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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10: 상조(商朝) 건립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상조건립(商朝建立)

하걸이 쫓겨난 후 하사(夏社)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여기서 하사란 하조(夏朝)의 신을 모시는 신사(神社)로 왕조의 상징이다. 이곳에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중요한 업무를 상의하며 각종 의식을 거행했다. 상조(商朝)는 자신의 신사(神社)가 따로 있어 신사에서 상조의 선공(先公)과 상제를 모셨시 때문에 전 왕조인 하조의 신사에서 국가대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하의 하인(夏人)들에겐 여전히 하의 종사(宗社)가 필요했다. 성탕은 이에 하사를 부수지 않고 남기게 했고 이에 특별히 《하사》란 문장을 써서 하늘에 고했다.

이렇게 한 조대가 끝났으나 마치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았다. 하나라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도 않았고 상나라 사람들 역시 하나라 사람의 땅을 차지하지 않았다. 천지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후 성탕의 군대는 박도(亳都)로 돌아왔다. 차이점이라면 이 소식을 들은 천하의 많은 제후들이 찾아와 일순간에 3천의 제후들이 운집해 ‘3천 제후대회’가 바로 박에서 진행되었다.

성탕이 보새(寶璽 역주: 천자를 상징하는 인장)를 얻은 후 천자 자리의 왼쪽에 놓았다. 그런 후 물러나서 두 차례 예를 행하고 제후의 위치로 돌아왔다.

그는 말했다.

“이는 천자의 자리이니 도(道)가 있는 사람이라면 앉을 수 있습니다. 천하는 일가(一家)의 전유물이 아니며 도가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도가 있는 사람이 다스려야 하며 오직 도가 있는 사람만이 장기간 점유할 수 있습니다.”

성탕이 자리에 앉지 않는데 누가 앉을 수 있겠는가? “제후들이 모두 복종해” 아무도 천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으며 여러 차례 서로 양보한 후 “탕이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상고(上古) 시기 두 번째 조대(朝代)가 이렇게 시작되었고 바로 상조(商朝)였다. 이때 성탕의 나이는 이미 87세였다. 이후 중국 조대의 교체는 무력으로 정벌하는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성탕은 이때 사람들더러 자신을 ‘성탕왕(成湯王)’이라 부르게 했다. 원래 그는 상족의 군주였으나 이제는 천하의 군왕(君王)이 된 것이다. 여기서 왕(王)이란 원래 극히 존귀한 칭호였다. 《설문해자》에서는 왕에 대해 “왕은 천하가 귀의하는 곳(王,天下所歸往也)”이라 했다. 한 대의 동중서(董仲舒)는 “고대에 문자를 만든 이는 3획을 긋고 그 가운데를 이어서 왕(王)이라 했다. 여기서 삼(三)은 천지인(天地人)을 가리키니 이 셋을 통합하는 이가 왕이다.”라고 했다. 공자는 “하나가 셋을 관통한 것을 왕이라 한다”고 했다.

낙수(洛水)에서 신의 명령을 받고 11차례 정벌전쟁을 거쳐 천자의 새(璽)를 손에 넣자 자연히 제후들이 모두 복종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하늘의 뜻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성탕왕은 비록 87세였지만 역시 공경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다면 왜 성탕은 이토록 겸양하면 여러 차례 양보했던 것일까? 이는 예의의 나라에서 예절이다. 중화민족의 ‘주례(周禮)’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상탕은 왕이 된 후 역법을 고쳤다. 원래 하조의 역법은 인월(寅月 동지 이후 두 번째 달로 음력 1월에 해당)을 정월로 삼아 1년의 처음으로 삼았지만, 상조는 한 달을 앞당겨 축월(丑月 동지 이후 첫 번째 달로 음력 12월에 해당)을 정월로 삼았다.

하조의 복식은 주로 검은색이었는데 상조는 흰색으로 바꿨다. 중국은 ‘의관상국(衣冠上國)’으로 불릴 정도로 각 조대의 복식(服飾)마다 특별한 규정이 있었는데 원래 몇천 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성탕의 정치

성탕은 직접 여러 제후들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박읍(亳邑) 동쪽 교외에서 봄날 가장 성대한 교제를 경건하게 올려 상제와 조상들께 제사를 지냈다. 이는 상나라에 천명을 주신 상제께 감사드리고 조상들께 보호를 기원한 것이다.

제사를 끝낸 후 새로 왕이 된 성탕이 자신의 시정보고를 발표했다. 그는 여러 제후들과 백관들에게 백성들에게 잘 대해줄 것을 당부했다.

“백성을 위해 공로를 세우지 못하거나 힘써 일하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그대들을 엄형으로 처벌할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또 “옛날의 하우(夏禹 우임금)와 고요(皐陶)는 오랫동안 밖에서 힘들게 일하며 백성을 위해 공을 세워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게 했소. 동쪽으로는 장강, 북쪽은 제수(濟水), 서쪽은 황하, 남쪽은 회수(淮水)를 경계로 사방의 물길(水路) 이미 다스려지자 만백성이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게 되었소. 또 후직(后稷)이 파종방법을 전해 농민들이 온갖 곡식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소. 이들 세 분은 모두 백성을 위해 공을 세웠기 때문에 후대(後代)가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오. 옛날 황제 시대 때 치우(蚩尤)는 그의 대부들과 함께 난을 일으키고 백성을 학대한 결과 하늘이 돕지 않은 증거가 있소. 그러니 선왕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없소.”

성탕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그대들이 무도하다면 그대들에게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그대들은 그때 나를 원망하지 말라.”

한편 《회남자‧수무훈》에는 이 87세 노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탕왕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을 자며 총명함에 이르렀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백성들에게 관대하게 대했다. 덕과 은혜를 베풀어 곤궁한 자들을 구제했고 죽은 이를 조문했으며 환자를 문병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봉양하게 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친하게 따르고 정령이 흘러 행해졌다.”

성탕이 천명을 빼앗아갔다고 원망하던 하걸(夏桀)이 이를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했을 것이다.

‘좋은 군왕이 되기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심지어 잠조차 편히 잘 수 없다니, 됐다, 그만 두자, 나는 그래도 남소(南巢)에서 좀 편안히 지내자.’

그렇다면 이때 여러 제후국들은 종주(宗主)인 왕에게 어떤 것을 진상했을까? 성탕은 이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후들이 공물을 진상할 때 어떤 이는 소나 말이 나오지 않음에도 먼 곳의 물건을 바치게 하니 그들에게 불편함을 조성하고 있소. 나는 이제 그들이 있는 지역의 형세와 국력에 따라 쉽게 구할 수 있고 귀하지 않은 물건을 바치게 하는 《사방헌령(四方獻令)》을 만들었으면 하오.”

이윤은 성탕의 명령에 근거해 사방령(四方令)을 제정했다.

개괄적으로 설명하자면 바다가 가깝고 짧은 머리에 문신을 하는 풍속이 있는 동방 부족에게는 물고기 껍질로 만든 칼집, 오징어, 장(醬), 상어껍질로 만든 방패와 예리한 검을 공물로 바치게 했고, 남방 제후국들은 진주, 대모(玳瑁 바다거북의 일종), 상아, 코뿔소 뿔, 깃털, 학, 다리가 짧은 개 등을 바치게 했다. 또 서방 나라는 광물과 동물이 풍부해 주사, 소꼬리로 만든 백모(白旄 깃대 장식), 모전(毛氈 양탄자), 강력(江曆 구슬), 용뿔, 신구(神龜)를 바치게 했으며 북방 여러 나라에는 낙타, 백옥(白玉), 야생마, 좋은 활 등을 바치게 했다.

사실 이들 진공품 중에는 진귀한 새나 기이한 보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나오는 물건들 위주이고 그리 사치스럽지 않았다.

한편, 성탕 집정 초기에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 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자녀를 남에게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탕이 장산(莊山)의 금속으로 화폐를 만들어 이를 이용해 백성들이 판 자녀를 다시 사오게 했다.”

성탕 즉위 2년 “왕이 박(亳)에서 즉위하고 처음으로 하사(夏社)를 지었다.” 즉 지진으로 파괴된 하사를 새로 만들게 한 것이다. 4년 후 하걸이 남소에서 세상을 떠나자 성탕은 전국에 ‘춤과 음악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려 하나라 사람들을 존중해주었다. 또 우임금의 후손을 기(祁) 땅에 봉하고 공작의 작위를 주어 하사(夏社)를 모시게 했다.

성탕은 세상을 뜨기 3년 전 사람을 시켜 대우(大禹)가 주조한 구정(九鼎)과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을 상나라 도읍으로 옮기게 했다.

상탕이 집권한 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100세였다. 《시경 장발(長發)》에 상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했다.

“상제의 명에 어김이 없으시니
탕왕에 이르러 성취하셨네.
탕왕이 때마침 내려오시어
성스럽고 공경함을 날로 더하니
신께서 오래도록 강림하시고
상제만을 공경하니
상제의 명으로 구주에 모범이 되게 하셨네

작은 법 큰 법을 모두 받으시어
여러 제후들의 모범이 되셨고
하늘의 큰 복을 받으셨도다.
다투거나 탐내지도 않으시고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으시어
너그러이 정사를 베푸시니
온갖 복록(福祿)이 모여들었네.

작은 법 큰 법을 다 받으시어
여러 나라를 보호하셨네.
하늘의 은총을 받으시어
용맹과 무위를 널리 떨치셨네.
떨거나 동요하지 아니하시고
놀라거나 두려도 아니하시어
온갖 복록을 차지하셨네.”

상천(上天)은 중생에게 자비로워 대덕지사(大德之士)의 손을 빌려 하늘의 위엄을 펼쳐 보이셨다. 그러므로 상탕이 있어 인자하고 관후(寬厚)함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게 하셨고 상탕의 천추공적(千秋功績)에 힘입어 걸을 토벌하고 상을 세우게 하신 것이다.

참고문헌:

1. 《죽서기년》
2. 《사기‧은본기》
3. 《일주서(逸周書)‧은축해(殷祝解)》
4. 《제왕세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8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