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목(木木)
【정견망】
석도안(釋道安)은 원래 위(衛)씨로 상산(常山) 부류(扶柳) 사람이다. 대대로 유학을 배우던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찍 부모를 여의어 외사촌형인 공(孔)씨가 길렀다. 일곱 살 때부터 책을 읽었는데 두 번만 보면 외울 수 있어 주변에서 모두들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 때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 본성이 총명하고 민첩했지만 외모가 아주 추해서 스승의 중시를 받지 못했고 주로 농사를 짓는 노역에 종사했다. 이렇게 3년이 되었지만 부지런하고 근면했고 한 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성격이 독실하고 정진했으며 재계(齋戒)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도안이 스승에게 경전을 청하자 사부는 《변의경(辯意經)》한 권을 주었다. 분량이 약 5천 글자였다. 도안이 일하는 곳에 경전을 가져가서는 쉬는 사이에 이것을 다 읽었다. 저녁에 돌아와서는 스승에게 책을 되돌려주며 이미 익숙하게 외웠으니 다른 경전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사부가 물었다.
“어제 준 경전도 아직 읽지 못했을 텐데, 지금 또 다른 경전을 찾는 것이냐?”
도안이 대답했다.
“이미 다 외웠습니다.”
사부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했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한 권을 주었는데 1만 자가 조금 못되는 양이었다. 도안이 이 책을 가져가더니 처음처럼 저녁에 돌아와 되돌려주었다. 사부가 그를 붙잡고 경전을 외우게 하니,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웠다. 이에 사부가 크게 놀라고 감탄하며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도안이 나중에 정식으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는 나서는 도처로 다니며 운유(雲遊)했다. 그가 업도(鄴都) 중사(中寺)에서 불도징(佛圖澄)을 만났다. 불도징이 그를 만난 후 감탄하며 하루 종일 함께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의 외모가 별로라서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러자 불도징이 말했다.
“이 사람의 식견이 깊으니 너희들이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에 불도징을 스승으로 모시고 섬겼다. 불도징이 강론하면 도안이 다시 강술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들 말했다.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가 곧 어려운 질문을 해서 저 곤륜자(崑崙子: 얼굴이 까맣고 몸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를 죽이자.”
이에 도안이 다시 강술하자 질의와 논란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안은 그 날카로운 칼날을 꺾고 시끄러운 문제를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시커먼 도인(漆道人)이 사방을 놀라게 하는구나.”
그 후 난을 피해 확택(濩澤)에 은거했다. 태양(太陽)의 축법제(竺法濟)와 병주(幷州)의 지담(支曇)이 《음지입경(陰持入經)》을 강의하자 도안도 나중에 이들을 따라 배웠다.
도안은 나중에 또 항산(恒山)에 절과 탑을 만들었다. 그러자 옷을 고쳐 입고 교화를 따르는 사람이 하북(河北) 일대를 반으로 나눌 정도였다.
당시 무읍(武邑) 태수 노흠(盧歆)이 도안이 맑고 빼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민견(敏見)을 시켜 간절히 설법을 청했다. 도안이 마침내 요청을 받아들여 강의를 열자 그 내용이 명실상부해 승려들은 물론이고 속인들도 기뻐하며 흠모했다.
45세가 되자 다시 기부(冀部 지금의 하북)로 돌아와 수도사(受都寺)에 머물렀는데 늘 수백 명의 대중을 교화했다.
이때 석호(石虎)가 죽고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이 후계자가 되었다. 석준이 축창포(竺昌蒲)를 사신으로 파견해 도안을 화림원(華林園)에 들어오도록 초청하면서 승방과 요사를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하지만 도안은 석씨들의 말세에 국운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알고 서쪽 견구산(牽口山)으로 갔다. 석호의 수양손자 염민(冉閔)이 난을 일으키자 민심이 어수선해졌다.
그러자 도안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지금 하늘이 내린 재앙으로 가뭄과 메뚜기 떼가 심하고 노략질하는 도적들이 횡행한다. 이럴 때는 모이면 설 수 없고 그렇다고 흩어져서도 안 된다.”
마침내 다시 대중들을 거느리고 왕옥산(王屋山)과 여상산(女牀山)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하를 건너 육혼산(陸渾山)으로 들어갔다. 나무열매를 먹으면서 수행을 계속했다.
나중에 또 모용준(慕容俊 5호16국 중 연나라 왕)이 육혼산 지역을 핍박하자 결국 남쪽 양양(襄陽)에 몸을 의탁하려 했다. 가던 도중 신야(新野)에 이르자 도안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은 흉년이라 나라 임금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불법의 일을 세우기 어렵다. 더욱이 교화의 바탕은 모름지기 널리 퍼뜨리는 데 있다.”
모두들 “법사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도안은 제자 혜원(慧遠) 등 4백여 명과 함께 강을 건넜다.
양양에 도달한 후 다시 불법을 선양하자 따르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이전부터 불경을 번역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예전 번역에 때로 오류가 있어 깊은 뜻이 감춰지거나 잘 통하지 않았다. 도안은 매번 이를 강설할 때마다 그 대략적인 뜻만 알고 넘길 뿐이었다. 도안은 열심히 경전을 읽고 연구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또 그가 주석한 경전에 《반야도행경》·《밀적경(密跡經)》·《안반경(安般經)》등이 있었다. 모두 원래 문장을 찾아 문구를 비교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다 수록하였다. 이어 의심나는 곳을 분석하고 훤하게 풀이하여, 전부 스물두 권의 책이 되었다.
그의 경전 주석은 서두에서 깊고 풍부한 내용을 이루며 미묘하게 깊은 종지를 다했다. 앞뒤로 조리가 일관되었고 문리가 회통했다. 이처럼 중국에서 불경의 내용이 분명해진 것은 도안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漢)부터 위(魏)진(晉)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진 것이 제법 많았지만 번역한 사람의 이름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추적하여 찾아보았으나 연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도안이 곧 목록을 만들어 책을 수집하고 그 시대와 사람의 이름을 표시했으며 품(品)의 새 것과 옛 것을 가려내었다. 이렇게 만든 책이 《경록중경(經錄衆經)》이다. 불경에 확실한 근거가 있게 된 것은 실로 그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이렇게 되자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그를 찾아와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동진(東晉)의 정서장군(征西將軍) 환랑자(桓朗子)가 강릉(江陵)에서 주둔하면서 도안을 잠시 머물게 했다. 주서(朱序)가 서쪽으로 가서 주둔하면서 다시 양양으로 초청해 서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
도안은 백마사(白馬寺)가 협소해지자, 다시 절을 세우고 단계사(檀溪寺)라 이름 지었다. 이곳은 원래 청하(淸河) 장은(張殷)의 저택이었다. 큰 부자들이 찬조해 5층탑과 4백 개의 승방을 세웠다.
또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홍충(楊弘忠)은 만 근의 구리를 보내 탑 정상에 얹는 바퀴인 승로반(承露盤)을 만들게 했다.
그러자 도안이 말했다.
“승로반은 이미 태공(汰公)께 맡겨 제작이 끝났습니다. 이 구리로 불상을 주조하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양홍충이 기뻐하며 공경히 승낙했다. 이에 대중들이 함께 재물을 추려내 희사해서 불상을 조성했다. 1장 6척의 불상으로 신령한 상호가 밝게 드러났다. 매일 저녁 빛을 발하여 전당(殿堂)이 환하게 빛났다.
도안은 이미 큰 서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녁에 죽어도 좋습니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을 파견해 외국에서 가져온 금박(金箔)을 입힌 일곱 자 크기의 불상과 금불좌상, 구슬로 꿰어 만든 미륵상(彌勒像), 금실로 수놓은 불상, 직물로 만든 불상을 각기 하나씩 보내왔다.
매번 강연이나 법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존상들을 나열하고, 당기(幢旗)와 번기(幡旗)를 배치하였다. 구슬과 노리개가 번갈아 가며 빛나고, 장식한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계단을 오르고 문턱을 밟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숙하게 경의를 다하게 하였다.
외국에서 건너온 구리로 만든 불상이 하나 있었는데 제작방법이 예스럽고 기이해 당시 대중들이 그다지 공경하거나 존중하지 않았다.
그러자 도안이 말했다.
“불상의 형상은 아름답지만 육계(肉髻)의 형태가 맞지 않습니다.”
곧 제자로 하여금 그 육계를 화로에 녹여 고치게 했다. 그러자 광염이 뻗쳐 나와 법당 안에 가득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육계 속에 한 사리가 보였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부끄러워 감복하였다.
도안이 말했다.
“기왕에 불상이 신령하고 기이하니 다시 번거롭게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곧 그 일을 중지하였다. 이에 알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도안은 사리가 있는 것을 알고서 일부러 꺼내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당시 양양에 습착치(習鑿齒)란 사람이 있었는데 천부적으로 타고난 날카로운 말솜씨로 당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그가 도안의 높은 명성을 듣고 전에 편지를 보내 호감을 표시했다.
“듣건대 진실에 응하여 바른 길을 밟아 밝고 환하게 명백하게 안으로 밝으신 분이며, 자비의 가르침을 거듭 비춰주시어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음덕을 입는다 합니다. 불법(佛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지 4백여 년입니다. 변방의 왕이나 거사들이 때로 받든 사람이 있고, 중국에 이보다 더 앞선 시대에 행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의 운행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라서, 세속에서는 아직 모두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도업(道業)의 융성함에는 모두가 짝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이른바 달빛이 나오려 할 때 신령한 발우(鉢盂)가 감응하여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법사의 임무는 유가의 홍범(洪範)에 해당하며, 그 교화는 그윽하고 깊은 곳을 적셔줍니다. 이곳의 모든 승려들에게는 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경운(慶雲)이 동쪽으로 흐르듯, 마니주(摩尼珠)의 빛남을 돌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7보의 자리에 오르시어, 잠시 명철한 등불을 밝히시고, 중생들에게 감로의 비를 내려주십시오. 양자강 기슭에 전단(旃檀)나무를 심으신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다시 드높아질 것이며, 현오한 물결이 일렁이고 넘쳐서 거듭 한 시대를 휩쓸 것입니다.”
나중에 도안이 이곳에 머문다는 말을 듣자 곧 도안을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해(四海)의 습착치입니다.”
그러자 도안이 대답했다.
“미천(彌天 하늘 가득) 석도안(釋道安)이요.”
[역주: 글재주가 뛰어난 습착치가 사해를 언급하며 자신이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자랑하며 도안을 떠보자 도안이 이 말을 받아서 자신은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으로 미천이라 한 것.]
당시 사람들은 훌륭한 대답이라고 여겼다.
그 후 습착치가 배 10개를 선물로 보냈는데 마침 식사 때라 도안이 손수 배를 쪼개어 나눠주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오차가 전혀 없었다.
습착치가 사안(謝安 동진의 재상)에게 도안에 관한 편지를 썼다.
“이곳에 와서 석도안을 만났는데 아주 뛰어나며 평범한 도사(道士 역주: 승려를 말함)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 수백 명이 재를 올리고 강의하는데 게으르지 않습니다. 또 변화의 기술로 일반인들의 귀와 눈을 미혹하는 일도 없고, 또 위세를 중시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일 없이도, 군소(群小) 문파들의 차이를 정돈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사제간에 엄숙하면서도 서로 존경하는데 크고도 가지런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제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이론은 간결하면서도 두루 섭렵한 것으로 내외(內外)의 뭇 서적들을 두루 보았습니다. 음양과 산수(算數)에도 모두 능통합니다. 불경의 오묘한 이치는 자유자재로 능란합니다. 논리의 펼침이 법란(法蘭)이나 법도(法道)와 비슷합니다. 다만 귀하와 같이 만나지 못하는 것이 한입니다. 그 역시 매번 만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도안은 번천(樊川)과 면천(沔川)에 머물던 15년간 매년 두 차례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했는데 단 한 번도 중단하거나 빠트린 적이 없었다.
동진의 효무제(孝武帝)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덕을 흠모해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조서(詔書)를 내렸다.
“도안 법사는 그릇과 식견이 널리 통하고 기품이 있으며 인격이 고상해 출가한 몸이면서도 세속의 사람들을 인도해 아름다운 성과가 모두 뚜렷하다. 어찌 현세만을 바로잡고 구제하겠는가? 진실로 내세까지 이끄실 분이다. 이에 왕공(王公)과 같은 녹봉을 지급하되 재물은 현지에서 조달하게 하라.”
한편 부견도 평소 도안의 명성을 듣고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양양에 석도안은 참으로 신령한 큰 그릇[神器]이다. 이 분을 모셔다 짐을 보좌하게 하리라.”
나중에 부비(符丕)를 시켜 남쪽으로 양양을 공략하게 했다. 이에 도안과 주서(朱序)가 모두 부견의 포로가 되었다.
부견이 복야(僕射) 권익(權翼)에게 말했다.
“짐이 십만의 군사로 양양 땅을 공략했지만 얻은 것은 오직 한 사람 반뿐이다.”
권익이 말했다.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부견이 대답했다.
“한 사람은 도안이고 반 사람은 습착치다.”
도안은 장안으로 불려와 오중사(五重寺)에 머물렀다. 승려만 수천에 달해 교화를 널리 펼쳤다.
전에 위진(魏晉)시기의 승려들은 스승의 성을 따라서 성을 지었기 때문에 승려마다 다 성이 달랐다. 이에 도안은 대사(大師)의 근본을 석가모니로 여겨 이를 따라 모든 승려들의 성을 석(釋)씨로 짓게 했다.
나중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얻으니 그곳에 “사방의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다시 강물의 이름은 없어진다. 네 개의 성씨가 사문이 되었지만, 모두가 석씨의 종족으로 일컫는다.”라고 했다. 즉 도안의 말이 경전의 말씀과도 부합한 것으로 이는 중국 승려들에게 영원한 모범이 되었다.
도안은 불경뿐만 아니라 많은 책을 두루 섭렵했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장안에서 의관을 갖춘 집안의 자제로서, 시(詩)나 부(賦)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의지해 명성을 이뤘다.
당시 남전현(藍田縣)에서 하나의 큰 정(鼎 솥)을 하나 얻었는데 용량이 곡식 27곡(斛 1곡은 열 말에 해당)을 담을 수 있었다. 가장자리에 전서(篆書)로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도안이 이를 보더니 “이것은 옛날 전서(篆書)로 노양공(魯襄公)이 주조한 것이다.”라고 하고는 곧 예서로 풀어주었다.
그의 박학다식함이 이와 같았다.
때문에 부견은 학사들에게 명령해 국내외 경전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도안을 스승으로 삼게 했다. 때문에 장안에 “배움에 도안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어려운 것을 맞추지 못한다.”라고 했다.
부견은 원래 석씨(石氏)의 난 시기에 인구가 늘어나고 사방을 거의 평정해, 동쪽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구자국(龜玆國)을 병합했다. 남쪽으로는 양양까지 차지했고 북쪽으로는 사막까지 다 점령했다. 이제 동진의 건업(建業)만 차지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으나 아직 항복받지 못했다.
때문에 부견은 매번 자신을 섬기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강남 지방을 평정해 진나라 황제를 복야(僕射)로 삼고 사안(謝安)을 시중(侍中)으로 삼고 싶구나.”
동생인 평양공(平陽公) 부융(符融)과 조정대신 석월(石越)·원소(原紹) 등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간언했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이들은 부견이 도안을 공경하는 것을 알기에 마침내 함께 도안에게 같이 주청하게 했다.
“주상께서 장차 동남에 일을 벌리려 하시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창생들을 위해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습니까?”
때마침 부견이 동쪽 뜰로 나가면서 도안을 가마에 태운 후 그에게 말했다.
“짐이 장차 공과 함께 남쪽 오월(吳越)에 가서 놀고자 합니다. 육사(六師 천자의 군대)를 정비해 순수(巡狩)하면서 회계에 이르러 동해를 바라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도안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천운에 따라 세상의 주인이 되셨고 9주 중 8주를 차지하셨습니다. 또 중토(中土)에 자리 잡고 사해를 다스리시니 마땅히 무위(無爲)로 돌아가 요순과 나란한 성왕이 되셔야 합니다. 지금 백만 대군으로 가장 척박한 토지를 얻으려 하시는데 동남 지역은 지대가 낮고 기운이 사납습니다. 예전에 순임금과 우임금도 그곳에 갔다 돌아오지 못하셨고, 진시황도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빈도가 보기에 어리석은 소견으로 폐하의 뜻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동생인 평양공과 중신 석월이 모두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오히려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니 빈도(貧道)의 짧은 소견도 윤허하지 않으시겠지만 이미 후한 예우를 받는 까닭에 충심을 다할 뿐입니다.”
이에 부견이 말했다.
“짐이 땅이 넓지 않다거나 다스릴 백성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천심(天心)을 가려내 대운(大運 천운)의 소재를 밝히고자 할 뿐입니다. 때에 따라 순수(巡狩)하는 것은 이전 전적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설마 부처님 말씀에 제왕(帝王)이 지방을 순시할 수 없다는 게 있습니까?”
이에 도안이 말했다.
“만약 천자께서 반드시 움직이려 하신다면, 먼저 낙양(洛陽)으로 행차해 위세를 높이고 날카로움을 비축하신 후 강남에 격문(檄文)을 전하시어 만약 불복하면, 그 때가서 토벌에 나서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부견은 이 말에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부융 등 정예군 25만 명을 전군(前軍)으로 삼고 부견이 직접 보병과 기병 60만 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한편 동진에서는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석(謝石)과 서주자사(徐州刺史) 사현(謝玄)을 파견해 이에 맞서게 했다.
부견의 전군(前軍)이 팔공산(八公山) 서쪽에서 대패하고 진나라 군사가 30여 리를 추격했는데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부융도 말이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부견이 혼자 말을 타고 도망치니, 도안이 간언한 것과 같았다.
한편, 도안은 늘 여러 불경에 주석을 달았는데 혹시라도 이치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렇게 맹세했다.
“만약 제가 말한 것이 불법(佛法)이치와 그다지 멀지 않다면, 부디 상서로운 모습이 나타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곧 꿈에 머리가 하얗고 눈썹이 긴 서역도인이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경전에 단 주석은 이치가 매우 합당합니다. 나는 열반에 들지 못하고 서역에 머물고 있으니 마땅히 서로 도와 불법이 널리 통하도록 도와야합니다. 때때로 식사를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중에 《십송률(十誦律)》이 도착하자 원공(遠公: 도안의 수제자 혜원慧遠을 지칭)이 스승이 꿈에 본 노인이 빈두로(賓頭盧 석가모니의 제자)존자임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마련하고 공양을 올리게 했는데 나중에 도처에서 법칙이 되었다.
도안은 이미 도덕에서 대중의 지도자가 되었고 학문은 삼장(三藏)을 겸했다. 이에 그가 제정한 승려(僧尼)들의 의궤와 규범이 불법(佛法)의 3가지 조목 헌장(憲章)이 되었다. 천하의 사찰에서 마침내 이것을 법칙으로 삼고 따랐다.
도안은 또 늘 제자 법우(法遇) 등과 미륵불 앞에서 서원을 세우고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했다.
그러다 진(秦) 건원(建元) 21년(364) 1월 27일 갑자기 기이한 승려가 나타났다. 형상은 실로 평범하고 누추했는데 절에 찾아와 기숙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승방은 이미 가득 차 잘 곳이 없으므로 강당에서 거처하게 했다.
당시 유나(維那)가 불전에서 숙직했는데 밤에 이 승려가 창문 틈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 급히 이 사실을 도안에게 아뢰었다. 도안이 놀라 일어나서 예를 갖추어 문안을 드렸다. 그가 찾아온 뜻을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서로를 위해서 왔노라.”
도안이 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죄가 깊습니다. 어떻게 해탈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참으로 제도할 만하구나. 그러나 잠시 성승(聖僧: 부처님)을 목욕시킨다면, 원하는 대로 반드시 결과가 있으리라.”
그리고는 자세히 목욕시키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에 도안은 다음 세상에 왕생할 곳을 물어보았다. 그는 서북쪽 허공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 구름이 열리면서 도솔천의 미묘하고 수승한 세계가 보였다. 이 날 저녁 대중 수십 명이 모두 이 광경을 보았다.
그 후 도안은 목욕도구를 마련하자 평범하지 않은 어린이가 수십 명의 친구들과 함께 나타났다. 절 안으로 들어와 놀다가 잠깐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과연 이것은 성스러운 응보라 할 수 있다.
그 해 2월 8일 도안이 갑자기 대중들에게 알렸다.
“나는 떠날 것이다.”
이 날 식사를 마친 후 아무런 병도 없이 세상을 마쳤다. 장안성 안쪽 오급사(五級寺)에서 장사지냈다.
동진 태원(太元) 10년(382)의 일이다. 향년 72세였다.
한편 도안이 살아 있을 때 서역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늘 함께 강론하고 분석하기를 염원했다. 이에 늘 부견에게 그를 모셔오길 청했다. 구마라집 역시 멀리서나마 도안의 풍모를 전해듣고는 그를 동방의 성인(聖人)으로 여기며 늘 그에게 예를 올렸다.
처음에 도안이 태어날 때, 왼쪽 팔뚝에 폭이 한 치 가량의 피부가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떼어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불렀다.
한편 구마라집은 도안이 세상을 떠난 16년 후 중국에 왔다. 도안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몹시 슬퍼했다.
도안은 일찍부터 경전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법을 펼치는 데 뜻을 두었다. 이에 그가 초빙한 외국 승려들로는 승가제바(僧伽提婆)·담마난제(曇摩難提)·승가발징(僧伽跋澄) 등이 있었고 이들이 수많은 경전을 번역해서 백만여 자에 달했다. 그는 늘 제자 법화(法和)와 더불어 소리와 글자를 가려내서 정하고, 글 뜻을 상세히 파헤쳐 많은 경전을 새로 만들고 오류를 바로잡았다.
손작은 《명덕사문론(名德沙門論)》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석도안은 넓고 다양한 재주가 있었고 두루 경전에 통하고 이치에 뛰어났다.”
참고자료: 《고승전》,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29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