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태무제는 덕을 닦아 상조에 성세를 가져다주었으나 최후에 사심(私心) 때문에 공업(功業)을 훼손시켰다.
상나라에서 왕위를 전하는 규칙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형종제급(兄終弟及)’을 위주로 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잇는 ‘부사자계(父死子繼)’를 보조로 했다. 상조의 개국군주 성탕은 큰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작은 아들인 외병(外丙)이 왕위를 이었고 외병은 동생인 중임(仲任)에게 왕위를 넘겼다. 하지만 중임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 큰형의 아들 이어받게 했다.
바로 상조의 네 번째 군왕 태갑이 성탕의 장손(長孫)이다. 태갑에게는 다른 형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아들이 자리를 이었다. 이후 몇 세대에 걸쳐 이로 인한 내부 혼란은 없었다.
하지만 태무는 형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후 관례에 따라 동생에게 전하지 않았다. 설사 동생이 없어도 형의 아들에게 전했어야 했다.
하지만 태무는 형에게 왕위를 이어받은 후 75년이 지난 후 형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자신의 아들인 중정(中丁)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중정은 제10대 상왕(商王)이다. 중정은 도읍을 박(亳)에서 황하 상류의 효(囂)로 옮겼는데 이것이 첫 번째 천도다.
박은 상조를 개국한 성탕과 중정의 부친이 있던 곳인데 이곳을 떠났다는 것은 뭔가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제11대 상왕은 중정의 동생 외임(外任)으로 도성은 여전히 효에 있었다. 상나라는 이때부터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제12대 상왕은 외임의 동생 하단갑(河亶甲)이다. 그는 또 효에서 상(相)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조는 더욱 쇠락했다. 이것이 두 번째 천도다.
하단갑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왕위를 형의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기 아들인 조을(祖乙)에게 물려주니 바로 상조 제13대왕이다.
조을은 즉위하자마자 또 급히 천도했는데 새로운 도읍의 이름이 경(耿)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이 도읍이 물에 잠기자 다시 수도를 옮겼다. 조을이 다시 천도했고 결국 비(庇)에 정착했다. 도읍을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일반인이라도 이렇게 하는데 흥취가 없을 것이다. 뭔가 이 방면에서 조을의 운세가 썩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천도였다.
다만 작으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조을에게는 훌륭한 대신이 있었으니 바로 무함(巫咸)의 후손 무현(武賢)이 중용되었다. 《사기・은본기》에는 특별히 “무현이 직책을 맡았다”고 언급했다. 조을이 19년간 재위하면서 후대 역사가들의 인정을 받았으니 무현 시기 “은나라가 부흥”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남은 사료가 거의 없어서 무현이 얼마나 어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을의 뒤를 이어 아들인 조신(祖辛)이 제14대 왕이 된다.
조신의 동생 옥갑(沃甲)이 제15대 왕이 되었다.
제16대 왕 조정(祖丁)은 옥갑의 동생이나 아들이 아니라 형인 조신의 아들이었다.
제17대 왕 남경(南庚)은 조정의 동생이나 아들이 아니라 옥갑의 아들이었다. 그가 한번 더 천도하니 이번에 옮긴 도성은 엄(奄)이었다. 이것이 4번째 천도에 해당한다.
제18대 왕 양갑(陽甲)은 남경의 아들이나 동생이 아니라 조정의 아들이었다.
제19대 왕 반경(盤庚)이 마지막이자 상조 도읍 중 가장 유명한 은(殷)으로 천도(다섯번째 천도)해 구대에 걸친 혼란을 끝맺었다.
한나라 때 장형은 《서경부(西京賦)》에서 “은나라 사람들이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는데 전에 8번 나중에 5번이나 옮겼습니다. 천도하여 상(相)에 살다가 수재로 도읍이 파괴되자 경(耿)으로 옮겼으니 그 땅을 항상 지킬 수 없었습니다.(殷人屢遷,前八後五,居相圯耿,不常厥土)”라고 했다. 사실 반경이 천도한 후에도 한두 차례 천도가 있었으니 탕왕이후 다섯 번 천도했다는 장형의 말은 사실 아주 겸손한 표현이다.
왕위를 빼앗기 위해 동생, 아들, 숙부, 사촌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왕위에 오르자 각국 제후들은 상조 왕실에 인의(仁義)가 전부 사라진 것을 보고는 앞 다퉈 조공을 거부했다. 은나라의 도(道)가 다시 한 번 쇠퇴해진 것이다.
《사기・은본기》에서는 이렇게 총괄했다.
“중정(中丁) 이래 적자를 폐지하고 뭇 형제들과 그 아들들이 번갈아 제위에 올랐다. 이 때문에 형제들과 그 아들들이 혹 서로 다투다가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는 일이 9대 동안 계속되어 어지러워지자 제후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부자승계에 비하면 형제승계가 사실 더욱 합리적이다. 먼저 동생에게 물려주고 아들이 성장한 후에 다시 전해 받으면 태갑처럼 어린 군주기 집권하는 문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조 후기로 갈수록 점차 부자승계가 굳어진다. 상조 사람들은 마땅히 ‘9대 혼란’의 교훈을 총결했어야 한다.
태무제가 덕을 닦아 만든 태평성세는 결국 최후에 작은 차이로 인해 후대가 서로 다투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군왕의 도덕수준이 직접적으로 사회상태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정말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천명(天命)에 순응해 세상에 나온 성현(聖賢)은 왜 늘 종종 간난신고의 시달림을 겪은 후라야만 비로소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되는가? 왜냐하면 반드시 시험을 거치고 관(關)을 넘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왜 신분이 높을수록 수신양덕(修身養德)에 더욱 주의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늘은 태무제의 공과 과실을 통해 이치를 설명해준다.
또 단지 당시 제후들만 조회하러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경을 중시하던 태무의 후손들조차 그에 대한 제사를 거의 올리지 않았다. 출토된 갑골문 중에 태무제를 제사지낸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덕을 닦음은 이윤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순일(純一)’해야 한다.
참고문헌
1. 《관림당집(觀林堂集)‧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
2. 《서서전(書敘傳)》
3. 《사기》
4. 《죽서기년》
5. 《상대종교제사(商代宗教祭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8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