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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41: 갑골문의 발견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발견에서 해독까지

갑골문의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또 아주 의미심장하다.

왕의영(王懿榮)은 청조(淸朝) 광서(光緖)시기의 대학자로 금석문에 정통했고 국학(國學 중국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한번은 그가 작은 병에 걸려 한약을 지어 먹다가 한약재 속에 포함된 ‘용골(龍骨)’위에서 갑골문을 발견했다.

중화민국 시기 간행물인 《화북화간(華北畫刊)》 1931년 제89기 〈귀갑문(龜甲文)〉이란 문장에서는 갑골문의 발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해(1899년) 유악(劉鶚 자가 철운)이 북경을 여행하면서 왕의영의 사저에 머물렀다. 이 때 왕의영이 학질에 걸려서 약으로 쓸 귀판(龜板)을 야채시장 입구에 있는 달인당(達仁堂)에서 구입하였다. 철운(鐵雲)이 귀판에 전문(篆文 전서문자)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왕의영에게 보였는데, 두 사람은 크게 놀랐다. 왕의영은 예전에 금문(金文)을 배워 이것이 고대의 물건임을 알고, 약방에 가서 이 귀판의 내력을 캐물었더니 하남의 탕음과 안양에 사는 주민들이 땅에서 파낸 것이라고 하였다.”

이 문장은 갑골문이 발견된 지 32년이 지난 후 발표된 것으로 이때 왕의영은 이미 작고한 상태였고 유악 역시 사망한 지 20여 년이 지났다. 한약 안에서 발견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왕의영이 ‘용골’ 위에 적힌 고(古)문자를 알아본 것은 확실하다. 그의 아들 왕한장(王漢章) 역시 부친이 “세밀히 고증한 후 비로소 상대(商代)에 점을 치던 뼈임을 알아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의영은 이에 ‘용골’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아주 짧은 기간 내에 1500여 편을 사들였다.

1년 후 왕의영이 아직 자신의 ‘용골’에 감춰진 보물을 자세히 연구해보기도 전에 8국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했고 왕의영은 자살로 순국했다. 이에 그의 갑골문 연구는 후계자가 사라졌고 아들은 1000여 편의 갑골문을 부친의 좋은 벗이자 앞 문장에서 언급된 유악(유철운)에게 넘겨주었다.

《노잔유기(老殘遊記)》란 책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적지 않지만 유악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 이름이 홍도백련생(鴻都百煉生)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홍도백련생이 바로 유악이고 그의 자가 바로 철운(鐵雲)이다.

유악 역시 박학다식하고 재주가 많아 고고학은 물론 수학, 의술(醫術), 수리(水利) 방면에 모두 업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는 또한 유명한 기업인이라 사귀는 사람들이 많고 재력도 풍부해서 갑골문을 은인(殷人)의 도필(刀筆)문자로 보고 도처에서 구매해 총 5천여 편을 구매했다.

1903년 유악은 이중 1000여 개의 갑골을 골라 탁본하고 《철운장구(鐵雲藏龜)》라는 책을 출간했다. 갑골문은 이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는 중국 최초의 갑골문 관련 저술이다.

여기서 탁본이란 쉽게 말해 복사본을 말한다. 먼저 한약재인 백급(白芨)을 끓인 물에 한 장의 화선지를 담근 후 갑골 위에 부착시킨다. 그리고는 작은 솔로 반복해서 문질러 종이를 완전히 밀착시키면 글자가 새겨진 곳이 움푹 들어간다. 이제 종이를 건조시킨 후 솔에 먹물을 묻혀 종이 위에 균일하게 바르고 화선지를 떼어내면 갑골문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흑백 두 가지 색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한 장 한 장 일일이 탁본한 후 이를 편집해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갑골문은 크기가 다양하고 또 부서지기 쉬워서 종이로 탁본을 떠서 보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유악이 해석을 시도해봤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했다. 그는 44개 글자를 알아냈는데 34개를 제대로 맞췄고 이중 19개는 간지나 수자로 모두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약 1년 후 《철운장구》를 제대로 알아본 이가 나타났으니 바로 손이양(孫詒讓)이다. 그는 청나라 말기의 언어학자로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한림원 출신의 청나라 고위관리였다. 손이양은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지금까지도 묵학(墨學 묵자를 연구하는 학문)과 주례(周禮)의 1인자로 불린다. 지금 사람들이 주례를 말하고 묵자를 말하는 것은 모두 그의 저술에서 유래한다.

손이양은 유악의 《철운장구》 탁본을 보고 몹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뜻밖에도 늘그막에 기적을 보게 되니 애지중지하면서 두 달간 힘껏 교정하며 읽었다. 또 앞뒤로 중복된 곳을 서로 참조하니 대략 문자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고증, 교감, 주석에 착수했고 두 달만에 《철운장구》 갑골문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았다.

손이양은 이에 《계문거례(契文舉例)》 2권을 썼는데 이 책은 갑골문에 관한 최초의 전문연구서적이다.

여기서 계문이란 칼로 새긴 글자라는 뜻으로 당시에는 갑골문을 갑골문이라 부르지 않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예를 들면 계문(契文), 은문(殷文 은나라 문자라는 의미) 또는 은허서계(殷墟書契 은허에서 나온 새긴 글자란 뜻), 복문(卜文 점을 칠 때 사용한 글자란 의미)이라고도 불렸다. 갑골문은 나중에 고정된 명칭이다.

1898년부터 한약재 ‘용골’은 고대 문물로 변했고 용골 위에 적인 글자들이 해독되기 시작했다. 이미 120여년이 지났다. 갑골문 연구는 이제 하나의 전문학과가 되어 ‘갑골학(甲骨學)’이라 불리며, 고대 문자에서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과와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1. 《당신을 갑골문의 세계로 이끄는 은허갑골학(殷墟甲骨學 帶你走進甲骨文的世界)》
2. 《상서정의》
3. 《춘추원명포》
4. 《증정은허서계고석(增訂殷墟書契考釋)》
5. 《여씨춘추》
6. 《갑골학1백년(甲骨學一百年)》
7. 《갑골문자편(甲骨文字編)》
8. 《춘추원명포》
9. 《도덕경》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