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목야대전(牧野大戰)
상조(商朝)의 천명(天命)을 끝낸 것을 가리켜 역사에서는 ‘무왕벌주(武王伐紂 무왕이 주를 토벌하다)’ 또는 ‘무왕극상(武王克商)’이라 한다.
여기서 무왕은 당연히 주 무왕을 말하는데 다시 말해 주 문왕 희창(姬昌)의 아들 희발(姬發)이다. 벌(伐)은 정벌(征伐)이다. 서백(西伯) 주 문왕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는 해 아들인 무왕이 대군을 동원해 상주왕(商紂王) 토벌에 나선 것이다. 이 전쟁은 조가(朝歌 상의 도읍) 교외 70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목야(牧野)전투라고 한다. 상(商)과 주(周) 두 종족은 목야전투로 자신들의 역사적인 임무교대를 완성했다.
목야란 단어는 원래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를 뜻한다. 《이아(爾雅)‧석지(釋地)》에는 “읍(邑 성읍) 바깥을 교(郊)라 하고, 교 바깥을 목(牧)이라 하며, 목 바깥을 가리켜 야(野)라 한다.”고 했다.
즉 성읍을 중심으로 가까운 바깥이 교(郊)이고, 교보다 먼 바깥이 목이며, 목보다 더 먼 바깥이 야가 된다. 그러므로 목야란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란 뜻이다. 나중에 이 전쟁이 발생했던 목야가 고유한 지명으로 변했고 지금의 하남성 위휘(衛輝)시에 해당한다.
이 전쟁의 진상에 대해서는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
우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이 전쟁이 발생한 연대다.
상고 삼대(三代) 사관이 역사를 기록할 때는 간지(干支)로 연월일시를 표시했는데 후세에 들어와 변화가 있었다. 기원전 841년부터 세계(世系) 즉 기년(紀年)을 나열하게 되는데 수백 년이 지난 후라 당시의 시간 계산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무왕벌주’의 연대는 서한시기부터 많은 역사가들이 연구해왔지만 아직까지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것은 한 가지 큰 문제이자 그야말로 천고의 현안(懸案)이라 할 수 있다. 이게 명확하지 않으면 뒤이어 건립된 주조(周朝)의 연대를 확정할 방법이 없고 이보다 앞선 상조의 연대는 더욱 추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수리(數理)적 착오에 불과할지 몰라도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문제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상주왕(商紂王)의 숙부 기자(箕子)가 상나라가 멸망한 후 상조 유민들을 이끌고 한반도로 건너가 기자조선을 건립했다.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기는데, 그렇다면 조선의 역사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중국과 가까운 다른 나라들도 모두 마찬가지 문제가 생긴다. 즉, 목야전투의 연대가 틀어지면 주변 여러 나라의 역사 연대도 틀어진다. 중원에서 벌어진 한 차례 전쟁이 국제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셈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추론하는 목야전투의 연대는 44가지에 달하며 112년의 오차가 나는데 대체적으로 기원전 1130년에서 1018년 사이다.
지난 2011년 한국에서 상주왕이 점을 칠 때 사용한 홍도관(紅陶罐)이 발견되었는데 한국의 한 학자가 이를 근거로 목야전투가 발생한 연대를 기원전 1018년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의견 역시 마찬가지로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연대가 명확하지 않으니 날짜를 정하기는 더욱 어렵다. 천간지지로 시간을 계산하는 법도 연대가 달라지면 대응하는 날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분명히 갑자(甲子)일이라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기 어렵고 단지 연초(年初)인 12월(역주: 고대에는 왕조마다 1년의 시작 월이 달랐는데 상조는 동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어느 날이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요 인물이 명확하다는 점인데, 주인공은 주 무왕과 상주왕이었고 전쟁의 결과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상(商)이란 거대한 건물이 이날 무너졌고 작은 방국이었던 주(周)가 중국 역사상 정식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1976년 봄, 섬서 임동(臨潼)의 한 농민이 움집을 파려다 151건의 청동기를 출토한 일이 있었다. 이때 출토된 유물 중 대수롭지 않게 생긴 청동 궤(簋)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3천 년 전 목야대전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청동 궤를 흔히 식기(食器)로 이해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용도라기보다는 제사지낼 때 뜨거운 곡식류의 음식을 담아 신단(神壇) 위에서 상제(上帝)와 조상께 바치기 위해 사용한 제기(製器)다. 이것은 정(鼎)과 마찬가지로 중량이 많이 나가는 예기(禮器)에 속한다.
청동 궤의 주인은 이름이 ‘이(利)’인데 주무왕의 우사(右史)로 목야대전을 직접 겪은 인물이다.
궤 안쪽 바닥에 33글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대략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
“주무왕이 상주왕을 정벌했다. 갑자일 아침 제사를 올리고 점을 치니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밤에 상조(商朝)를 차지했다. 8일 후인 신미일에 무왕이 난사(闌師)란 곳에서 우사 이(利)에게 청동을 하사했다. 이는 이 청동으로 제기를 만들어 선조인 단공(檀公)을 기렸다.”
즉 당시 무왕의 신하였던 ‘이(利)’가 왕에게 포상받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28cm, 구경 22cm, 중량 7.95kg의 이 청동 궤를 만들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것이다. 지금 중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사람들은 흔히 ‘이궤(利簋)’ 내지는 ‘무왕정상궤(武王征商簋)’라 부른다.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상주교체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궤’와 마찬가지로 다른 문헌에 기록된 목야전투 역시 속전속결이었다.
가장 오래된 자료라 할 수 있는 《상서・목서(牧誓)》에는 정식 교전에 앞서 무왕이 병사들에게 맹세한 기록이다. “갑자일 어두운 새벽 왕이 처음으로 상의 교외인 목야에 이르러 병사들 앞에서 맹세했다.”라고 했다.
같은 날 저녁 주왕이 도망갔다. 《일주서(逸周書)‧세부해(世俘解)》에서는 “갑자일 저녁 상왕 주(紂)가 5개의 천지옥(天智玉)을 몸에 지닌 채 스스로 분신했다.”고 했다.
이상을 바탕으로 상조 마지막 순간을 개략적으로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1130년에서 1018년 사이의 어느 해 12월 어느 날, 주조(周朝)의 첫 번째 임금 주무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상주왕을 토벌하기 위해 도성 근처로 왔고 쌍방이 목야(牧野)에서 결전을 벌였다. 상이란 거대한 건물이 이날 무너졌고 작은 방국이던 주가 정식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왔다. 위로 오제(五帝) 및 대우(大禹) 시기 예악으로 천하를 교화하던 전통을 계승했고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중화 예악문명은 문채가 아름다운 주조의 예악제도 및 관련 기록을 통해 후세에 남겨진다.
상고시대에는 “예의 3백 가지에 위의 3천 가지(禮儀三百,威儀三千)”라는 말이 있는데 왕조가 교체되는 목숨을 건 큰 전투인 개조환대(改朝換代)에도 예절이 있었다.
군자의 약속
갑자일 전투에 앞서 쌍방이 우선 시간과 장소를 확정했다.
상고시기의 전쟁에서는 의전(義戰)이라 해서 명분을 가장 중시했다. 즉 출병하는데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예기‧단궁》에서는 “군사는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한다(師必有名)”고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군사력을 동원할 때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사출유명(師出有名)으로 된다. 또한 예의를 중시했는데 군사예의는 그중에서 중요한 일부다. 예가 먼저였고 무력은 나중(先禮後兵)이었다.
상고시기 병서로 알려진 《사마법》에는 당시 병력을 동원할 때의 예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제후 중에 명을 어기고 지켜야 할 법도를 어지럽히고 부도덕한 일을 일삼아, 천시에 순응하지 않으며 공로가 있는 이를 해치려는 자가 있으면, 제후들에게 널리 알려 그의 죄상을 폭로한다. 그리고 하늘의 상제와 일월성신에게 고하고 후토(后土) 및 사해(四海), 산천(山川) 등의 신지(神祗)에게 빌었으며 또 선왕의 영령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후 천자국의 재상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징발하면서 제후들에게 ‘지금 어떤 제후국이 도에 맞지 않는 짓을 저지르고 있어 이를 정벌하려 한다. 그러니 모년 모월 모일에 군사들을 모 나라에 집결시키도록 하라. 그리하면 천자가 그들에게 형벌을 내려 이를 바로 잡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을 일으킨 쪽에서는 상대방에게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전서(戰書)를 보내 공격하는 이유와 장소, 시간을 명확히 알렸다.
가령 삼국시기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전서가 유명하다.
“근자에 조정의 명을 받들어 죄지은 자들을 토벌하고 있소. 군대의 깃발이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劉琮)이 바로 손을 묶고 항복했소. 지금 수군 80만을 단련시켜 장군과 오(吳) 땅에서 자웅을 가리려 하오.”
이외에 또 격서(檄書)가 있는데 이는 자기편 진영에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육도(六韜)》에서는 “대장이 먼저 전투장소와 시일을 결정한 후 장수들에게 격서를 보내 공격하거나 포위할 성읍을 명확히 하고 군대가 집결할 장소 및 전투 날짜 및 정확한 시간을 알린다.”라고 했다.
격서는 정식 관방문서로 특별히 제작된 목간 위에 썼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적지 않은 명작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에 주 무왕이 과연 전서를 전달했는지 또 어떻게 상주왕에게 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고증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상주왕은 대신(大臣)인 교격(膠鬲)을 파견해 유수(鮪水)라는 지역에서 무왕을 접촉했다고 한다.
《여씨춘추》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무왕의 군대가 유수에 이르자 상왕이 파견한 교격 등이 나와 주나라 군사들을 맞이했다. 무왕이 그를 만나자 교격이 말했다. “서백께서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우리를 속이지 마십시오.”
그러자 무왕이 말했다. “당신을 속이는 게 아니오, 우리는 은(殷) 땅으로 갈 것이오.”
교격이 말했다. “언제 도착하십니까?”
무왕이 대답했다. “갑자일에 은 도성 교외에 도착할 것이오. 당신은 이렇게 보고하시오.”
이것을 가리켜 ‘기일을 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하늘에서 비가 내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왕은 오히려 더 빨리 행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이 앞을 다퉈 간언했다.
“병사들이 이미 병에 걸렸으니 잠시 쉬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무왕이 말했다.
“나는 이미 교격에게 갑자일에 은나라 도성 교외에 도착한다고 그의 임금에게 보고하게 했노라. 만약 갑자일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교격의 신용을 잃게 하는 것이다. 교격이 신용을 잃으면 그 군주가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내가 급히 행군하는 것은 교격을 구해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무왕은 정말로 갑자일에 은나라 도성 교외에 도착했고 은나라 병력들은 이미 진세를 펼쳐놓았다.
주무왕은 물론 인의(仁義)한 군주라서 상주왕과 만나 담판할 때에도 오히려 속임수나 기습을 하지 않았고 상대방 병력이 곤란한 틈을 타서 포위토벌하지 않았고 약속한 시간에 목야에 도착했다. 정정당당(正正堂堂)은 상고 시기 행동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규범이자 군사예의였다. 전쟁을 하는 쌍방도 자각적으로 이를 준수했다.
전투에서 ‘속임수(詐)’를 쓰는 것은 수백 년 후 예악이 붕괴되고 사회도덕이 크게 미끄러져 내려간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난다. 이 시기에 나온 병법서인 《손자병법》에 “전쟁은 속임수로 성립되고 이익으로 움직인다(兵以詐立,以利動)”는 설이 나온다. 즉 전쟁의 예법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후세의 수많은 논문과 저술에서 목야전투를 기습전, 간첩전으로 보는 것은 사실 상고시기 군사예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참고문헌:
1. 《설문해자》
2. 《회천: 무왕벌주와 천문역사 연대학(回天──武王伐紂與天文曆史年代學)》
3.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 판단(기원전 1018년 2월 22일)》
4. 《여씨춘추》
5. 《춘추‧공양전》
6. 《손자병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0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