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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혜약(慧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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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

혜약(慧約)의 자(字)는 덕소(德素)이고, 속성은 누씨(婁氏)이며, 동양현(東陽縣) 오장(烏場)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온 동남 지방의 으뜸가는 집안이었다.

어떤 점복(占卜)인이 집안의 묘를 보더니 “후세에 반드시 고행을 통해 득도한 사람이 나타나 제왕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어머니 유씨(劉氏)가 꿈에 키가 큰 사람이 금상(金像)을 받쳐 들고 와서 삼키게 했다. 또 꿈에 자금(紫金)색의 빛이 몸을 감싸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태기가 있게 되자 문득 정신이 상쾌해지고 이치를 생각하면 밝게 깨달았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는 광명과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몸은 눈처럼 하얀 빛을 띠었다. 이에 부친이 아이 이름 영찬(靈粲)이라고 지었다.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놀이를 하면 오직 모래를 모아 불탑을 만들고 돌을 쌓아 고좌(高座)를 만들었다.

7세 때 학문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하여 곧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읽었고 사서에 이르기까지 책을 펴기만 하면 바로 뜻을 알았다.

그의 집 남쪽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이웃집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가며 과일을 따서 항상 근심거리가 되었다. 혜약은 자기가 딴 과일을 다른 아이들에게 주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 고을은 양잠(養蠶)을 가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혜약은 항상 누에고치 삶는 것을 보며 슬퍼하고 측은해 하였다. 때문에 그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그의 숙부가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여러 차례 권고해도 끝내 고치지 않았다. 그러자 혜약이 항상 “날짐승이나 산짐승들은 사람들과 거리가 매우 멀지만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그 마음이야 어찌 다르겠는가?”라면서 마침내 냄새나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숙부는 여전히 제멋대로 사냥을 즐겼다. 어느 날 꿈에 붉은 옷을 입은 저승 사자가 손에 창을 들고 와서는 “너는 하루 종일 살생만 하고 또 보살이 교화해도 중지하지 않으니, 오늘 너를 잡으러 왔다”고 했다. 숙부가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온몸에 땀이 흘렀다. 그리하여 새벽이 되자 그는 모든 사냥도구를 허물고 깊이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사는 곳은 외딴 촌이라 절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생에 익힌 업으로 하여 은밀한 감응이 있어 늘 속세를 떠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홀연히 한 스님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가 손을 들어 동쪽을 가리키면서 “섬현(剡縣)에는 불교가 매우 성하다”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비로소 신인(神人)임을 깨닫게 되었다.

12세 때 처음으로 섬현에 가서 두루 탑묘(塔廟)를 찾아가 절을 하고 산천을 구경하자, 평소 품었던 마음과 크게 일치했고 많은 경전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동쪽 지방 민요에 “누거사(혜악을 말함)가 어려서 미묘한 이치에 통달했다”란 소문이 돌았다.

결국 혜악은 유송(劉宋) 태시(泰始) 4년(468) 상우(上虞) 동산사(東山寺)에서 출가해 머리를 깎았다. 이때 나이는 17세였다. 남림사(南林寺)에서 혜정(慧靜)을 스승으로 모셨다. 혜정은 송나라에서 명망이 으뜸이었으며, 계율과 도덕을 총지(摠持)하여 특진관(特進官) 안연년(顔延年), 사공(司空) 하상(何尙) 등이 존중하던 인물이었다.

혜약은 또 혜정을 따라 섬현 범거사(梵居寺)에 머물며 부지런히 수련했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자 혜정 스님이 입적하였는데, 심상(心喪)의 예를 다했고 상기가 끝난 후에도 이곳에 남았고 이후 곡식을 먹지 않았다. 솔잎과 나무뿌리와 줄기를 먹으며 바위굴에서 살았다.

제나라 경릉왕(竟陵王)이 혜약의 풍모와 덕망을 듣고 그를 초청하며 옷깃을 여미고 허리를 굽혀 공경하게 대했다. 그러자 지수(智秀)・담섬(曇纖)・혜차(慧次) 등 혜약보다 연륜이나 명성이 더 많던 승려들이 싫은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왕이 했다.

“이 상인(上人 승려에 대한 존칭)은 장차 불문의 영수가 될 분인데 어찌 지금의 처지로 그를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젊은 시절부터 법랍이 높은 스님들의 존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제나라 태재(太宰) 저연(褚淵)은 황제의 측근으로 불법을 널리 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 번은 그가 병에 걸려 낮에 잠을 자는데, 꿈에 호승(胡僧)이 나타나 말했다.

“보살께서 곧 오실 것이다. 찾아오는 도인이 있으면 그 분이 바로 보살님이다.”

잠시 후 혜약이 그곳에 찾아왔고 저연의 병이 곧바로 완쾌되었다. 이에 그는 혜약에게 5계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제나라 급사중(給事中) 누유유(婁幼瑜)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뛰어났다. 족보상으로 보자면 혜약의 할아버지뻘 된다. 하지만 그는 혜약을 만날 때마다 곧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곤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이 분은 자네 집안에서 손아래 항렬에 해당되는데 왜 그렇게 공경하게 합니까?”

누유유가 말했다.

“보살님이 세상에 나오시면 곧 천하의 스승이신데 어찌 이 늙은이만이 공경한단 말인가?”

융창(隆昌) 연간(494)에 소부(少傅) 심약이 지방관으로 발령나자 혜약과 함께 임지로 갔다. 그 고을에 있을 때는 오직 고요한 데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좌선과 경전을 외우는 것을 즐겼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안으로 들어오고 맹수들은 길들여져 섬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항상 금화산(金華山)에 들어가 도라지를 캐거나 적송(赤松) 사이에서 발길을 멈추고 머물며 노닐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전생의 불(宿火)을 만나 그것이 잠깐 사이에 신비한 빛을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정덕정(丁德靜)이란 도사가 도관(道館)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산에 있는 요정(妖精)이 폐단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장산령(長山令) 서백초(徐伯超)가 혜약 스님을 초청해 요정을 물리치려 했다. 혜약이 그곳에 가니 열흘도 되지 않아 신매(神魅)의 발작이 없어졌다.

그 후 낮에 누워 있는데 푸른 옷을 입은 두 여자가 개울물에서 나와 절을 하며 참회의 말을 했다. “전생의 업장이 깊고 커서 이곳에 떨어져 물의 요정이 되어 밤낮으로 번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율을 줄 것을 요청했고 이때부터 괴상한 재앙이 영원히 없어졌다.

천감 11년 심약이 단양윤(丹陽尹)으로 부임하면서 스님과 헤어지길 아쉬워하며 탄식하지 스님이 말했다.

“시주의 복보(福報)는 다했지만 빈도는 아직 멸도(滅度)에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 심약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예언이 맞아떨어짐이 모두 이와 비슷했다.

양무제(梁武帝) 천감(天監) 18년(기해년) 4월 8일, 황제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원할 마음이 생겨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이때 해와 달은 특별히 빛났고 하늘과 땅은 유별나게 밝았다. 온 나라에 대사면령을 내리니 온 나라가 함께 경축하였다.

이때부터 혜약이 궁중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면 특별히 옻칠한 걸상을 주었고, 황제가 먼저 절을 올린 후 자리에 나아갔다. 황태자 이하 왕비ㆍ도인ㆍ속인ㆍ선비ㆍ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제도를 받고 해탈하여 제자가 되기를 원하니 장부에 올라간 사람만 4만 8천 명에 달했다.

한 번은 혜약이 계율을 설명할 때, 공작새 두 마리가 날아왔는데 쫓아도 물러가지 않았다. 황제의 명으로 자리에 올라오게 하니 천천히 걸어와서 단(壇)에 이르러 머리를 숙이고 법문을 들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이 새는 열반(涅槃)에 들어 다른 과보를 받으려고 하는 게 분명하니 지극한 정성을 가엾게 여겨 이 새를 위해 다시 설법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후 며칠 지나서 두 마리의 새가 까닭 없이 함께 죽었다.

또 처음 계를 내려주던 날 밤의 꿈에 초당사(草堂寺)에서부터 누대의 문에까지 면담요가 길게 깔렸는데, 좌선하는 의자는 땅에서 몇십 자 높이에 놓여 있었고, 하늘세상 사람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대중을 위하여 설법했다.

이런 일들을 상고해 보자면 이는 황제(黃帝)가 꿈에 화서국(華胥國)에 간 일이나 또는 목련(目連) 존자가 신통력으로 도솔천(兜率天)에 오른 일과 같다. 이런 지극한 공덕을 지닌 사람의 행동거지를 누가 논의할 수 있겠는가?

그 후 혜약이 한적한 방에 고요히 거처할 때, 문득 한 늙은 여인이 몇 권의 책을 가져 와서 경을 책상 위에 놓고는 말없이 나갔다. 동시에 기이한 나무를 가져다 자신이 스스로 뜰에 심고 말하기를 “청정수(靑庭樹)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혜약이 말했다.

“이 책이 좋은 책이라면 내가 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고, 만약 나쁜 책이라면 역시 보느라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

7일이 지난 후에 또 한 노인이 책을 달라고 하더니 물러갔다.

또한 그 나무는 잎은 녹색이고 꽃은 분홍색이며 정성들여 가꾸어서 아직도 남아 있는데, 감응으로 몸은 붉고 꼬리는 길며 모양이 비취와 같은 기이한 새가 나타나 따라다니며 서식하였고 나무 사이를 들락날락하였다.

중대통(中大通) 4년(532)에는 꿈에 전에 살던 집이 나타났는데, 집의 벽은 희고 대문은 붉고 찬란히 빛나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이에 발원하여 절을 지었는데 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절 이름을 본생사(本生寺)라고 하였다.

양무제 대동(大同) 원년(535) 황제의 명으로 그가 살던 죽산리(竹山里)를 지자리(智者里)로 고쳤다. 옛 땅에 분홍빛구름이 감돌고 도첩(圖諜)에 꽃다운 이름이 전해지니 산천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감응이 자주 중국 땅에 나타나 복된 땅인 신선의 고을이 이에 건립된 것이다. 그런데 혜약은 솔잎과 창출 뿌리만 먹고 30여 년을 살았으며, 무명과 쑥대로 옷을 지어 입고 70년을 지냈다. 겸양으로 이름 높고 확고한 지조로 당시에 명망을 독차지하였다.

대동 원년 8월에 그는 사람을 시켜 문밖의 나뭇가지를 자르게 하면서 말하기를 “타고 갈 가마가 곧 올 것이니 갈 길을 방해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 말뜻을 아직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9월 6일이 되자 그가 병에 걸렸다.

그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처럼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쪽 겨드랑이를 자리에 대고 모로 누웠는데, 정신과 의식은 편안하고 기쁜 듯하였고, 조금도 아프고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사부대중이 깃발과 꽃을 들고 공중에 줄지어 서서 나를 맞아 가지고 구름을 타고 갔다. 나의 복보(福報)는 아마도 끝난 것 같구나.”

16일 황제가 사인(舍人) 서엄(徐儼)을 보내 병문안을 하자 혜약이 “오늘 밤에 아마 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날 밤 5경(更)에 닭이 두 번째 회를 치자,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차고 좌우의 사람들은 숙연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무릇 태어났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자연의 불변하는 이치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도를 닦고 염원하여 지혜를 얻어야 하며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말을 마치고는 합장하고 곧 열반에 들었다. 향년 84세로 법랍은 63세였다.

양무제는 영결에 임하여 비통해 하였고, 관료들과 재상들은 21일간 일을 그만두었다. 같은 달 29일 독룡산(獨龍山) 보지(寶誌) 스님의 묘 왼쪽에 장례지냈다.

처음 혜약이 병으로 누웠는데, 한 노인이 석장(錫杖)을 짚고 찾아와 방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생을 마치던 날 모든 스님들이 함께 절의 동쪽 바위아래에 묘 자리를 잡았는데, 황제가 곧 독룡산으로 묘지를 바꾸었으니 그 전에 나타났던 노인은 바로 지공(誌公:寶誌) 스님이 마중 온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운명하던 날 밤에 타고 다니던 푸른 빛깔의 소가 홀연히 크게 울면서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장사지내던 날 칙사(勅使)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절을 떠나 산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또한 처음 탑을 세울 때 한 쌍의 백학이 묘지 주위를 맴돌며 울었는데 그 소리가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장사지낸 뒤 사흘 후에 갑자기 죽어버렸다.

황제는 명을 내려 묘의 왼쪽에 비를 세우게 하였고, 왕균(王筠)이 비문을 짓게 하였다.

자료출처: 《신승전》 《속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