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소둔촌(小屯村)은 상대(商代) 제왕들이 묻힌 은허(殷墟)의 중심으로 상조 궁전과 종묘는 모두 이곳에 있다. 1975년 중국 ‘농업학대채’(農業學大寨 역주: 대채는 다자이로 모범을 정하고 그것을 따라 배우는 중공식 모범촌이다) 시대에 이곳 토지를 개간하려 했다.
당시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농경지로 개간하려는 마을 서북쪽 산등성이를 조사했다. 결국 은허에서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상대(商代)의 큰 묘를 찾아냈다.
이 묘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장방형의 수직갱으로 남북으로 5.6미터, 동서로 4미터에 깊이는 7.5미터 정도다. 그런데 출토된 물품은 오히려 아주 풍부해서 1928건에 달한다. 수직갱은 6층 건물 높이에 해당하며 층마다 부장품이 나왔다. 동기(銅器)가 468개, 옥기(玉器) 775개, 석기(石器)가 63개, 골기(骨器)가 564개, 도기(陶器) 11개, 방기(蚌器 조개껍질로 만든 그릇)가 15개, 상아로 만든 그릇이 5개, 쇠고둥 2개, 아랍 조개 1건 외에 6820개의 조개껍질(화폐)이 출토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묘에서 이렇게 많은 부장품이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3천년 이상 지하에 묻혀 있던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출토된 청동기 중 지위를 상징하는 대방정(大方鼎 큰 사각형 솥)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크기가 유명한 사모대방정(司母大方鼎) 바로 다음이다. 이것은 이 묘의 주인이 왕족임을 설명한다. 예기(禮器)와 주구(酒具)도 여러 세트가 나온 것은 묘주인이 또 제사를 주관한 왕족임을 의미한다. 4개의 청동도끼와 대량의 무기는 묘 주인이 또 장군임을 설명한다. 또 대량의 조개화폐가 나온 것으로 보아 묘 주인이 재산이 많은 부자임을 설명하고 유독 장식용품이 많이 나온 것을 보면 묘 주인이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이 문물들을 세척한 후에 청동기와 옥기에 모두 동일한 표지, 즉 부호(婦好)라고 적혀 있었다.
‘부호’는 무정왕의 갑골문 속에 여러 번 언급된 인물로 바로 무정의 왕비이자 국가의 중신(重臣)이었다. 그녀는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무정이 나중에도 거듭해서 여러 조상들에게 부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부부간의 금슬이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무정에게는 많은 아내가 있었지만 이중 제사를 주관한 배우자는 3명이 있었다. 바로 비신(妣辛), 비무(妣戊), 비계(妣癸)가 그들인데 부호는 바로 적처(嫡妻) 중의 제1위인 비신이다. 자(子)라는 이름의 방국(方國)에서 온 여자를 뜻하는 ‘女+子=好’가 되며 사후 묘호가 신(辛)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그녀를 ‘모신(母辛)’이라 불렀고 무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호(婦好)’라 불렀다.
여장군 부호
무정 중흥 시기에 상조(商朝)는 일련의 전쟁을 치르면서 상조의 판도 확장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다. 부호는 바로 무정을 위해 활약했던 대장 중 한명이었다. 무정시기 가장 큰 전쟁은 바로 여장군 부호가 치른 것으로 갑골문에도 부호의 출정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나온다.
“부호에게 지성(沚盛 장군의 이름)을 이끌고 파방(巴方)을 정벌하게 했다.”
“왕이 군대를 소집해 부호에게 토방(土方)을 정벌하게 했다.”
여기서 토방은 당시 상왕에게 상당히 골칫거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호가 치른 가장 큰 전투가 바로 이 나라를 토벌한 것이다. 당시 부호는 3천명의 사병을 징집하고 여정(旅征)이 1만명의 사병을 모집해 정벌을 명령했다.
부호는 또 무정 및 대장 지알(沚戛)과 함께 파방국(巴方國)을 토벌한 적도 있다. 이들은 점을 쳐서 신에게 작전전략에 대해 문의했다.
“신미일에 정인인 정(貞)이 점을 쳤다. 부호가 지알을 지원해 파방을 정벌하는데 왕이 동쪽에서 깊이 진격하면 적이 부호의 매복에 빠지겠습니까?”
부호의 묘에서는 청동도끼 4개가 출토되었고 그중 두 개는 크기가 아주 크다. 하나는 8.5킬로그램이고 하나는 9킬로그램으로 모두 부호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위풍을 전한다. 이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권력을 상징한다.
상조를 창립한 성탕(成湯)이 일찍이 천명을 받고 하나라 걸왕을 토벌할 때도 손에 큰 도끼를 들고 출정했었다. “탕이 스스로 도끼를 들고 곤오(昆吾)를 토벌했고 마침내 걸을 정벌했다.” 또 나중에 상조가 주나라로 넘어갈 때 주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도 “왼손에 노란 도끼를 들고 오른 손에 백모(白旄)를 들고 지휘했다”는 기록이 있다.
큰 도끼의 날을 아래로 하면 갑골문의 왕(王)이 된다. 도끼는 함부로 소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군왕이 수여해야만 받을 있었다. 《설문해자》에서는 “월(戉)이란 큰 도끼를 말하며 일명 천월(天戉)이라 한다.”고 했다.
또 《주례・대사마(大司馬)》에 “월(戉)은 장수의 위엄을 나타낸다”고 했다.
그러므로 부호가 월을 지녔다는 것은 병권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며 아울러 크고 작은 4개의 월을 지닌 것을 보면 위풍당당한 여자 장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사제 부호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원래 《좌전(左傳)》에 나오는 말이다. 만물에는 영(靈)이 있고 신(神)은 인류보다 높고 또 인간세상을 돌보기 때문에 제사가 전쟁보다 더 중요했다.
여장군이자 여사제
을묘일이 빈(賓)이 점을 쳤다. “부호가 조모인 계(癸)에게 제사를 지내도 될까요?”
“부호가 요(燎)란 방식의 제사를 지내는데 소 한 마리로 할 수 있을까요?”
“부호에게 부을(父乙)에 대해 작(勺)이란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했다.”
이상은 부호가 제사 행사를 주관했다는 갑골문 기록들이다. 신령과 소통하고 국가대사를 결정하는 것이 그녀가 맡은 직무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부호는 뿐만 아니라 외지로 파견 나가 정무를 돌보기도 했다.
“부호를 모처(某處)에 가도록 명령하면 순조로울까요?”
“부호가 미(眉)란 지역에 사람을 파견했다.”
부호는 또 대신과 협력해 일을 하기도 했다.
“부호에게 지벌(沚瞂)과 협력해 일을 하게 하면 순조로울까요?”
“부호가 양(徉)이란 지역에서 다부(多婦 여러 부인들)를 불러 만났다.”
“부호가 노인을 방문했다.”
“부호가 범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장가 부호
부호의 부장품 중 755개의 옥기가 있다 이는 상당히 많은 수준으로 박물관을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의 분량이다.
750여 개의 옥 중에서 500여개는 패옥(佩玉)으로 종류가 아주 다양해서 예기(禮器)에서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있다. 패옥, 장식, 용품 등등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할 정도이며 그중 몇 개는 특히 가치가 있다.
부호 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옥봉조(玉鳳鳥 옥으로 만든 봉새)로 높이 13.6cm, 두께 0.7cm로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부호보다 시대가 1~2천년 앞선다.
부호 묘에서 출토된 비녀 중 옥비녀가 29개, 뼈로 만든 골비녀가 499개로 주인공이 어떻게 이것들을 다 사용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부호에게는 또 자신의 방국(方國)이 있어서 상당해 부유했다. 그녀가 제후의 신분으로 대상에 조공했다는 갑골문 기록이 있다.
“부호가 빈(賓)이란 관원에게 소 견갑골 20개를 바쳤다”
이외에도 부호가 한 번에 거북 등뼈 50개를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부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수장가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상왕의 총애를 받은 부호
무정이 여러 차례 점을 쳐서 부호의 질병에 관해 문의한 것을 보면 부호가 얼마나 왕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부호의 몸이 허약해 조신(祖辛)에게 건강을 빌었다.”
“부호가 풍(風)에 상해 병에 걸리겠습니까?”
“부호의 치아는 문제가 없겠습니까?”
“부호가 재채기를 하는데 병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치아나 재채기까지도 왕의 관심 대상이었다.
부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무정은 도저히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부호는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호가 1년을 더 살 수 있겠습니까?”
“부호가 죽을까요?”
부호가 세상을 떠난 후 무정은 그녀를 자신과 가까운 곳에 안치했다. 때문에 묘지 구역에 안장되지 않고 궁전 구역에 안장되었다.
하늘은 이처럼 무정에게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을 이루게 했고 또 어진 신하와 현명한 재상을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옥처럼 아름다운 아내까지 배치해주었다.
참고문헌:
1. 《주례》
2. 《갑골문합집(甲骨文合集)》
3. 《사기》
4. 《은허부호묘 고고학 보고(殷墟婦好墓考古報告)》
5. 《은본기 보완과 상 역사인물》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