏) 12

하나라 초기의 혼난

(9) 태강이 나라를 잃고 오자가 노래를 만들다

계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태강(太康)이 제위를 이었다. 하지만 태강은 안일한 즐거움에 깊이 빠져 사냥에 시간을 낭비했다. 임금이 덕(德)을 잃으며 신하와 백성들이 딴 마음을 품고 천하에 장차 변고가 발생한다.

태강이 나라를 잃고 오자가 노래를 만들다

대하(大夏)의 동방에 궁(窮)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후예(后羿)가 수령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후예는 요순시대에 9개의 해를 쏘아 떨어뜨렸던 영웅 예(羿)가 아니라 그의 후손을 말한다. 요임금 당시의 예가 활을 잘 쏘는 신궁(神弓)이었기 때문인지 이 시기 궁국(窮國)의 임금 후예를 포함한 그의 후손들 역시 활을 잘 쏘았다.

한번은 태강이 낙수(洛水) 남쪽으로 사냥을 나가 백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후예가 이 틈을 타고 무장한 병력을 배치해 낙수 북쪽을 지키자 태강이 낙수를 건너 도성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후 자신의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태강실국(太康失國 태강이 나라를 잃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라 임금 태강이 향락에 빠져 사냥을 즐기며 국사를 돌보지 않자 정사가 황폐해졌다. 태강이 사냥하러 외출했을 때 궁국(窮國)의 임금 후예가 무력으로 낙수 북쪽을 막자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태강이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그림은 청나라 도서 《채회제감도설(彩繪帝鑒圖說)》의 삽화 중 ‘사냥에 빠져 제위를 잃다(遊畋失位)’의 부분도.

《사기》에는 태강의 다섯 형제들이 모친을 수레에 모시고 태강을 마중하러 낙수 남쪽을 배회하다가 후예에게 길이 막혀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자 태강이 향락을 즐기며 임금의 덕을 지키지 못한 것을 원망하면서 강변에서 오자(五子)의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노래는 조상인 대우의 위대한 공적과 훈계를 널리 알리는 동시에 오늘날의 불행과 회한을 노래했다.

첫 번째 노래에서는 “황조(皇祖 역주: 우임금을 가리킨다)께서는 우리에게 백성을 가까이하되 그들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훈계하셨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편안하다네. 내가 천하를 보건대 어리석은 남자나 어리석은 여인도 모두 나를 이길 수 있노라. 한 사람이 여러 번 잘못을 저리르면 백성들의 원망이 어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망이 드러나기 전에 미리 경계해야만 한다. 억조의 백성들을 다스릴 때는 마땅히 두려움을 지녀야 하니 마치 썩은 새끼줄로 여섯 마리 말을 모는 것과 같아야 한다네. 그러니 백성의 위에 있는 사람이 어찌 마음에 공경과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둘째는 이렇게 노래했다.

“대우(大禹)께서는 안으로 여색에 미혹되고, 밖으로 사냥에 빠지며, 술을 좋아하고, 음악에 탐닉하거나 집을 높이 짓고 담을 장식하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셨네. 이 몇 개 중 하나만 있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셨네.”

셋째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에는 요임금 때부터 이 지역에 거주해왔었네, 지금 태강이 요임금의 도를 잃고 기강을 어지럽히다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되었구나.”

네 번째 노래에서는 “휘황하신 할아버지 대우께서는 만국의 천자로 법전(法典)과 규칙을 두셔서 자손들에게 남기셨네. 왕국의 창고는 부유하고 재물은 풍성해 셀 수 없이 많았다네. 그러나 지금은 조상이 남겨주신 공업(功業)을 황폐하게 만들고 종묘를 전복시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구나.”라고 했다.

다섯 번째 노래는 “아아,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내 가슴에 품은 슬픔이여. 만백성이 우리를 원수로 여기는데 우리가 또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답답하고 부끄럽기 그지없구나. 덕행을 받들어 실행하지 못했으니 후회한들 또 어찌 돌이킬 수 있으랴?”라고 했다.

이는 화하(華夏)민족 최초로 천자(天子)가 ‘나라를 잃은’ 기록이다. 상고시기의 이 다섯 노래는 또한 덕을 잃고 향락을 즐기는 군왕은 반드시 나라를 잃는다는 침통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중강의 즉위와 윤후의 희화 정벌

후예는 태강을 폐위하고 그 동생 중강(仲康)을 제(帝)로 옹립했다. 중강이 붕어한 후에는 그 아들인 상(相)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 기간에 하나라 조정의 대권은 줄곧 유궁국의 임금인 후예의 수중에 있었다. 이는 하나라 초기의 난세(亂世)였다.

중강 5년 일식(日食)이 출현했으나 요임금 시대부터 천상(天象)을 관장하던 희씨(羲氏)와 화씨(和氏)가 주색에 빠져 “사시(四時)를 없애고 일력(日曆)을 어지럽혀” 이런 중요한 천상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분노한 중강제는 대사마 윤후(胤侯)에게 희씨와 화씨 두 씨족의 영지로 군대를 파견해 정벌하게 했다.

윤후는 출정에 앞서 병사들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희씨와 화씨가 덕을 어기고 술에 빠져 직책을 어지럽히고 일월성신이 운행하는 역정을 뒤엎었노라. 늦가을 초하루 해와 달이 원래의 자리인 방수(房宿)에서 만나지 않고 일식이 출현해 악관(樂官)은 북을 치고 색부(嗇夫)는 말을 달려 다급히 천신(天神)에게 예를 올렸고 백성들도 일식을 구하기 위해 각종 활동을 했노라. 허나 희씨와 화씨는 천상변화를 주관하는 관직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천상에 대해 혼미해 선왕(先王)의 법을 어겼으니 주벌(誅伐)함이 마땅하도다.”(《상서 윤정(胤征)》)

윤후가 군사들에게 다짐한 이 발언에서 우리는 고대에 일식이 나타나면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경건하고 장엄하면서도 질서 있게 예의를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중강이 재위할 때 후예의 괴뢰가 되어 임금이 그 지위에 있지 못하자 일식이란 천상이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식은 월식일(月食日 역주: 달이 해를 침식)이란 의미로 다시 말해 음(陰)이 양(陽)을 침범하는 천상의 일종이다. 당시 하나라의 현실에 대응하면 신하가 권력을 쥐고 임금을 침범해 조정이 질서를 잃고 어지러운 현상으로 표현된다.

후예가 상을 몰아내고 한착이 왕조를 찬탈

중강이 붕어한 후 아들인 상(相)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나중에 후예가 상을 축출했다. 상은 나라 밖으로 도망쳐 상구(商丘)에 도읍을 정하고 동성(同姓)의 제후인 짐심씨(斟尋氏)와 짐관씨(斟灌氏)에게 의지했다. 나중에 상은 유잉씨(有仍氏)의 민(緡)을 처로 삼았다. 유잉씨란 바로 태호(太昊)와 소호(少昊)의 후예로 또 동이호족(東夷昊族)이라 불렸는데 당시에는 동이의 명망 있는 종족이었다. 상은 결혼을 통해 믿을 만한 조력자를 얻었다.

나중에 후예는 대권을 한착(寒浞)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그리고 또 한착의 꼬임에 빠져 국정을 황폐화시키고 사냥에 빠졌다. 나중에 후예는 한착에게 피살당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착이 후예를 살해할 때 대단히 잔인하고 야만적이라 윤리강상을 심하게 위배했다. 이것은 상고 역사에 남겨진 제후가 천자를 거슬러 정사를 어지럽히다 현세(現世)에 악보(惡報)를 당한 경고를 남겨준 셈이다.

《좌전(左傳)》의 기록에 따르면 한착은 후예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또 나라 밖으로 도망간 하나라 상 임금을 우환으로 여겨 아들인 오(奡)를 파견해 짐심씨와 짐관씨를 차례로 제거하고 나중에 상을 죽이기 위해 상구까지 추격하자 상이 자진했다.

상이 자살할 때 상의 왕후였던 민은 마침 임신 중이었는데 다급한 가운데 궁녀와 함께 궁궐을 빠져나가 자신의 고향인 유잉으로 돌아갔다. 유잉에서 그녀는 상의 유복자 소강(小康)을 낳으니 그가 극히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라의 천명을 이어받는다.

참고문헌:

1. 《상서정의》
2. 《사기》
3. 《좌전정의》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7/3/18/n89393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