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정사(政事)를 팽개치고 음란한 음악을 즐긴 외에 주왕(紂王)이 또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사서에는 보다 많은 기록이 없다.
주왕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3천년 넘게 지났고 갑골문이 발견된 지도 수십 년이 흘렀다. 갑골문이 해석되고 최근 들어 출토되는 문물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우리는 지금에야 비로소 주왕이 원래 통치에 힘쓰던 임금으로 중국 동남부를 통일했음을 알게 되었다.
주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후 그의 주변에는 기자(箕子), 비간(比干), 미자(微子) 등 어진 신하들이 존재해 공동으로 보좌해 정치는 그런대로 청명(淸明)했지만 천하가 조공하지 않았고 왕조 주변의 사이(四夷 사방의 이민족)들이 수시로 침입해왔다.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이라고 했다. 즉, 신령을 모시고 무력으로 나라를 보위하는 것이 국가의 대사라는 뜻이다. 주왕의 부친 제을(帝乙)이 이미 주문왕의 양해를 얻었기 때문에 서쪽 전선에는 전쟁이 없었다. 제을은 이에 동이(東夷)와 회이(淮夷) 공략을 위해 많은 전투를 치렀는데 이런 전투가 아들인 주왕(紂王) 시기까지 이어졌다.
갑골문에는 주왕이 정벌전을 했다는 기록이 대량으로 남아 있다. 가령 우방(盂方)을 정벌하고, 월방(戉方)을 정벌하고 사방방(四邦方)을 정벌했다는 기록 등등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들인 것은 동쪽의 이족(夷族)이었다.
사실 동이가 상왕조와 얽힌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주왕의 조상인 무정(武丁) 시대에 변경이 불안했던 요소가 줄곧 주왕시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인방(人方)은 그중 한 갈래였다. 이들과 상조의 적대관계는 유래가 아주 오래되었따. 주왕의 조상인 무정이 출병해서 인방을 공격했지만 인방이 완강히 버텨 수백 년간 끊임없이 정벌전을 벌였지만 인방은 끝내 멸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대상(大商)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처럼 침범해왔다.
전쟁 전에 제사를 올려 하늘에 알려야 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하늘에 알려야 했다. 갑골문에 기록된 전쟁은 주왕 재위 10년이 비교적 상세하다.
상주(商周) 시기에 군대를 동원할 때는 반드시 미리 신에게 알려야 했으며 주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신(帝辛 주왕) 10년 9월 갑오일에 주왕이 대읍(大邑) 상에서 마제(禡祭)를 거행했다. 여기서 마제란 군사를 출정할 때 반드시 지내는 제사로 신에게 상조의 군대가 장차 출정할 것을 알리고 대신과 제후들도 함께 하는 제사라서 사제(師祭)라고도 한다. 주왕은 또 위아래 여러 신들에게 보우해주실 것을 기도했다. 주왕은 점을 쳐서 나온 조짐을 보고 길하고 이롭다고 보았다.
최근 들어 중국 동남부 지역에서 많은 문물이 출토되었고 또 새로운 갑골문 복사(卜辭)들이 발견되고 있다. 때문에 지금은 이미 주왕의 동이 원정에 대한 내용이 기본적으로 규명되었다.
원정 첫해 9월 주왕이 성도(聖都) 대읍(大邑)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 대부대를 이끌고 안양(安陽) 부근에서 출발해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산동에 위치한 ‘유(攸)’에 도달하기까지 총 127일이 걸렸고 전체 여정은 1420리에 달한다.
여기서 ‘유’라는 지명은 상군이 28일간 전투한 곳이다. 전과는 휘황했다.
귀로는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는데 총 89일이 걸렸다. 도중에 여러 곳에서 혹은 길게 혹은 짧게 머물렀다. 안양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7월이었고 전체 기간은 총 250일이 걸렸다.
《여씨춘추‧불광편(不廣篇)》에는 “군대가 30리를 가는 것을 일사(一舍)라 하며 30리를 걷고 하룻밤을 묵는다.”고 했다. 그런데 주왕이 당시 대부대를 이끌고 갈 때는 하루 평균 11리, 올 때는 하루 평균 12리를 걸었으니 걷다가 쉬다가 천천히 이동한 것이다.
주왕은 또 군대를 이끌고 머물던 곳곳에서 전렵(田獵)을 했다.
여기서 전렵(田獵)이란 수렵(狩獵) 또는 순렵(巡獵)이라도고 하는데 바로 일종의 사냥이다. 당시 군대 예절 중 ‘대전(大田)의 예’의 일환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전렵이란 단순한 사냥이라기보다는 훈련과 평소 방어태세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병사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각종 전술을 장악하고 작전 능력을 향상시켰다. 전렵은 보통 1년에 4차례 진행했는데 계절마다 한차례씩 했기 때문에 ‘사시전렵(四時田獵)’이라고도 한다.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자면 일종의 정기적인 야전훈련인 셈이다.
제신 15년에 주왕이 군대를 이끌고 또 한 차례 군사행동에 나섰는데 이때의 행동 규모도 작지 않았다.
이 전쟁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다른 이야기부터 해보자.
청조(淸朝) 함풍(咸豐) 연간 산동 수장현(壽張縣) 양산(梁山)에서 7개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주무왕의 동생 소공(召公)이 소장했던 극히 진귀한 것들인데 그중 하나가 소신여서존(小臣艅犀尊)이다.
이 청동기에는 4행 27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대략적인 의미는 “정사일에 왕이 노(夒)지역의 향묘(亯廟)를 순시하고 소신 여에게 노 지역의 패(貝)를 하사했다. 15년 왕이 이방을 원정하고 돌아오는 길이 마침 제삿날이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상주(商周)시기 문물이 대량으로 출토되면서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들과 갑골문 기록을 상호 보완하면 제신 15년에 비교적 큰 또 다른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왕(商王)의 군대와 이방백(夷方伯)은 아마 지금의 안휘 북부, 강소 북부 및 산동 서남 사이 지역에서 교전했을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대군이 돌아간 여정은 올 때와 다른데 먼저 북으로 제(齊)에 이르고 다시 서북쪽으로 노(夒)에 이른 후 왕기(王畿)지역으로 돌아왔다. 호(蒿)지역에서는 수렵을 진행했다.
출정에서 돌아왔으니 당연히 또 제사를 지내 전황을 보고해야 했다. 상주왕이 제사를 지낼 때 또 사냥한 동물을 희생으로 삼아 신과 조상에게 바쳤다.
고대 문헌에도 주왕이 정벌전을 했다는 기록이 단편적이긴 하지만 남아 있다.
우선 《좌전‧소공4년(昭公四年)》에는 “상주(商紂)가 여(黎)에서 수(蒐)를 하는데 동이가 배반했다.”는 구절이 있다. 즉 상주왕이 여라는 땅에서 사냥을 했는데 동이가 그를 배반했다는 뜻이다.
같은 책 《소공12년》에도 “주왕이 동이와 싸워 이겼으나 몸에 부상을 당했다.”라고 했다.
《한비자‧십과(十過)》에서는 “주가 여구(黎丘)에서 수(蒐)를 하는데 동이가 배반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수(蒐)란 봄철에 하는 사냥활동으로 주왕의 군대가 여 나라에서 봄 사냥을 하자 여 나라가 분노해 배반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세 곳의 기록을 하나로 합해보면 ‘여산(黎山)’이나 ‘여구(黎丘)’는 사실 동일한 지역을 가리킨다. 여(黎)는 서진(西晉)의 학자 두예(杜預)의 해석에 따르면 동이(東夷)의 나라명이다. 동이는 정말이지 상주왕의 힘을 크게 소모시켰다.
《여씨춘추‧고악(古樂)》에는 “상나라 사람들이 코끼리를 훈련시켜 동이를 가혹하게 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상조(商朝) 이전에도 코끼리는 순임금이 밭을 갈 때 등장하고 갑골문에도 사람이 코끼리 코를 당기는 형상의 글자가 존재한다. 상조인(商朝人)들은 느릿느릿한 신사(紳士)들로 팀을 만들어 코끼리 등에 타고 앉아 동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상주왕 시대의 갑골문에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전쟁들이 등장한다. 수백 년간 제후구들과 상(商)의 관계는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고 때로는 배반하고 때로는 복종했다. 《사기》에는 상조 역사에서 6차례 쇠퇴를 언급하는데 상주왕(商紂王)이 왕위를 이은 후 더욱 쇠약해진 부담을 떠안았고 이에 정벌전쟁은 주왕의 주선율(主旋律)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동이를 정복한 후 상왕조와 그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사서와 갑골문에는 모두 따로 언급이 없어서 한편의 큰 공백이 존재한다. 하지만 한 가지 점만은 확실한데 바로 현재 중국이 동방과 동남방의 긴 해안선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제신(帝辛)의 공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주조(周朝) 초기 상조의 유민들과 주나라 왕실의 삼공(三公)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킬 때 그들의 동맹군이 바로 동이였다. 이를 보면 상조인들과 동이의 관계는 당연히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동이가 거주하던 산동에서 대량의 상조(商朝)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발견된 것에서 일부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상왕이 상족인사를 직접 파견해 동이를 관리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역사적으로 제신을 너무나 유명하게 만든 여우가 부체 된 망국의 요괴 달기(妲己) 역시 그의 전리품 중 하나였다.
참고문헌:
1. 《상대사구(商代史九)‧상조의 전쟁과 군사(商朝的戰爭與軍事)》
2. 《송사(宋史)‧예지(禮志)》
3. 《제신10년 이방 정벌과 상왕이 순사한 역사사실(帝辛十祀征夷方與商王巡狩史實)》
4. 《주례정의》
5. 《국어》
6. 《한비자》
7. 《갑골문석의(甲骨文釋義)》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