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태평(太平)
【정견망】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806~820년) 연간에 무릉군(武陵郡) 개원사(開元寺)에 혜소[慧昭 또는 혜조(慧照)라고도 함]라는 법호를 지닌 승려가 있었는데 겉으로 보면 몸이 쇠약하게 보였다. 그는 사람의 길흉화복을 예언할 수 있었는데 매번 다 적중했다. 성격이 고독해서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고 늘 혼자 집에 머물며 좌선(坐禪)했으며 옆에서 시중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늘 향리(鄕里)에 나가 동냥하며 살아갔다.
향리의 한 80대 백성은 “혜소법사가 이곳에 계신지 이미 60년이 지났는데 그분의 용모는 전과 다름이 없으시다. 그분의 연세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나중에 진광(陳廣)이란 사람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무릉의 관리로 부임했다. 진광은 독실한 불교 신자라 어느 날 사찰에 가서 참배했다. 그는 승려들을 두루 방문하다가 마지막에 혜소가 머무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혜소가 진광을 본 후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말했다.
“진군 왜 이렇게 늦게야 왔는가?”
진광은 자신이 전에 혜소를 만난 적이 없기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는 지금껏 법사님과 왕래한 적이 없는데 법사님께서는 어찌 제가 늦게 왔다고 하시는지요?”
혜소가 말했다.
“이 일은 몇 마디 말로 똑똑히 설명할 수 없으니 하룻밤 시간을 들여야만 설명할 수 있다네.”
진광이 이상함을 느껴 다음 날 또 혜소의 거처로 다시 찾아와 이 일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혜소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유씨(劉氏)의 후손으로 원래 팽성(彭城) 사람이라네. 남송(南宋) 문제(文帝)의 현손(玄孫)에 해당하지. 증조부는 파양왕(鄱陽王) 유휴업(劉休業)이셨고 조부님이 유사홍(劉士弘)이셨네. 조상님들이 문학에 재능이 있어 꽤 이름이 있으셨는데 남제(南齊)의 경릉왕(竟陵王) 자량(子良)과 잘 아시는 사이였다네. 자량이 어질고 뛰어난 문학 선비들을 초빙하자 조상님들도 모두 동참하셨지. 나중에 제(齊)와 양(梁) 두 조대(朝代)에 걸쳐 관직에 계셨고 일찍이 회계현령(會稽縣令)을 지내셨다.
나는 양무제(梁武帝) 보통(普通) 7년(526년) 여름 5월에 태어났다네. 삼십에 처음 진(陳)나라 조정에 나가 관직을 구했고 진선제(陳宣帝) 때 알려지지 않은 미관말직에 있었다네. 나는 오흥(吳興)의 심언문(沈彥文)과 술친구이자 시 친구였네. 나중에 장사왕(長沙王) 진숙견(陳叔堅)과 시흥왕(始興王) 진숙릉(陳叔陵)이 모두 빈객을 널리 모집해 성세가 대단했는데 각자 자신의 권력을 믿고 서로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다네. 나와 심언문은 모두 장사왕의 문하에 있었지. 나중에 시흥왕 진숙릉이 피살당한 후 장사왕 역시 재앙을 당하면 우리에게도 화가 미칠까 우려해 함께 은둔했다네.
우리는 산속 깊이 몸을 숨기고 도토리와 밤으로 허기를 채웠지. 얇은 옷 한 벌로 추위와 무더위에도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승이 우리가 사는 곳에 와서 내게 말씀하셨네. ‘자네는 골상(骨相)이 아주 특이해서 병에 걸리지 않을 걸세.’
심언문도 그에게 예를 올리고 약을 구하자 노승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자네는 유군(劉君)처럼 그렇게 장수하진 못할 걸세.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설령 내 약을 먹어도 자네에겐 무슨 이익이 없을 걸세.’
말을 마친 후 곧 떠나셨는데 떠나실 때 또 내게 말씀하셨네.
‘속세에서 명리(名利)를 위해 서로 싸웠지만 결국에는 또 무엇을 얻었는가? 단지 불교도(佛敎徒) 만이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네!’
나는 그 말씀에 크게 탄복했고 그 후 15년간 세상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네.
나중에 심언문과 함께 건업(建業 역주: 남조 여러 왕조의 수도로 지금의 남경)에 갔는데 당시 진 왕조는 이미 멸망했었네. 궁궐은 폐허가 되었고 누대와 성곽이 허물어져 가시덤불만 무성했지. 경양궁(景陽宮)도 거미줄만 가득했고 오직 텅 빈 건물만 남아 있었네. 의관과 문물과 같은 것들은 전부 다 사라졌지. 옛 친구들을 만나 서로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네.
‘진후주(陳後主 역주: 진조 마지막 황제 진숙보)가 교만하고 음란하더니 결국 수문제(隋文帝)에게 멸망당했으니 실로 가련하구나!’
나는 또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네. 내가 그들에게 진후주와 진(陳)씨 여러 왕들의 행방을 물으니 그들은 모두 장안에 들어갔다고 했네. 이에 나는 심언문과 함께 자루를 메고 걸식하면서 마침내 관중(關中)까지 들어갔다네. 나는 원래 장사왕의 빈객으로 있으면서 그의 은혜를 많이 입었지. 듣자하니 그가 또 과주(瓜州)로 옮겨갔다기에 또 그곳으로 찾아가 그를 찾아뵈었지.
장사왕은 어려서부터 화려하게 살던 분으로 또 일찍이 왕에 봉해져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자금은 유배되어 생계조차 꾸려나갈 수 없었다네. 당시 그는 마침 심비(沈妃)와 술을 마시다가 나와 심언문이 그를 찾아가니 장사왕이 한참동안 비통하게 통곡하고 나서는 눈물을 훔치며 내게 말했네.
‘하루 사이에 집과 나라가 몰락하고 골육은 뿔뿔이 흩어졌으니 설마 이게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이후 나는 곧 과주에서 몇 년을 머물렀네. 장사왕이 돌아가신 몇 년 후 심언문도 죽었다네. 이에 나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회계산 불사(佛寺)에 자취를 감췄는데 그곳에서 20년을 머물렀다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백 살이 넘었지. 비록 용모는 마른 나무처럼 수척했지만 근골(筋骨)이 강건하고 체력도 쇠하지 않아서 하루에 백리를 충분히 갈 수 있었다네. 또 한 승려와 함께 장안까지 간 적도 있다네. 당시 당나라 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했지. 이때 이후 나는 서울인 낙양에 머물거나 혹은 장강 양안을 운유하거나 또는 삼촉(三蜀)과 오령(五嶺)을 떠돌아 다녔지만 내가 죽을 곳을 찾지 못했다네.
지금 내 나이는 이미 290살이 넘었는데 평생 수많은 추위와 더위를 겪었지만 단 한 번도 작은 병에 걸린 적도 없다네. 정원(貞元) 말년에 이 절에서 한 위풍당당한 대장부를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의관이 아주 화려하고 당당했네. 자세히 보니 바로 원래 장사왕이셨네. 내가 그를 집안으로 청해 지난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자 그는 몹시 슬퍼하면서 마치 살아있을 때와 같았다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네.
‘십년 후 나의 6세손인 진광이 이 군(郡)에 와서 관리가 될 걸세. 법사는 반드시 이 일을 잘 기억하시게.’
‘왕야께선 지금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라고 묻자 그는 대답했네.
‘저승에서 관리로 있는데 직위가 꽤 높다네.’
그리고는 통곡하면서 말했다.
‘법사는 아직도 건재한데 나는 이미 6세 후손이 있으니! 실로 비참하지 않은가!’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당신의 이름을 기록해 경서 상자 안에 놓아두었지. 작년이 원래 만 10년이 되기에 내가 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네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기에 의아해 했다네. 어제 향리에 탁발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한 관리를 만나 그에게 물어보고 마침내 자네 소식을 들을 수 있었네. 자네가 내가 있는 이곳을 찾아올 때 자네 모습을 보니 장사왕과 아주 흡사했다네. 그런데 당시 꿈을 꾼 후 오늘까지 이미 11년이 되었으니 그래서 자네가 늦게 온 것이 의아하다고 한 것일세.”
혜소는 말을 마친 후 만감이 교차해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는 경서 상자 안에서 진광이란 이름을 적은 것을 꺼내 진광에게 보여주었다. 진광이 거듭 예를 올리고 부처님을 모실 뜻을 세우고 기꺼이 혜소의 제자가 되려 했다.
혜소가 말했다.
“자네는 잠시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오게나.”
진광이 그의 가르침에 따라 돌아갔다. 이튿날 그가 다시 혜소의 거처를 찾아오니 혜소는 이미 떠난 뒤였고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때가 당 헌종 원화 11년(816년)이었다.
진광은 대화(大和) 초년(당 문종 827년)까지 파주연(巴州掾)으로 있었고 촉 지방에서 갑자기 혜소를 만났다. 진광이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 기뻐서 거듭 예를 올렸다.
“저는 관직을 버리고 사부님을 따라 초연하게 물외(物外)를 운유하고 싶사옵니다.”
혜소가 그의 청을 허락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이 함께 여관에 묵었는데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진광이 일어나 보니 혜소는 이미 떠난 뒤였다. 이때부터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혜소는 양나라 보통 7년에 출생했으니 보통 7년은 병오년(526년)이고 당 헌종 원화 10년은 을미년(825년)으로 총 290년이다. 이는 혜소 자신이 한 말이니 믿을만하다. 필자는 늘 양조(梁朝)와 진조(陳朝) 두 조대의 역사를 가지고 혜소가 한 말과 검토해보면 아주 일치한 것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본다면 그가 한 말은 절대 사람을 속이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 《선실지(宣室志)》)
역주: 사부님께서는 혜소에 대해 일찍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신 적이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 혜소(惠昭)는 290세를 살았다.”(《파룬궁》)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13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