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조대(朝代) 말기의 제왕 역할을 맡기란 쉽지 않다. 주왕(紂王)의 부친 제을(帝乙)은 혼란을 미처 평정하지 못해 왕좌마저 불안하고 천상의 기이한 현상이 이미 나타나 갈수록 더 심해지는 왕조를 남겨놓았다.
《죽서기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나온다.
재위 5년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는데 이를 음매(陰霾)라고도 한다.
재위 42년 여자가 남자로 변했다.
재위 43년 요산(嶢山)이 지진으로 무너졌다.
재위 48년 신수(神獸)인 이양(夷羊)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해에 또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하늘에 뜨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서 요산의 붕괴(嶢山崩)는 세 하천이 말라버리는 삼천학(三川涸) 현상을 동반했다. 죽서기년에는 이 기록이 없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 “요산붕 삼천학”(嶢山崩 三川涸)이라 한다.
제신의 행동 역시 정상을 벗어났고 심지어 숙부인 비간(比干)을 죽이기까지 했다. 5백여 년 후 공자는 그를 가리켜 “한 규도 통하지 않았다(一竅不通)”고 했다. 공자는 “만약 제신의 규(窺)가 통했더라면 비간이 죽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신의 규가 막혀서 불통한 가장 전형적인 반응은 조이(祖伊)의 간언에 대한 반응을 들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상서》에도 기록이 있고 《사기》에서도 인용이 있다.
당시 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선조가 바로 해중(奚仲)이고, 조상 중에 중훼(仲虺)가 있으니 바로 성탕의 대신이었다. 그의 조상 중에는 또 조기(祖己)가 있는데 무정(武丁)의 대신으로 일찍이 《고종융일(高宗肜日)》을 지어 무정에게 인정을 베풀도록 간언했던 사람이다. 조이는 바로 제신의 대신이었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여(黎)나라를 멸한 후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왜냐하면 여 나라는 상의 중요한 제후국 중 하나로 서쪽 변경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조이(祖伊)가 급히 제신을 찾아갔으나 제신은 오히려 느긋했다.
조이가 말했다.
“천자시여, 하늘이 이미 우리 은나라의 명을 끊으려하시니 훌륭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거북점을 쳐봐도 감히 길함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선왕들께서 우리 후손을 돌보지 않는 게 아니라 왕께서 음란하고 포악한 행동을 하시어 스스로 나라의 운명을 끊으셨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를 버리신 것입니다. 왕께서는 백성이 편안히 먹고 살게 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법도를 따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은 왕이 망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어 ‘하늘은 어째서 위엄을 내리지 않으며 대명(大命 새로운 천명을 받은 천자)은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에 왕께서는 어찌하려 하십니까?”
제신이 말했다.
“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왕이 된 것이니 어찌 천명이 아니란 말이오?”
조이가 말했다.
“아! 그대의 잘못이 아주 많아 이미 하늘에 닿았는데 어찌 또 하늘의 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한 일을 들추어보니 상족(商族)이 주족(周族)에게 소멸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이는 자신의 간언이 효과가 없자 돌아오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주(紂)에게는 간언할 방법이 없구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제신은 정말로 구멍이 막힌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가 조이를 죽이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구멍”을 막는데 흔히 사용되는 것이 바로 술이다.
주왕은 신하들과 함께 질탕하게 술을 마시곤 했는데 《한비자》〈설림(說林)〉에 군신이 함께 즐긴 이야기가 나온다.
“주(紂)가 밤낮으로 계속 연회를 열어 술을 마셨는데 환락에 빠져 날이 가는 줄 몰랐다. 이에 좌우 측근에게 날짜를 물었지만 모두 알지 못했다. 이에 사람을 보내 기자(箕子)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러자 기자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날이 가는 줄도 모르게 만들었으니 천하가 위태롭겠구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르는데 나 홀로 이를 안다면 내가 심히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기자는 비간(比干)과 같은 시대의 원로이자 주왕의 친척이다.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제정신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주나라 귀족 맹(孟)이 상나라 사람들이 폭음했던 일을 자신의 예기(禮器)인 대우정(大盂鼎)에 새겼고 이것이 청나라 때 출토되었다. 여기에는 “내 들으니 은나라가 하늘이 주신 대명(大命)을 잃은 것은 멀리서 조공 온 제후들과 조정 내 크고 작은 관리들이 모두 다 술에 취했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다.
주조(周朝)가 창립된 초기 예악(禮樂)의 완성자로 유명한 주공(周公)이 금주령을 발표한 이야기는 《상서》〈주고(酒誥)〉에 나온다. 주공은 이렇게 말한다.
“혹시라도 떼를 지어 술을 마셔야 한다고 훈계하는 자가 있거든 그대는 놓치지 말고 모두 붙잡아 주나라로 보내도록 하라. 내가 죽일 것이다. 또 은나라의 인도에 따르던 여러 신하들이나 공인(工人 장인)들이 개인적으로 술에 빠져 있으면 죽이지 말고 우선 가르치도록 하라. 이렇게 분명하게 누리면서도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동정하지 않고 깨끗이 여기지도 않을 것이니 그럼에도 떼를 지어 마신다면 죽임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를 보면 확실히 음주는 상나라 사람들의 전통임을 알 수 있는데 무정(武丁) 시대 갑골문 속에 대신이 술을 마시다 몸이 불편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상조 말년에는 심지어 대기 속에도 술 냄새가 가득했다고 한다. ‘성문재상(腥聞在上)’이란 성어가 있는데 술과 음식의 냄새가 널리 하늘까지 퍼졌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보자면 당시 규(窺)가 막힌 것은 단지 상주왕뿐 아니라 대부분이었다.
또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했으니 신에게 제사로 올리는 희생을 어떤 사람이 몰래 훔쳐갔고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큰 죄를 지었음에도 죄인이 체포되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이와 함께 또 상조(商朝) 상류층 사회에 대대적인 탈출붐이 나타났다.
《사기‧주본기(周本紀)》에는 “태사(太師) 자(疵)와 소사(少師) 강(彊)이 악기를 품고 주나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백이와 숙제는 원래 고죽에 있었는데 서백(西伯 문왕)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가서 서백에게 귀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태전(太顛), 굉여(閎夭), 산의생(散宜生), 육자(鬻子), 신갑대부(辛甲大夫) 등 고위 대신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했다.”고 했다.
한편 《여씨춘추》에는 은나라 내사(內史) 향지(向摯)가 주왕(紂王)이 갈수록 미혹되는 것을 보고는 법전(法典)을 수레에 싣고 주나라로 탈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왕의 형 미자(微子)는 조상의 제기(祭器)를 지니고 자신의 봉지(封地)에 은거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바로 “발로 하는 투표(用腳投票)”다.
참고문헌:
1. 《이아(爾雅)》
2. 《회남자》
3. 《여씨춘추》
4. 《상서정의》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