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원(照遠)
【정견망】
9. 오행을 벗어남[走出五行]
우리가 앞 문장에서 언급했다시피 오행으로 구성된 이 한 층 우주공간을 오행 밖의 고급생명이 본다면 이 전체 오행은 곤괘(坤卦)에 속한다. 《역경(易經)》에서는 곤괘가 바로 땅(地)이고 흙(土)이 되는데 사람을 포함한, 오행 중의 일체 중생 역시 모두 흙이다. 만약 오행 속의 생명이, 그들의 모든 생명구성이 모두 오행으로 되어 있다면 그럼 오행을 벗어난다는 이런 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원래 생명구성이 전부 해체되어 이 생명 역시 철저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인들은 절대 다수 모두 오행 밖 부동(不同)한 경계의 고층생명이 천명(天命)을 짊어지고 온 것으로, 모두 우주대법인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위해 오행 속으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곤괘로 표시하는 이 오행은 바로 뭇신(衆神)을 매몰(埋沒)한 장소가 된다. 우리가 ‘곤(坤)’자를 보면 ‘土+申’으로 구성되는 형성문자이자 회의문자이다. 여기서 토(土)는 바로 흙 즉 오행이 되고 신(申)은 바로 신(神)이다. 만약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럼 영원히 흙속에서 곤경에 처하고 이곳에 묻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곤은 또 곤(捆 묶여 있다는 의미)이고 곤(困)이다.
세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똑똑히 인식할 수 있도록 전통문화에서는 줄곧 부동한 방식으로 세인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처세(處世)해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사람이 되는 표준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며, 사람이 어떻게 천지우주의 운행법칙을 인식할 수 있고 어떻게 진(真)을 닦고 도(道)를 깨달을 수 있는지 등등을 알려주었다.
예를 들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위대한 업적 및 주공(周公), 공자(孔子)로 대표되는 유가와 《역경》과 노자로 대표되는 도가 등은 줄곧 이런 작용을 일으켜왔다. 아울러 신전문화의 아주 다양한 방면에도 모두 이런 계시가 있다.
예를 들어 한자 ‘오(五)’를 보면 기본적으로 오행(五行)을 지칭하는데 고대 한어에서는 두 가지 다른 표기법이 있었다. 즉 𠄡과 㐅이다.
여기서 𠄡는 위에 수평선은 하늘이고 아래 수평선은 땅이 되며 중간의 교차된 선은 천지사이에서 음양 2기가 서로 교차해 운행하는 것을 말한다. 전체 우주가 오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오행은 정신과 물질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 우주는 바로 물질이 존재하는 동시에 정신과 의식이 존재하는 것으로 우주의 자아의식・자칭(自稱)이 바로 오(五 즉 吾)가 된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중생의 자칭 역시 오(五 吾)가 되고 세인의 자칭 역시 오(五 吾)가 된다.
두 번째 표기법인 ‘㐅’를 보면 사실 잘못임을 표현하는 부호다. 다시 말해 “내(吾 㐅)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표기하는 데는 원인이 있는데 오행의 미시적인 구성에서 내원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구조에서 중간의 5개 작은 원은 오행의 선천(先天)상태가 되는데, 다시 말해 선천일기(先天一炁 원시적인 기)의 상태이다.
우리가 이 오행의 구조 그림을 보면 바로 하나의 十자가 되는데 이를 약간 기울여서 쓰면 바로 㐅가 된다. 그런데 인류사회에서 십자가는 사망의 상징이며 㐅 역시 사형의 표지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殺 杀)이란 글자를 쓸 때 맨 먼저 㐅를 쓴다. 다시 말해 오행 밖의 고급생명이 보자면 오행 속의 일체 중생은 모두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으로 모두 죽을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든 가장 좋은 인생 태도는 바로 우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절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아를 대표하는 한자인 㐅(吾) 자체가 바로 잘못을 의미하는 부호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 사이에 모순에 직면해서 우리는 늘 상대방을 대방(對方 역주: 중국어로 직역하면 옳은 쪽)이라 하는데 이는 그가 대립하는 일방이 아니라 ‘옳은 일방’이고 ‘정확한 일방’임을 가리킨다. 즉 그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이다.
도(道)를 닦는 사람에게 있어 이런 인식은 더욱 중요한데 왜냐하면 만약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럼 자신을 바르게 닦을 수 없으니 자신의 제고는 말할 나위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각도에서 잘못을 인정하는가? 바로 자신의 내심(內心)에서 우러나와야 하는데 다시 말해 자신의 심성(心性)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悟 역주: 자신의 마음에서 잘못을 찾아 인정하는 것을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의 인식은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가? 이는 사람 본성(本性)의 각도에서 사람의 사상과 언행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일체 유형유상(有形有相)의 존재는 모두 오행이며 사람 몸 역시 오행이다. 사람의 눈과 사유방식 역시 모두 오행의 체현이다. 때문에 사람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제아무리 고급적이고 제아무리 과학적이라고 여길지라도 고급생명이 보면 그 본질은 역시 오행으로 오행을 인식한 것에 불과하다.
오행의 본질은 또 곤괘(坤卦 ☷)・무형(無形)에 속하기 때문에 사람의 육안으로 본 것은 모두 가상(假象)이자 환각(幻覺)이다. 아울러 모든 인식은 다 사람의 본성과 무관하며 또한 우주의 진상과 무관하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 선천적인 진아(真我)는 오히려 오행이 아니다.
오행 속에서 죄를 씻어내고 반본귀진(返本歸真)하려면 그럼 반드시 수행(修行)해야 한다. 수행이란 단어에는 몇 가지 내함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라면 닦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자신의 언행을 닦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오행을 닦아 없애야 한다는 의미다.
주지하다시피 주역 전체 64괘 중에서 괘사(卦辭)와 6개의 효사(爻辭)가 모두 길하고 이로운 것은 오직 겸괘(謙卦) 하나뿐이다. 겸괘의 구조를 보면 위는 곤(坤 ☷)이고 아래는 간(艮 ☶)인데 곤은 땅이나 흙을 말하고 간괘는 산을 말한다. 즉 산이 땅 속에 있는 것이 바로 겸이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설사 당신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여전히 땅 속에 묻힌 것과 같고, 일체 인식은 모두 오행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늘 자세를 낮추고 겸허해야 하며 함부로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한자 ‘서(書)’를 보면 ‘聿+日’이고 ‘聿’은 또 ‘𦘒+一’이 된다. 여기서 ‘녑(𦘒 niè)’이란 글자는 손재주가 있다는 뜻으로 손재주가 있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일(一)’은 바로 도(道)다. 즉, 글을 쓰는 원칙과 내용이 모두 마땅히 도(道)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서(書)’란 이 글자는 동사도 되고 명사도 되기 때문에 두 가지 방면의 의미가 있다. ‘서(書)’는 중국어에서 ‘수(輸 수송하거나 주입한다)’, ‘서(舒 편안하다)’와 발음이 같다. 때문에 동사로 쓰면 ‘글을 쓴다’는 의미 외에도 ‘수송하거나 주입한다’는 함의가 있다.
서적(書籍)의 작용은 바로 사람에게 ‘바른 도리(道理)를 수송하는 것’으로, 여기서 ‘바른 도리’란 생명 본성의 요구에 부합해 사람을 해탈하게 하는 도리를 말한다. 때문에 독서(讀書)는 사람을 가장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한편 서(書)를 명사로 쓰면 아래에 있는 ‘日’이 관건이 된다. 《역경》에서 리(離 ☲)괘는 해를 말하는데 오행에서는 화(火)에 속하며 또 문(文)이 되고 예(禮)가 되고 려(麗)가 된다. 다시 말해 서적은 우선 사람에게 빛과 따스함을 주는 것으로 서적은 독자를 지혜롭고 문명적이며 고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사람은 오행 속에 있고 오행의 수(數)는 물의 수(水數)가 1이 된다. 우리가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공간의 구성이 바로 물이다. 사람은 사실 물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때문에 고인(古人)은 늘 자신을 지칭할 때 여(余, 魚와 통함 역주; 중국어 발음이 같다)라고 한 것이다. 이 속에는 이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또 물속에서 살아간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때로는 자신을 여(予)라고 했는데 이 글자는 욕망을 뜻하는 욕(欲)과 발음이 같다. 다시 말해 세인은 모두 욕망 속에서 살아가며 욕망에 의해 조종당하고 자아(自我)가 없다는 뜻이다.
세인은 모두 물속에서 생활하는데, 오행에서 물은 흑색(黑色)을 주관하고 수(水)는 수(睡 수면)와 발음이 같다. 때문에 세인은 모두 미혹 속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미래가 어떠한지 볼 수 없고 더욱이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보지 못하면서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빨리 각성할 줄 모른다.
전통문화 중 도가(道家)에서는 수련해서 도를 얻은 사람을 가리켜 진인(真人 진짜 사람)이라 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말해 세인은 모두 ‘가아(假我 가짜 나)’ 속에 있으며 모두 ‘가인(假人 가짜 사람)’이 된다.
오행의 물로 구성된 이 공간 속에서 일체는 다 물이 만든 것이기 때문인데 속어(俗語)에서 모든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으며 순수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다 “물이 들어 있다(有水分)”고 말한다. 왜냐하면 “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가치가 없고 소중하지 않으며, 생명 역시 존중받지 못하는데 그럼 곧 재난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역도(易道) 속의 감괘(坎卦)는 물(水)이 되고 또한 위험, 함몰과 재난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방금 우리가 말했던 ‘서(書)’란 글자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앞서 언급한 명사 ‘서(書)’에서 아래의 ‘日’이 아주 관건적이다. 왜냐하면 일(日)은 바로 태양이고 빛이며 지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지혜(智慧)라는 ‘지(智)’자에도 ‘일(日)’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가 책을 보고 학습하는 과정은 마치 축축한 옷을 햇빛에 널어서 수분을 말리는 과정과 같다. 그러므로 세간의 속인이 학습을 하고 나면 늘 시험(考試)을 보아 표준에 도달한 후에야 비로소 상응하는 위치를 배치받고 비로소 복보(福報)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험을 본다는 ‘고(考)’는 불로 말린다는 ‘고(烤)’와 발음이 같다. 다시 말해 사람이 책을 보고 학습하는 과정이 바로 주동적으로 불로 말리는 과정과 같음을 설명한다. 생명 속의 수분을 말려버린 후에야 이 사람이 곧 순진(純真)하고 선량하며 지혜롭고 고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질 수 있다.
만약 역괘(易卦)의 각도에서 분석한다면, 사람이 물의 공간 속에 있는 것은 감괘(坎卦 ☵)에 속한다. 감괘는 양(陽)을 체(體)로 하고 음(陰)을 용(用)으로 한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중간에 있는 일양(一陽)이 바로 진실한 자신이고 위아래에 있는 이음(二陰)은 바로 자신이 처한 환경이 된다. 하나의 양이 두 음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험난한 지경에 있는 것이다.
반면 문화나 서적은 리괘(離掛 ☲)에 속하는데 리괘는 태양이 되고 불이 된다. 이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사람이 책을 보고 학습할 때는 바로 문자의 에너지로 사람의 고집스런 자기 생각과 우매하고 무지함을 화해시켜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 성질은 타오르기 때문인데 이 역시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다.
또 언어문자 속에 포함된 에너지는 저자의 경계(境界)와 대등한 것으로 경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가 쓴 책 속의 에너지가 더욱 강대해진다. 만약 신불(神佛)이나 각자(覺者)라면 글 속의 매 한 글자의 에너지는 모두 태양 에너지보다 비할 바 없이 훨씬 강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자(修道者)에게 있어 일단 도(道)에 들어와 법(法)을 얻었다면 곧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한 사람이 감괘의 상태에서 벗어나 리괘로 동화되었을 때가 바로 도를 얻은 사람의 상태가 되며 그럼 그는 곧 감괘의 경계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계 속으로 승화할 수 있다.
때문에 리괘가 일으키는 최종적인 작용은 바로 위험한 지경에 처한 사람더러 최종적으로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또 역도(易道) 속에서 문화・문명・지혜와 태양 및 빛을 대표하는 괘상이 ‘리(離)’가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일반 속인의 책이 이런 작용을 일으키기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속인은 모두 미혹 속에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물속에 있어서 그리 큰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성현(聖賢)각자(覺者) 및 정법대도(正法大道) 중에서 수련해 아주 높은 경계로 수련한 사람이 세인들에게 남겨놓은 문장과 서적만이 이런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책을 보려면 반드시 좋은 책을 보고 경전을 보아야 하며 혹은 득도(得道)한 고인(高人)의 저작을 보아야 한다.
이는 또한 중국 고대 과거제도에서 줄곧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필수과목으로 삼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는 모두 신전문화(神傳文化)이고 층차가 아주 높기에 문자 속 에너지도 대단히 커서 사람에 대한 교화(敎化) 및 정화(淨化)작용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로소 하늘이 세인의 사회적 지위를 정하고 사람에게 복분을 주는 경로이자 방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고인의 한마디 말이 생각난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다 하품이지만 오직 독서만이 높다”는 것이다. 이상의 각도에서 본다면 확실히 그렇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오행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지만 세인은 오히려 자신을 모른다. 때문에 한자(漢字) 속에 사람이 수행하는 내함을 갖춘 외에도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도 이런 내함과 계시가 있어 수시로 세인을 일깨워주고 청성하게 한다.
가령 세인의 생존공간은 바로 물인데 고급생명이 보자면 사람은 사실 물속에 잠겨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이미 이곳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상 한 사람의 사망을 “몰(沒 원래 물에 빠진다는 의미)했다”고 한다. 신불(神佛)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구도해주는 것을 가리켜 “사람을 구도한다(渡人 물을 건너게 해준다는 뜻)”고 하는데 사람을 구하는 불법(佛法)을 ‘법선(法船)’이라 부른다. 또 세간의 수련인을 가리켜 ‘연화(蓮花)’라 하는데 대다수 사람은 이런 설명을 모두 그저 비유라고 여기겠지만 사실 고급생명이 본다면 일체는 다 아주 진실한 현상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흔히 “(도를) 안다, (도를) 모른다[知道와 不知道]”, “(법)으로 하는 방법이 있다, (법)으로 하는 방법이 없다[有法辦와 沒法辦]”는 말을 한다. 우리가 한 가지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안다면 이는 우리가 ‘도(道)’를 알기 때문이고 ‘도(道)’에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때면 바로 도를 모르는 것이다.
또 어떤 일을 할 ‘법(法)’이 있어서 완성할 수 있다면 이는 ‘법(法)’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자에게 있어 마음속에 법이 있으면 곧 방법이 있는 것이고 마음속에 법이 없으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많은 지방에서 예부터 남녀관계가 난잡한 사람을 가리켜 ‘개 같은 연놈(狗男女)’이라고 욕한다. 이것은 단순히 한마디 욕에 불과한 게 아니라 여기에는 나름의 원인이 있다. 왜냐하면 세인의 사람 몸은 모두 오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데 오행 속에서 모든 조성부분은 다 생명과 형상이 있다.
전통문화에서는 12지지(地支)로 대표되는 12가지 띠가 있다. 즉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한 가지 동물로 그 사람의 속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가령 자(쥐), 축(소), 인(범),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이다. 이 대응은 그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사람의 외모나 건강, 칠정육욕, 성격이나 재능 등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출생한 시간에 따른 사주팔자(四柱八字)로 사람의 운명을 추정하는 것이 매우 정확할 수 있다.
사주팔자 중에는 비록 4가지 지지가 있지만 사람의 생명을 구성하는 가운데 모든 오행원소가 다 들어가 있다. 이 생진팔자(生辰八字)는 단지 특정한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과 극단적인 표현일 뿐이다. 속인이 세간에서 표현하는 모든 행위는 다 오행의 체현이며 남녀 간의 성행위는 그중에서도 바로 술(戌 개)의 체현이다. 다시 말해 이런 행위는 오행 속의 술(戌)의 요소가 사람을 통제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주역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다시피 64괘 중에서 천풍구(天風姤)괘가 있는데 상괘는 건(乾)이고 하괘는 손(巽)이다. 그 괘사에 이르길 “여자가 강하니 아내로 취하지 말라(女壯,勿用取女)”고 했다.
만약 혼인을 주관하는 각도에서 말하자면 이 여자가 너무 강하고 성격이나 성욕이 너무 강하니 이런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말라는 뜻이다. 단순하게 인체를 말한다면 이 괘상은 건괘는 남자인 동시에 남성의 생식기를 가리키고 손괘는 장녀(長女)로 또 고관절(엉덩이)를 대표한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이 괘상은 바로 남녀의 성관계(交媾)를 대표한다. 여기서 이 구(媾)자는 구(狗 개)와 발음이 같다.
고대 문명 유적지에서 출토된 백서(帛書) 《역경》에서는 구괘(姤卦)를 직접 구괘(狗掛)라고 썼다. 이렇게 쓴 표현을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리 엄숙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바로 신전문화(神傳文化)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천기(天機)를 알려주는 것으로 사람더러 생명의 진상을 사고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지 문학적인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다시피 오행으로 구성된 이 육신이 대표하는 일체 특징은 사실 모두 오행의 표현이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 말하자면 이 오행은 단지 오형(吾形), 즉 나의 형체와 외형일 뿐이며 진실한 자신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수행(修行)해서 이런 요소들을 닦아버려야지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오행으로 구성된 이 한 층 우주공간 역시 우주대법(宇宙大法)이 육성한 것으로 창세주(創世主)의 홍대(洪大)한 지혜와 자비의 표현이다. 때문에 이 공간 속 일체 존재는 모두 사람더러 도를 닦고 도를 깨달으며 도를 얻도록 배치된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보자면 인류역사는 마치 하나의 큰 연극을 하는 것과 같고 매 사람은 다 배우이며 무대 위의 모든 장치는 다 도구가 된다. 즉 사람더러 도를 깨닫게 하는 도구나 장치가 된다. 우리가 도를 구하고 도를 깨달으려는 생각이 있을 때면 창세주께서는 늘 이런 도구를 이용해 우리더러 자신의 문제를 보게 하고 대도(大道)의 내함을 이해하게끔 하시며 이를 통해 제고해 올라올 수 있게 하신다.
단지 수도자(修道者)에 대해서만 이런 것이 아니다. 세간의 일체 중생에 대해 말해도 천지우주의 연화(演化)는 모두 대도(大道)의 체현이며 모든 존재는 다 대도의 내함과 원인이 있다. 창세주의 홍대한 자비는 바로 일체 중생이 모두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고 모두 도에 더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극원리에 따르면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을 낳는데 일체 중생은 모두 무극대도(無極大道 창세주)의 의지의 체현인데, 대도(大道 창세주)가 중생을 소중히 여김은 중생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훨씬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오직 도를 닦고 도를 깨달으려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천지우주 중의 일체 존재가 다 가급적 빨리 그의 바람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
다시 역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행으로 구성된 이 전체 우주공간은 바로 곤괘(坤卦)가 되며 오행의 일체 존재보다 높은 것은 다 건괘(乾卦)가 된다. 건도(乾道)는 바로 천도(天道)다. 수도자에 대해 말하자면 사부가 전한 경서가 바로 건도(乾道)가 되니 이것이 바로 천도(天道)다. 곤도 속의 일체 존재는 모두 흙이며, 진흙으로 만들어진 세인이 만약 금신(金身)을 성취해 영생을 얻고자 생각한다면 그럼 완전히 우주대도(宇宙大道)에 동화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곤괘가 건괘로 변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지혜가 무량하고 한없는 복을 누리는 위대한 생명이 될 수 있다.
결론
역도와 오행에 대한 인식은 부동(不同)한 경계(境界)와 부동한 사유방식에 따라 모두 부동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현재 천상변화 아래에서 일체 사회형세는 모두 정법진도에 따라 수시로 조정되고 변화할 수 있다. 때문에 역리(易理) 추론으로 얻은 결론 역시 분명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필자의 층차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장 속에 오류가 있음을 피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부디 독자 여러분들의 자비로운 질정을 바란다.
(전체 문장 종결)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62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