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목목(木木)
【정견망】
도선(道仙)은 일명 승선(僧仙)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강거국(康居國) 사람이다. 그는 행상을 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오(吳)나 촉(蜀) 사이를 왕래하면서 강과 바다를 오르고 내리며 진주와 보배를 쌓아 모았다. 때문에 그가 모은 재산은 두 척의 배에 가득하였다.
당시 계산이 밝은 사람들은 ‘돈이 수십만 관(貫)이나 된다’고 말하였다. 이미 옥과 보석이 차고 넘치게 되자 탐욕심이 더욱 심해져 재산을 더 늘리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면서 바다를 삼킬 만큼 재산을 모아 이름을 떨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사 길을 떠나 재주(梓州) 신성군(新城郡)의 우두산(牛頭山)에 이르러 승달(僧逹)이라는 선사를 만났는데, 그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생사의 윤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며, 애착을 가진 것과 떨어지지 않은 일이 없다. 자기의 몸조차도 죽으면 떨어지게 되거늘 하물며 재물인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도선은 이 설법을 듣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기쁨과 용기가 늘어나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탐욕이 많다보니 마음속으로 재산을 모을 궁리만 하였다. 조금 전에 정법을 들어보니 그 말이 궁극의 진리이다. 잃어버리든 헤어지든 결국은 반드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니, 보배들을 강에다 버리고 출가하여,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듯 복잡한 마음의 미혹을 싹 없애버리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 척의 배를 깊은 강물 속에다 침몰시키고 다시 한 척을 침몰시키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리면서 복(福)을 받을 착한 행위를 닦게 하려고 하였으나 도선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시끄럽고 어지러운 일만 생겨 자타(自他)가 고생스럽게 될 뿐이다.”
그리고는 나머지 배 한 척마저 침몰시켰으며 처자와도 이별하였다.
그는 승달 선사의 방에 괴어 있는 물이 깊고 넓은 것을 보고는 그가 입수삼매(入水三昧)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신심이 더욱 두터워졌다.
그리하여 관구산(灌口山)의 죽림사(竹林寺)에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처음 머리를 깎는 날에 대중들 앞에서 “도를 성취하지 못하면 영원히 산을 나가지 않겠다(不得道者不出此山)”고 서원한 뒤에, 곧 사람들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는 절벽에 암자를 지으니 선학(禪學)을 하는 승려들이 연이어 모여들었다.
그는 경전을 읽을 때 처음 책을 펼치면 적힌 “부처님께서 아무 곳에 계실 때[佛在其處]”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항상 목이 메여 흐느끼지 않을 때가 없었으며, “나는 왜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부처님이 남긴 글만 보는가?”라며 한탄했다.
도선은 그 뛰어남이 견줄 자가 없었기에 새나 짐승들마저도 그에게 찾아와서 깃들었으며, 혹 찾아와 학문의 방향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대답해주었는데, 상대방의 근기(根機)에 맞게 펼친 방편들이 모두 정법과 부합하였다.
처음 선정(禪定)에 들 때부터 일단 한 번 앉으면 4~5일 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에만 조용히 깨어나 일어서서 맞아들여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만약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조용한 방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으니, 고요하고 청정하기가 허공과 같았다.
때로는 “내일 손님이 올 것이다”라고 미리 알려주기도 하는데, 그 손님의 수가 백 명 또는 천 명이라고 하는 때도 있었는데, 모두 그의 말과 같아 한 번도 인원수가 남거나 모자란 적이 없었다.
양(梁)나라 때 시흥왕(始興王) 소담(蕭澹)이 그를 찾아와 스승의 예로 공경하며 함께 손을 잡고 섬서(陝西) 산골까지 갔다. 당시 그곳에는 도관(道館)이 번성해서 두건을 쓰고 도복을 입은 사람들로 분비고 성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서로 꾸짖고 배척하며 몹시 꺼리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도선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태연스레 지냈다.
어느 날 저녁 한 도사가 동쪽언덕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들에 난 불이 도선을 해칠까 걱정되어 각기 물그릇을 들고 가서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는 속에서 도선은 태연히 앉아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화광삼매(火光三昧)의 신비한 공덕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도사(道士) 이학조(李學祖) 등이 토지를 희사하여 불상을 만들고 사탑이 홀연히 이루어지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게 되어 열 집에 아홉 집은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의 자사(刺史)인 파양왕(鄱陽王) 소회(蕭恢)도 몸소 예배하고 불법을 받아 지녔다.
천감(天監) 말기에는 시흥왕에게 남모르는 감응이 일어나 양태사(梁泰寺)에 사천왕(四天王) 상(像)을 조성하고 육재일(六齋日)마다 항상 청정한 공양을 마련하였다. 그후 도선이 그곳의 법회에 참여하니 사천왕의 정수리에서 오색의 광명이 빛을 발하였고, 도선이 들고 있던 향로에서는 저절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태위(太尉) 육법화(陸法和)가 전에 미천한 신분일 때 몇 해를 산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도선을 섬기며 그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자 승려들 가운데 그를 업신여겨 함부로 욕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도선은 “이 사람은 삼정승이 될 귀공자이거늘 무엇 때문에 욕보이는가?”라고 말렸다. 그때에는 그가 훗날 귀하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였으니, 과연 육법화는 후에 곤복(袞服:임금이 입는 곤룡포)을 입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도선이 혹 피로에 의해 병이 생기면 옥색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청계산의 물을 길어다 작은 그릇을 꺼내어 신묘한 약을 담아 가지고 꿇어앉아 도선에게 올렸다. 그러면 도선은 그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병이 낫곤 하였다.
도선은 산에 있은 지 28년 만에 다시 정락(井絡) 지방으로 유행하니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당시 극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기우(祈雨)를 요청하자, 도선은 곧 용(龍)이 있는 굴에 가서 지팡이로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중생들은 근심하고 괴로워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잠만 자는가”라고 꾸짖었다. 이 말이 끝나자 그 즉시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큰 비를 퍼부었다. 이에 백성들은 크나큰 혜택을 입게 되자 모두가 그에게 와서 제사를 지내며 하늘의 신처럼 흠모하였다. 또한 사리(舍利)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기도를 드리며 청하였는데 생각하는 것에 따라 필요한 양만큼 나타났다.
수나라 때 촉왕(蜀王) 양수(楊秀)는 민락(岷絡:蜀山)에 진영(鎭營)을 세웠는데, 도선에 관한 소문이 왕의 귀에 들어갔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그는 지시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왕은 격노해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에 가서 도선을 사로잡고자 하였으며, 기어이 고집을 피우고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칼을 써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선은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승가리(僧伽梨)를 찾아 입고는 단정히 앉아 염불만을 하였다.
왕이 산자락에 이르자 갑자기 구름이 일어 비와 우박과 눈이 뒤섞여 산이 무너질 듯이 쏟아져 내렸으며 시냇물은 불어나 용솟음치는 통에 군사들을 정돈하고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일의 형세가 더없이 난처하고 급박해지자 마침내 멀리서 귀의하여 참회하고 예배드리니, 이로 인하여 다시 하늘이 밝아지고 비는 개였으며 산길은 깨끗하고 평평해져서 도선이 있는 곳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왕이 직접 극진하게 공경을 표시하니 왕을 위하여 설법을 해주었다. 왕은 신심이 거듭 일어나게 되어 마침내 그를 모시고 성도(成都)의 정중사(靜衆寺)로 돌아와서 후하게 예의를 지켜 대우하며 숭상하고 떠받들었다. 그리하여 온 성안의 사람들이 공경하면서 그를 ‘선사리(仙闍梨)’라고 불렀다.
그 후 수 문제 개황(開皇) 연간에 산사(山寺)로 돌아가는데 길이 저절로 깨끗해지고 산신이 앞에서 길을 쓸었다. 또한 어느 날 밤에 객승들이 승방에서 유숙하였는데, 도선이 가서 그들을 끌어내니 방이 곧 허물어졌다.
그는 백여 세가 되어 단정히 앉아서 생을 마쳤으며 그 산에 장례를 지냈다. 익주(益州)에는 아직도 목경백첩(木景白疊)이 남아 있으며, 이것이 성인(聖人) 선사리가 있던 곳이라고들 말한다.
자료출처: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