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제을의 왕위는 큰아들이 아닌 막내아들이 계승했다.
큰아들의 이름은 미자[微子 이름이 계(啓)라서 미자 계라 부른다]였고 막내아들은 수덕(受德)인데 또 수(受)라고도 불렀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어머니 소생이다. 차이점이라면 미자가 출생했을 때는 모친이 아직 비(妃)에 불과했지만 미자와 중연(中衍) 두 아들을 낳은 후 정후(正后)가 되었고 그 후 태어난 아들이 바로 수덕이었다.
미자는 사람됨이 어질고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선호했고 제을 역시 본래 그를 태자로 삼으려 했었다. 하지만 태사(太史)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태사는 종법(宗法)을 근거로 삼아 “본처의 아들이 있으면 첩의 아들을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종법제도에 따르면 미자가 출생했을 때 모친이 아직 정처(正妻)의 지위에 없었기 때문에 ‘서자(庶子)’가 되며 비록 같은 어머니의 형제라도 수덕은 ‘적자(嫡子)’가 된다. “적자가 있으면 적자를 세워야지 서자인 장자를 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 태사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여기서 태사가 근거로 삼은 종법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상조(商朝) 역사상 9세의 난은 왕위 계승의 혼란이 원인이었기에 제을(帝乙)도 이를 잊을 수는 없었다. 태사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최후에 수덕이 왕위를 이으니 그가 재위에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수(受), 수덕(受德), 또는 제신(帝辛)이라 불렀다.
나중에 그가 사망한 후 누가 준 시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주(紂)로 불리기 시작했고 후인들은 그를 흔히 주왕(紂王) 또는 상주왕(商紂王)이라 불렀다. 여기서 주(紂)는 원래 수레를 끄는 말의 뒷부분을 묶는 가죽 띠를 가리키는데 《시법(諡法)》에서는 “잔인해서 의를 저버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상주왕이란 이름이 수나 제신보다는 훨씬 유명하다.
여기서는 후세에 보다 익숙한 이름인 상주왕으로 부르기로 하자.
상주왕은 상조 최후의 군왕이었다. 5~6백년에 달하던 상조의 휘황함이 그의 손에서 끝을 맺었다. 그의 명성은 대단히 커서 후세 군왕들에게 일종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와 부친 및 조부 및 전체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주왕이 재위한 햇수에 대해서도 설이 다양하다. 《사기》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다른 사서에서는 어떤 책은 52년, 어떤 책은 33년을 말했고 어떤 책은 62년이라고 했다. 주왕이 남긴 수수께끼가 아주 많은데 이 역시 그중 하나다.
위로 어질고 선량한 두 형이 있는데 왜 하필 그가 천하의 왕이 되었단 말인가? 만약 그의 형 이 대신 즉위했더라며 주조(周朝)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하는 사람이 늘 있다.
또 예법(禮法)을 강하게 지지해 주왕의 즉위를 도운 태사 역시 비판을 당했는데 《여씨춘추・당무(當務)》에서 이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주(紂)와 어머니가 같은 형제가 셋 있었는데 맏이가 미자 계였고 그다음이 중연 그 다음이 수덕이었다. 어머니가 계와 중연을 낳을 때는 아직 첩이었고 그 후 본처가 된지 얼마 안 되어 주를 낳았다. 원래 부모 모두 미자 계를 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태사가 법에 근거해 ‘본처의 소생이 있으면 첩의 소생을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주가 후계자가 되었다. 법을 적용함이 이와 같다면 차라리 법이 없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불평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대부분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라의 운명에는 정해진 수가 있고 천체(天體)의 순환이 조대가 교체될 시기에 도달하면 성대하고 아름다운 조대가 무대에 올라와 연기해야 한다. 설령 주왕이 제위를 잇지 않았을지라도 마땅히 배턴을 넘길 때가 되면 그의 형이 왕이 되었어도 상주왕처럼 변했을 것이다.
주왕은 어떤 인물인가
태사는 좀 억울한 점이 있는데 주왕이 폭군 ‘주(紂)’가 되기 전에 어떻게 그가 어리석은 인물인지 알았겠는가?
주왕은 외모가 위풍당당해서 사마천보다 200년 앞선 인물인 순자(荀子)는 자신의 저서에서 “몸이 크고 아름다워 천하의 호걸이었고 근력이 뛰어나 적군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라고 주왕의 외모를 평가했다.
《사기》에서는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맨손으로 맹수와 싸웠다.”라고 했다. 여기서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은 정도는 황보밀의 《제왕세기(帝王世紀)》 표현이 더 구체적이다. 즉 “9마리 소를 뒤로 끌었고 들보를 짊어지고 기둥을 교체할 수 있었다.(紂倒曳九牛,撫梁易柱)”
여기서 9마리 소를 뒤로 끌었다는 말은 내력이 명확하진 않지만 9마리 소의 꼬리를 끈으로 한데 묶고 상주왕 혼자 그것들과 줄다리기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소들이 주왕에게 끌려갔다는 뜻이다. 물론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라기보다는 비유임이 명확하다. 가령 항우의 용맹을 표현하면서 “산하(山河)를 뽑을 수 있다”고 하는 표현과 같은 성격이다.
한편 들보를 짊어지고 기둥을 교체했다는 ‘무량역주(撫梁易柱)’이야기는 소설 《봉신연의》에 나오는데 이 책은 역대로 상주사(商周史)의 보충교재로 간주되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을이 황궁 후원에서 노닐며 문무관원들을 이끌고 모란을 감상하는데 비운각(飛雲閣)의 들보 하나가 무너지자 수왕(壽王 주)이 들보를 떠받치고 기둥을 교체했는데 힘이 비할 바 없이 컸다.”
물론 이 일의 진실성 역시 고증이 어렵지만 주왕의 신체적인 특징에 대해 일부나마 알 수 있다.
그는 또 머리도 아주 좋아서 “천부적인 변별력이 있고 영리하고 민첩하며 견문이 매우 빼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이유로 제을을 탓해선 안 되며 태사 역시 잘못이 없다. 주왕은 선천적인 조건이 제왕이 되고자 타고난 것이다.
《사기》에서는 그에 대해 “지혜는 간언이 필요치 않았고 말재주는 허물을 교묘히 감추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뽐내며 천하에 그 명성을 드높이고자 했으며 모두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다.”라고 했다.
이 특징은 또 다른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自我)다. 사람이 자아가 커지면 번거로움을 피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1. 《사기‧은본기》
2. 《여씨춘추‧당무(當務)》
3. 《설문해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6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