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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4: 상나라 초기 14명의 선공(先公)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시조인 설(契)이 봉지를 받고 성탕(成湯)이 상조(商朝)를 건립할 때까지 4백여 년 14세를 거쳤다. 그들의 이름은 각기 다음과 같다.

설(契), 소명(昭明), 상토(相土), 창약(昌若), 조어(曹圉), 명(冥 또는 계季), 진(振 왕해王亥), 왕항(王恒), 미(微 상갑上甲), 보을(報乙), 보병(報丙), 보정(報丁), 주임(主壬 시임示壬), 주계(主癸 시계示癸), 성탕(成湯)이다.

여기에 인용한 상조 선왕의 족보는 갑골문에 배열된 순서나 《사기》의 기록과는 약간 다른다. 중화민국 시기 왕국유(王國維)가 《사기》에 나오는 보정, 보을, 보병의 순서를 바꿨기 때문인데 물론 왕국유의 주장대로 보을, 보병, 보정 순서로 하는 것이 맞다.

또 《사기》에는 진과 미 사이에 왕항이 누락되어 있다.

이상은 사실 역사 전문가들의 과제로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사기》가 만들어질 때는 이미 상조가 몰락한지 오래되었고 또 은허에서 유물이 출토되기 전이라 사소한 잘못은 따지지 않아도 무방하다. 다만 여기서는 여러분들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 특별히 언급한 것이다.

상토가 말을 이용하다

설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소명(昭明)이 자리를 이었지만 소명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어서 후인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가 설의 아들이란 것뿐이다.

소명의 아들이자 설의 손자인 상토(相土)는 상나라 선조 중에서 유명 인물이다. 상토가 재위에 있던 시기 하조(夏朝)의 군왕은 제상(帝相)과 후예(后羿)였다. 상토는 한 방면 제후들의 수령이라 상후(商候)로 불린다.

상토는 제상 15년 다시 말해 기원전 1962년 무렵 구유로 먹이를 주고 우리에 가둬 기르는 방식으로 말을 사육하고 훈련시켜 마차로 짐을 실어 효율적인 운반도구로 삼았다.

이는 당연히 한 시대를 가르는 획기적인 시도였고 상토가 가장 원시적인 마차를 만든 것이다.

말을 이용하게 되면서 상족(商族)의 힘이 신속하게 강대해졌고 상족의 방국(邦國)의 세력도 날로 강해졌다. 상토는 족인(族人)들을 이끌고 멀리 이주했다. 상족이 영토를 대대적으로 개척하려면 반드시 마차가 큰 역할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했다.

상족 사람들의 수레는 하상주(夏商周) 삼대에서 유명했는데 기술도 좋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고 한다. 천년 후 어느 날 공자의 제자(역주: 안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대해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라의 역법(曆法)을 행하고, 은(殷 상)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나라의 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韶舞)로 할 것이다.”

즉 공자도 상조(商朝)의 수레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상족 사람들이 원래 짐을 싣는데 사용하던 마차는 나중에 군사용으로 진화해서 전장을 누비는 전차(戰車 준마가 수레를 끌고 수레 위에 무사가 배열)가 되었다.

상족은 이렇게 동쪽과 북쪽으로 발전했고 세력 범위가 황하 하류, 태산 남북부 및 발해 연안까지 확장되었으며 또 태산 아래 ‘동도(東都)’를 건설했다.

사람이 어깨로 메거나 손으로 드는 것에서 말이 끄는 수레를 이용한 것은 실로 대단한 진보였다. 상족은 이후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했고 여러 차례 이주했지만 그때마다 늘 상토가 말을 이용한 덕을 보았다.

《시경‧상송(商頌)‧장발(長發)》에는 “위엄 있고 용맹하신 상토께서 멀리 해외까지 평정하셨다(相土烈烈,海外有截)”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시기 상족 사람들에게 있어 해외(海外)란 어디를 말하는 걸까? 근년에 들어와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은 이미 다른 대륙에 가본 적이 있다.

상토는 상족의 수령으로서 ‘중앙 조정’에서 일을 했는데 직책은 하나라의 사마(司馬)로 사방을 정벌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때는 하조 내부가 몹시 혼란했던 시기로 그는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있었기 때문에 하조 관원들 중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은본기》에서는 “상토가 하조를 도왔으나 그 공이 상에서 드러났다(相土佐夏,功著於商)”고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이라 상토에 관한 사적은 이미 고증할 방법이 없고 후인이 알 수 있는 것은 상토가 하상주 시기 비교적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현명(玄冥)이 물을 다스리다

하조 중기에 이르러 상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설의 6세손이자 상토의 증손자인 치수 영웅 명(冥)이었다.

명은 상족의 6번째 제후로 하나라 소강(小康) 시대에 해당한다. ‘소강중흥’ 시기에 또 큰 홍수가 났는데 명은 소강 11년 홍수가 범람하는 문제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다.

명은 아주 부지런하고 훌륭한 관리였다. 대우(大禹)가 13년간 치수에서 성공했다면 명은 20여년을 하루처럼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황하에서 순직했다.

그가 물을 다스린 경위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의 명성만은 후대까지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기 위해 이름을 남겨놓은 것이다. 후세 역사가들과 상족 후손들이 그를 높이 찬양한 것을 보면 그가 당시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가령 《국어‧노어상》에서는 “설(契)이 사도(司徒)가 되자 백성들이 화합했고 명(冥)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다 물에 빠져죽었습니다. 성탕은 관대하게 백성을 다스리고 걸왕의 잔폭한 정치를 몰아냈습니다.…중략…. 때문에 상나라 사람들은 제곡(帝嚳)에게 체제(禘祭)를 지내고 설에게 조제(祖祭)를 지냈으며 명에게 교제(郊祭)를 올리고 성탕에게 종제(宗祭)를 올렸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체제, 조제, 교제, 종제는 각각 4가지 서로 다른 제사를 말한다.

이 중에서 ‘체(禘)’가 가장 높고 ‘교(郊)’가 그 다음이며 ‘조(祖)’와 ‘종(宗)’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보통 ‘조제’는 ‘체제’와 함께 거행하고 ‘종제’는 ‘교제’와 함께 진행했다. 즉 ‘체’와 ‘교’는 야외에 단을 만들어 노천에서 제례를 진행했고 제사절차를 끝낸 후 궁궐로 돌아온 후 ‘조제’나 ‘종제’를 지내는데 급이 각기 달랐다.

즉, 노천에서 천제(天帝)인 제곡(帝嚳)에 대한 제사를 지낸 후 궁궐에 돌아와 ‘설’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또 노천에서 명(冥)에 대한 제사를 지낸 후 궁궐에 돌아와 ‘성탕’에 대한 종제를 지냈다는 뜻이다. 명과 같은 선조를 설이나 탕보다 더욱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교제란 무엇인가? 이는 천(天)・지(地)・일(日)・월(月)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교제를 올리는 대상은 ‘사람’은 자격이 없고 오직 천지일월의 ‘신(神)’만 누릴 수 있으며 제를 올리는 장소, 시간, 주관자 등에 관해 모두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가령 지금 북경성에도 명청(明淸)시대 황제들이 교제를 지내던 장소인 천단(天壇)・지단(地壇)・일단(日壇)・월단(月壇)이 남아 있는데 유명한 관광지인 이런 곳에 가서 보면 장엄하고 웅대한 모습을 통해 고인(古人)들이 제사를 지낼 때 얼마나 경건했는지 엿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 가정에서는 매년 정월(正月)이면 모두 수신(水神)을 맞이했고 농촌 가정에서는 더욱 중시했는데 이 수신이 바로 상족의 조상인 수신 현명(玄冥)이다.

해(亥)가 소를 길들이다

치수의 영웅 명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해가 그의 지위를 이었으니 왕해(王亥) 또는 진(振)으로도 불렸다. 해는 수리 전문가였던 부친의 사업을 잇는 대신 다른 큰일을 했다.

역사가들은 해가 한 일을 가리켜 ‘해가 소를 길들였다(亥作服牛)’고 말한다. 그가 어떤 방법으로 야생 소를 길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소를 가축으로 삼았다.

해의 조상인 상토(相土)는 말을 가축으로 길러 마차를 만들었는데 이는 황제(黃帝)의 인력거(人力車)에 비교하면 동력거(動力車)라 할 수 있다. 반면 해는 소를 길들였으니 말이 끄는 수레를 마차(馬車)라 부른다면 소가 끄는 수레는 우차(牛車)가 된다.

소는 말보다 더 많은 짐을 감당할 수 있고 또 온순하고 농사나 화물운반에도 모두 적합하다. 때문에 소를 가축으로 길들인 공적은 말을 이용한 것과 나란히 거론할 만하며 지난 몇 천 년간 중국 농민들의 생활 속에서 소는 거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가장 유능한 조수였다.

한편 상나라는 농업과 목축업이 신속히 발전하면서 상족 사람들의 물건에 많은 여유와 축적이 생겨났다.

이에 물자와 생산이 너무 풍부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해는 이에 족인(族人)들을 소가 끄는 우차에 태우고 화물을 실어 다른 제후국에 가서 화물을 보냈다. 이들이 여러 제후국 사이를 돌아다니며 물품 교환을 진행하자 이로부터 각양각색의 다양한 상업과 무역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해는 바로 ‘행상(行商)’이란 업종의 선구자가 되었다. 상조가 주조(周朝)에 의해 멸망한 후 상족 유민들이 전통을 이어받아 상업활동을 지속했기 때문에 진짜 상인(商人)이 되었다.

상족 후인들은 해를 존중해 ‘고조왕해(高祖王亥)’라 부른다. 옛 상족 선공(先公)들 중 오직 왕해만 ‘왕(王)’이라 불리게 되는데 후세 사람들이 또 왕해라고 불렀다.

그런데 왕해는 유역족(有易族)에게 죽임을 당했다. 《산해경‧대황동경》에 왕해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해가 유역과 하백(河伯)에게 소를 맡겼는데 유역이 왕해를 죽이고 소를 차지했다.”

즉 무역활동을 하던 왕해가 훈련된 소를 유역족과 하족(河族)이 있는 곳에 맡겼는데 유역족 사람이 그를 죽이고 그의 소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상족 사람들의 마음속에 왕해는 지위가 아주 높았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몹시 중시했던 상족 사람들이 때로 제천행사 때 왕해의 제사를 배향했다. 또 비바람이 순조롭기를 빌 때도 그를 동시에 제사지내며 그의 보우를 얻으려고 했다. 근대에 출토된 갑골문 기록 중에 상조 후인이 그를 제사 지낼 때 한 번에 무려 50마리의 소를 희생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숭고한 예절을 받은 것은 아마도 그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순직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갑미의 복수

왕해의 아들 상갑미(上甲微)는 상족의 제8대 선공(先公)이다. 부친의 죽음 때문에 그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부친이 피살된 지 4년 후 상갑미는 부친의 복수를 위해 나섰다.

갑자미가 군대를 출정한 것은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하백족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 이 이야기가 《죽서기년》에 기록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복수를 위해 출전한 상갑미의 대군이 아침에 중도(中都)를 출발해 저녁에 역수(易水)에 도착해 한차례 전투로 승리했다는 것이다.

즉, 유역의 거주지가 상족의 하류에 있었기 때문에 상갑미의 군사가 중도에서 배를 타고 원수(洹水 지금의 안양하)를 따라 원구(洹口 역주: 원수가 황하와 만나는 곳)에서 하백 군대와 합류해 급류를 타고 내려가 하루 만에 유역이 사는 역수에 도달한 것이다. 유역 부락이 상족의 대군에게 격파당하고 유역의 군대가 퇴각할 때 하백 부락의 수령이 이끄는 군대가 퇴로를 차단해 유역의 수령 면신(綿臣)을 죽였다.

유역국은 이로써 멸망하고 국토는 상나라의 판도로 편입되었다.

상갑미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동주(東周) 시기 유명한 군자 전금(展禽 역주: 도덕이 고상했던 노나라 대부 유하계)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상갑미가 설의 공업(功業)을 이은 사람이라 상족 사람들이 그에게 보제(報祭 은덕에 보답하는 제사)를 지낸다.”

또 《주역》을 풀이한 것으로 유명한 주나라 문왕(文王)이 아들인 무왕(武王)에게 남긴 유훈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옛날에 상갑미가 하백의 손을 빌려 유역족에게 복수하자 유역이 죄를 인정했다.”

여기서 아마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왕해 한 사람을 죽였을 뿐인데 왜 복수할 때는 유역이란 나라 전체를 멸망시켰고 또 유역인들 스스로 죄를 인정했는가? 상갑미가 한 일이 과연 옳은가?

그렇다, 덕이 없고 폭력을 남용하는 자는 강력한 무력을 사용해 먼저 “힘으로 사람을 정복하고” 그리고 나서 “덕으로 감복시킬” 필요가 있다. 유역 수령의 악행을 징벌하지 못하면 전체 종족의 부패를 이끌어 후과가 더욱 심각할 수 있다. 때문에 유역인이 스슬 죄를 인정한 것이다.

고대인들의 도덕관념은 진실로 대단히 고상했다. 영도자의 도덕수준은 직접 대중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알고보면 인과는 원래 이렇게 간단하다.

참고문헌

1.《왕국유전집》
2.《죽서기년》
3.《관자》
4.《론어》
5.《모시정의》
6.《세본(世本)》
7.《국어》
8.《이아》
9.《예기정의》
10. 《산해경》
11.《사기》
12.《청화간(清華簡)‧보훈(保訓)》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7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