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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법민(法敏)

글/ 목목(木木)

【정견망】

법민(法敏)은 원래 성이 손씨(孫氏)로 단양(丹陽 지금의 강소성 진강) 사람이다. 그는 8세 때 출가하여 영(英) 선사를 사부로 삼았다. 나중에 다시 모산사(茅山寺)에 들어가 명(明) 법사에게서 삼론(三論)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원래 흥황사의 승랑(僧朗) 법사가 죽기 전에 제자들을 다 불러 뒷일을 걱정하여 천거할 대상을 말하게 했다. 문인들이 천거한 사람은 모두 제자들 속에서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에 승랑 법사에게 직접 지목하게 하자 곧 명 법사를 지명했다.

당시 그의 제자들은 거의 1천여 명이나 되었고 ‘명(明)’이란 이름을 가진 승려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모두들 “명 법사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승랑이 말했다. “내가 앉은 동쪽 기둥 밑에 앉아 있는 분이 명 승려다”라고 했다.

그때 명은 그 자리에 8년 동안 앉아 있으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몸으로는 함부로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때문에 대중들은 그를 치명(癡明 바보 명)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렇게 후계자로 지목하니 의혹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마음속으로 “승랑 법사가 제 정신이 아니다”고 생각했다.

이때 승랑이 말했다.

“내가 명을 천거하자 여러분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가르침에는 사심(私心)이 없어야 하고 잘못을 숨기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시켜 그를 법좌에 앉히고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들으시오. 지금 질문한 논 가운데 있는 열 가지 조목의 깊은 뜻은 아직 내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명 법사는 이미 해득하였으니 하나하나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좋겠소.”

명 법사가 그것을 설명하자 대중이 모두 굴복했고 전에 그를 바보라고 경멸한 일을 부끄럽게 여기며 사과했다. 명 법사는 그날로 승랑과 헤어져 제자들을 거느리고 모산사(茅山寺)에 들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삼론을 널리 퍼뜨렸다.

법민은 바로 명 법사가 있는 모산사에서 정밀한 이치를 얻었고 이곳에서 나와 동안사(東安寺)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말은 같아도 내용은 달랐으니 다시 부별(部別)로 내용을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23세 때 다시 고려(高麗)의 실(實) 법사에게서 대승경과 논에 대한 강의를 듣고 몸소 스승의 자리에 앉아 3년 동안 수레를 멈추어 놓았다. 실 법사가 죽자 고려의 인(印) 법사가 촉(蜀) 지방에 올라가 강론하였으나 법석에는 청강생들이 없었다.

진(陳)나라가 망하자 법민은 곧 속세로 돌아와서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다가 다시 승려의 옷을 입고 난을 피하여 월(越: 지금의 복건성) 지방으로 들어갔다. 여요(餘姚)의 양안사(梁安寺)에 머무르면서 열 명의 사미를 데리고 『법화경』과 3론에 대한 강의를 끊지 않고 계속하였다.

그는 정관 원년에 그곳에서 나와 단양(丹陽)으로 돌아와서 2년 동안 『열반경』과 『화엄경』을 강의했다. 그 후 월주(越州)의 전도독(田都督)이 쫓아오자 다시 일음사(一音寺)로 돌아가 법륜을 이어갔다. 이때 대중이 모여왔는데 의학(義學)을 하는 사문들만도 70여 개 고을에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월주 경내에서만도 1천2백 명의 비구와 3백 명의 비구니가 모여들었고 선비와 속인들이 모여든 것은 더 기록할 수 없었다. 당시 이것을 법의 경사이며 아름다운 모임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태종 정관 19년 회계(會稽)의 선비와 속인들이 그를 청해 정림사(靜林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6월 말에 한창 강의를 하고 있는데, 길이가 7자쯤 되는 뱀이 상반신을 드러내고 법민의 머리 위에서 황금빛을 띠고 다섯 가지 색깔의 빛을 뿜다가 강의가 끝나자 숨어버렸다.

그후 하안거를 마치고 일음사(一音寺)에 돌아오니 붉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밤에 나타나 법민에게 절을 하고 말하였다.

“법사가 4부의 대경(大經)을 강의한 공덕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제는 다른 지방에 가서 교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동쪽 지방에서 법사를 마중하러 왔습니다.”

이때 수십 명의 제자들이 함께 이 모습을 보았다. 그 후 8월 17일까지 그전 사흘 동안 까닭 없이 밤낮으로 캄캄해졌다가 8월 23일 법사가 곧 생을 마치려고 하자 홀연히 큰 광명을 비치며 밤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대지가 진동하였다.

그리고 나서 생을 마쳤는데 향년 67세였다. 그는 키가 7척 6촌이었는데, 7일간 장례를 지내는 동안 기이한 향기가 없어지지 않고 머물러 있어 모두가 이상하게 여기면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승려와 속인들이 그의 시신을 융안산(隆安山)에 안장했다.

자료출처: 《신승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3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