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효(劉曉)
【정견망】
역사상 매 조대마다 늘 이인(異人)이 있었다. 크게는 사회의 변천이나 조대의 갱신에서 작게는 가족과 개인의 일에 대해 미리 예지했다. 천기이기 때문에 그들은 늘 넌지시 사람들에게 알려주며 나중에 일이 일어난 후에야 사람들은 예언의 정확성을 비로소 알게 된다.
북주(北周) 시기에도 이런 이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강련(強練)’이라 불렀다. 초기에 사람들은 그의 성이 강(強)인줄만 알았고 이름은 알지 못했다. 그가 하는 말은 처음 들으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후 다 영험한 줄 알게 되었다.
북위(北魏)에 이순흥(李順興)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늘 도사의 관을 쓰고 다녔으며 미래의 일을 즐겨 예언했고 또 많은 경우 잘 들어맞았다. 그래서 그를 ‘이련(李練)’이라 불렀다. 여기서 ‘련’은 믿을만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강 씨가 ‘이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강련이라 부른 것이다.
강련은 일반인과 달리 외모가 당당하고 체격이 아주 건장했다. 늘 정신이 흐리멍덩하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만일 그가 어떤 일을 논하고자 하면 그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말한다. 만일 그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남이 아무리 부탁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통상 여러 절에 떠돌아다니며 거주했다. 어떤 때는 백성들 집에도 머물렀고 왕공 저택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존경하고 믿었다.
진공(晉公) 우문호(宇文護)가 피살되기 전에 강련이 손에 호로박을 하나 들고 우문호 저택의 대문 밖에 와서 호로박을 문 위에서 깨뜨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박이 깨지니 아들이 괴롭구나.(瓠破子苦)”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당시 주국(柱國)이자 평고공(平高公) 후용은(侯龍恩)이 일찍이 우문호를 뒤따라 그에게 중용되었다. 강련은 또 후용은의 집에 가서 그의 아내 원(元)씨와 첩, 시녀 하인 등을 불러내 한 줄로 앉으라 했다. 많은 사람들은 부인과 너무 접근하여 앉는 것은 예에 위배되므로 모두 함께 앉지 않으려 했다. 강련이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같은 사람인데 어디 귀천의 구분이 있는가?” 하며 억지로 앉게 했다.
얼마 후 우문호가 죽음에 처해졌고 그의 아들들도 다 죽음에 처해졌다. 용은 역시 사형 당했으며 가산은 몰수되고 가족과 하인들이 다 감옥에 갇혔다.
사람들은 비로소 강련이 이 전에 한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호(瓠)는 우문호의 호(護)와 발음이 같으니 “박이 깨지니 아들이 괴롭다”는 말은 우문호가 피살되고 아들도 연루되어 죽음에 처해진다는 뜻이었다. 또 용은의 집안 식구 하인들 모두 감옥에 갇혔으니 귀천의 구분이 없는 것이 아닌가.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건덕(建德) 연간(572-578)에 강련은 늘 밤에 길가의 나무에 기어 올라가 석가모니부처를 부르며 크게 울었다. 어떨 때는 날이 밝을 때까지 이렇게 며칠간 여러 날 곡을 했는데 몹시 슬퍼했다.
574년 무제 우문옹(宇文邕)이 불교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자 순식간에 불경과 불상 등이 다 훼손되었다. 많은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 되었고 각종 불사(佛事) 활동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무제는 멸불과 동시에 도교도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안 되어 주 무제 우문옹은 악질에 걸려 전신이 썩어 죽었는데 36살이었다.
북주 정제(靜帝) 대상(大象) 말년(580) 강련은 또 밑이 없는 포대를 가져와서 장안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사람들이 다투어 쌀과 보리를 주었다. 하지만 강련이 포대를 열어 쌀, 보리를 쏟아 붓자 바닥이 새어 다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다른 뜻은 없고 사람들에게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것이 텅 빈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라고 했다.
581년 정제가 승상인 양견(楊堅)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북주는 멸망했다. 양견은 국호를 ‘수(隋)’ 라고 정하고 도읍을 대흥성(大興城 지금 섬서성 서안시)에 정했다. 이전의 장안성은 점점 정체되더니 나중에 폐기되었다. 이후 강련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북주 무제의 말로에 관해 《속고승전 위원숭전(衛元嵩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수나라 개황(開皇) 8년(588)에 경조윤 두기(杜祈)가 죽었다 사흘 후 깨어나 염라왕을 보았다고 하며 주무제도 보았다고 했다. 두기가 무제에게 왜 지옥에 있느냐고 물었다. 무제는 자기가 멸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제는 두기에게 이 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며 또한 대인인 위원숭에게 부탁해 복을 지어 빨리 자기를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밖에 《태평광기》에 따르면 수나라 개황 11년, 대부시(大府寺)의 시승(寺丞) 조문창(趙文昌)이 갑자기 죽었는데 가슴에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식구들은 감히 입관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살아났다. 그는 자기가 염라왕을 만나고 온 경과를 말해주었다. 그가 불경을 늘 외웠기에 인간세상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했다. 입구에서 주무제가 문 옆의 방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삼중 족쇄에 묶여 있었다.
무제가 문창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나라 사람이니 잠시 이리 좀 오게, 내 할 말이 있네.”
문창이 가서 보니 무제가 말했다.
“자네 나를 알아보겠는가?”
문창이 “저는 과거 폐하의 시위로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무제는 그에게 돌아가서 수나라 황제에게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의 많은 죄를 다 변명할 수 있는데 유독 멸불한 죄만은 너무 무거워 사면 받을 수 없으니 수 황제가 자신을 위해 작은 공덕을 지어주었으면 했다. 이런 착한 일을 통해 보호를 받고 지옥에서 빠져나왔으면 한다고 했다.
조문창은 부활한 후 자신이 본 일을 수문제에게 상주했다. 문제는 천하의 사람들에게 사람마다 돈을 내어 무제를 위해 《금강반야경》을 돌리고 또 3일간 큰 제사를 지냈다. 아울러 이 일을 기록하여 수나라 역사에 기록하도록 했다.
주무제의 경험은 사람들에게 멸불의 죄는 대단히 커서 사후에 받을 징벌이 매우 무겁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가 비록 참회하긴 했지만 이미 늦었고 단지 타인이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참고자료: 《주서(周書)》, 《태평광기》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725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