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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40: 상조 이후의 이야기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목야전투에서 사방 백리에 불과하던 작은 나라 주(周)가 마침내 사방 천리에 달하는 상조(商朝)를 멸망시키고 또한 10만 상군(商軍)의 귀국길을 막았다.

무왕이 병사를 일으켜 주(紂)를 토벌할 때 상군은 마침 동이(東夷)를 평정하고 있었는데 사령관인 유후희(攸侯喜)가 이끄는 주력군은 아직 ‘인방(人方)’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로 아직 조가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주 무왕이 조가를 공격해 상주왕이 녹대에서 스스로 불에 뛰어들면서 조대(朝代)교체가 신속히 마무리되었다. 그러자 10만에 달하는 이 상군의 부대가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상나라의 군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주(周)나라의 군사가 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투항군이 될 것인가?

이 부대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파벌을 만들지도 않았다. 자신들이 정복한 ‘인방’을 또 다른 작은 나라로 만들고는 사라져버렸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완전히 사라졌고 주조(周朝)가 남긴 역사자료 중에는 이들에 관한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이 10만 명이 주나라 군사를 피해 동해로 탈출했고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 해안까지 이르러 그곳에서 후손을 퍼뜨렸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장을 처음 제출한 사람이 중국인이 아니라 1백여 년 전 영국의 중국학자인 메드허스트(Medhurst)가 중국의 고서 《상서(The Book of History)》를 번역한 후 다시 《자치통감》을 연구한 후에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헛소리로 여겼다. 10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몇 천 년 전에 어떻게 큰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몇 천 년간 풀리지 않던 이 문제가 갑골문 은허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약 100년 전 갑골문이 발견되고 해석되고 또 이 내용이 서방에 전해지면서 노란 머리 푸른 눈의 서양인들이 원래 그들이 보기에 그냥 구불구불한 그림처럼 보았던 많은 것들이 사실 문자임을 발견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이런 문자들이 갈수록 더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일부는 중국 갑골문과 그야말로 똑같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의 한 화인(華人)교수가 일찍이 멕시코 올멕(Olmec)에서 200여개의 옥규(玉圭), 옥조각 등을 수집했는데 위에 새겨진 것이 갑골문과 같은 부호였다. 그는 이중 일부 갑골문 복사본을 가지로 두 차례에 걸쳐 중국에 가서 본토학자들의 감정을 받았는데 “이 글자들은 선진(先秦)문자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들었다.

1999년 한 중국인 학자가 이들 옥기 위에 “새겨진 문자가 만약 출처에 문제가 없다면 마땅히 중국 상대(商代) 후기 갑골문과 같은 체계의 문자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학자는 신중하게 “새겨진 문자가 만약 출처에 문제가 없다면”이란 조건을 달았는데 이 뜻은 조작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즉, 만약 조작된 게 아니라면 갑골문과 같은 체계의 문자란 뜻이다. 학자의 해독이 틀리지 않는다면 “상대 말년 은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 등 왕실 구성원들이 주나라 초기 무왕의 동생인 관숙, 채숙, 곽숙 등과 소위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켜 실패한 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도망했고 그곳에서 후손을 번창시키고 남긴 문화유산”이라고 했다.

2001년 미국에서 제공한 기금으로 중국과 미국의 몇몇 학자들이 멕시코 현지에서 합동연구를 진행했다. 중국 전문가의 가입으로 연구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다.

올멕은 멕시코 최대의 제사 유적지로 16개의 작은 옥인(玉人)과 6개의 옥규로 구성된 문물이 출토되었다. 중국 고문자 전문가는 이들 사람 몸에 새겨진 갑골문을 비교적 쉽게 해독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조융견적(俎娀繭翟)”에서 견적(繭翟)은 유융씨(有娀氏)의 장녀로 상족(商族)의 조상이다.

“비신(妣辛)”은 고신씨(高辛氏)로 황제(黃帝)의 증손이자 역시 상족 조상이다.

“아조사다월(亞俎司多月),치우다(蚩尤多), 만(瞞),병(並)” 역시 상족 조상들이다.

“십이시토(十二示土)”는 상족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도의 명칭이다.

문자를 해독하면 당연히 이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상조 말기 12세(世)의 상왕과 멕시코 3세(世) 상왕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내용이다.

그들은 또 멕시코 박물관에서 석경(石磬)을 하나 발견했는데 형상이 중국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했고 위에는 갑골문이 새겨져 있었다.

석경은 상대 이전부터 존재했는데 바로 ‘팔음(八音)’ 중 ‘청(淸)’음에 해당한다.

《시경‧상송(商頌)‧나(那)》에서 “작은 북 큰 북 은은하게 둥둥 울리고 삐리리 피리소리도 고르게 어울려 우리 경쇠 소리 따르니(鞉鼓淵淵,嘒嘒管聲,既和且平,依我磬聲)”에서 말하는 석경이 그것이다. 이는 상왕 궁정에서 아악(雅樂)을 연주할 때 사용하던 ‘타악기’의 일종이다.

이 석경 위에도 두 줄의 명문(銘文)이 있는데 한 줄은 “월윤입삼(戉尹入三)”이고 한 줄은 “석삼경용(石三磬用)”이다. 첫 번째 행의 의미는 월 지역의 집정관인 월윤이 3가지 석경을 공납했다는 뜻이다. 둘째 줄의 의미는 세 석경 중에서 이 석경을 받아서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들 문자들은 멕시코 박물관 깊이 수장되어 있었는데 중국 갑골문 전문가들이 해독하기 전에는 한 무더기 의미없은 부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은상(殷商)과 멕시코의 관계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사실 앞서 언급한 옥기인물(玉器人物) 문물은 이미 1955년에 출토된 것으로 중국 문화에 대한 기초가 부족한 서양학자들은 시종 이들 작은 사람들이 한 원을 둘러싼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그러다 1992년 실물을 보고 온 한 중국 화가가 《아메리카를 개척한 중화조상》이란 책을 내고 이들 갑골문을 해독했다. 그는 여기서 옥인(玉人)이 상왕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갑골문 전문가가 아닌데다 논증도 그리 치밀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한 가지 사연이 담겨 있다. 구양가량(歐陽可亮)은 청나라 말 민국 초기의 외교관인 구양경(歐陽庚)의 둘째 아들로 일본 보인(輔仁)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했고 나중에 대만과 일본에서 생활했다. 그는 일찍이 일본 외무성에서 교육을 담당한 적이 있다. 구양가량은 이 화가와 나이를 뛰어넘은 벗이었다.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대륙 관방과 접촉하지 못했고 그의 많은 원 자료들이 친구인 화가에게 넘어간 것이다. 때문에 《아메리카를 개척한 중화조상》에 일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1908년 멕시코혁명당이 현지 화교 311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1910년 구양가량의 부친 구양경은 청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특사 자격으로 멕시코에 가서 배상사건을 전담했다. 배상에 관한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멕시코 정부는 331만 불을 배상하기로 합의했다.

구양경이 이 일을 막 끝낸 어느 날 현지 인디언 백여 가족의 대표가 멕시코 주재 청나라 대사관을 에워싸고 청원했다. 멕시코 혁명당원들이 750명의 인디언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들 인디언은 중국 혈통이고 은상(殷商)의 후예로 인푸부(INFUBU)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3천 년 전 천국(天國)에서 하늘 부교를 거쳐 이곳에 왔다면서 청나라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해달라고 요구했다.

구양경이 이 일을 사실대로 본국에 보고하자 돌아온 답변은 “인디안 인푸부 족이 자칭 중국인이라고 하지만 법적인 근거가 없다. 손해배상을 잘 받은 것을 격려한다. 전에 화교 중에 은나라 사람이 동쪽으로 이주한 일이 없으니 천 년도 전의 역사로 문제삼긴 어렵다. 멕시코 주재 특사관의 업무는 끝났으니 구양경은 파나마 초대 총영사로 옮겨가도록 하라.”

구양경은 그래서 인디언들의 조상 찾기를 계속해서 지원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역사자료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유감스런 역사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청나라 외교부의 답변은 대만 양명산(陽明山)에 있는 외교부 당안(檔案)에 보존되어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구양경이 나중에 칠레 공사로 있을 때 가족이 고용한 하인이 현지 인디언이었다. 그런데 이 하인이 나무를 하다 손을 다치자 병원에 가는 대신 당시 어린아이였던 구양가량의 소변(역주: 어린 남자아이의 소변을 동변이라 하며 한약재 중 상처나 염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을 받아서는 상처에 발랐다. 이는 중국민간의 민간요법과 같다.

흥미로운 일들은 더욱 많은데 그들의 예술 역시 공통점이 있는 게 아닌가?

상주왕(商紂王)이 이익을 독차지하고 포락형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그곳에도 있다.

문제는 몇 천 년 전에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리 망망대해를 건너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죽서기년》에는 하대(夏代)에 구이(九夷)에게 명령해 큰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얻어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경・상송》에 조상의 공적을 찬양하면서 그들이 해외에 나갔다는 내용도 있다.

“위엄있고 용맹한 상토께서는 멀리 해외까지 평정하셨다(相土烈烈,海外有截)”

또 은허에서 출토된 부호(婦好)의 무덤에서도 6800개의 패각(貝殼)이 나오는데 상나라 왕은 날마다 점을 쳐야 했기에 대량의 거북껍질이 필요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큰 바다와 관련이 있다.

주 무왕이 상을 멸망시킨 전쟁에서 황하를 건널 때 강태공은 주조 병사들을 지휘해 하룻밤 사이세 47척의 선박을 만들어 4만 7천명을 싣고 황하를 건넜다고 한다. 이와 대조해보면 상조 10만 대군이 바다로 나가는 것이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옛날 조상들의 항해(航海)능력은 후대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

북경(北京)대학의 한 교수가 미국에서 강의하다가 어느 인디언 축제 만찬에서 현지 인디언 중학교 교사를 만났다. 이 교사는 교수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자신의 조상이 중국에서 온 은인(殷人)이라고 했다. 교수는 아주 이상해서 “당신은 왜 한인(漢人)이나 당인(唐人)이라 하지 않고 하필 은인(殷人)이라 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우리는 대를 이어 전해져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비록 증거효력은 없지만 가장 진실한 은인의 이야기다.

그럼 그들은 당시에 왜 큰 바다를 건너가려 했을까? 아마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인방(人方)에 주둔한 상조 대군이 주조(周朝)에 귀순할 것인가 아니면 귀순하지 않을 것인가?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아마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군이 대양을 건넌 이야기는 극히 믿을만하고 또 아주 가능한 일이다.

주 무왕은 아주 인자해서 개조환대(改朝換代) 초기에는 상조의 직속국이 있었고 여전히 상주왕의 아들을 세워 왕위를 잇게 했다. 다만 세 동생을 파견해 감시하게 했다. 주왕이 상군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것이 아마 상군이 바다를 건너가게 한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에 상조 10만 대군 외에 또 15만 명의 다른 인원들이 있어서 총 25만 명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는 선택을 했다. 유혈사태나 전투는 없었고 편안하지만 비장하게 고국을 멀리 떠난 것이다.

사실 이들은 기자와 마찬가지로 고향을 등지고 떠날 것을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아메리카대륙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 가지 설명은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기자도 북상(北上)해서 조선에 갔지만 대군은 더 멀리까지 갔다. 북상해서 가면 길은 더 멀어지지만 대신 훨씬 안전하다.

산동(山東) 일대에서 북상해 줄곧 북으로 올라가 베링해협을 지나고 다시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대륙으로 갔다는 것이 또 다른 설이다. 지도에서 보면 베링해협은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이 만나는 접점에 해당한다. 현재 베링해협의 평균 폭은 65킬로미터이고 가장 좁은 곳은 35킬로미터다. 이 사이에 또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2개의 작은 섬이 있다. 해협의 평균수심은 42미터이고 가장 깊은 곳은 52미터다. 겨울철에는 아주 두꺼운 얼음이 얼어서 이듬해 4~5월까지 결빙되어 사람이나 말, 수레가 모두 지나갈 수 있다.

또 다른 설명은 바다를 건너간 것인데 태평양을 가로지르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다.

구글 지도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시피 서해에서 대한해협, 일본열도를 거쳐 쿠릴열도에 이르고 캄차카 반도 남단을 거쳐 북태평양 알류산 열도에 이르면 바로 알래스카다. 지도에서 보면 알류산 열도는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일종의 부교(浮橋)가 된다. 그 사이 섬과 섬 사이의 거리는 대략 10~20해리 정도로 그야말로 북태평양의 진정한 부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교 남단에서 멀지 않은 곳은 늘 동쪽으로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와 태평양 난류가 지나간다. 일본 홋카이도 쿠릴열도에서 캄차카 반도 해안을 따라 알류산 열도를 지나면 북미 서북부에 도달할 수 있다. 특히 조류가 유리할 때는 작은 배를 타고서도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또 다른 설명은 은상의 대군이 현지에서 재료를 구해 배를 마들어 태평양을 건너갔다는 것이다.

지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은상 대군이 베링해협을 지나가는 방안은 망망한 대양을 에둘러 갈 수는 있지만 도보로 먼 길을 가야 한다. 만약 직접 태평양을 건넌다면 노정은 상대적으로 짧아지지만 거대한 파도라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당시 상조 대군은 대양항해에 필요한 기술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문제는 아직 누구나 만족할 만한 답안을 주진 못한다. 그러므로 은인(殷人)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갔다는 주장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맥(鑛脈)은 이미 발견되었으니 광석이 매장된 곳이 그리 멀진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1. 《은인이 동쪽으로 아메리카로 건너간 새로운 증거(殷人東渡美洲新證)》
2. 《모전(毛傳)》
3. 《아메리카를 개척한 중화조상(中華祖先拓荒美洲)》
4. 《동이고국사론(東夷古國史論)》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7/11/26/n989494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