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너와 나의 갑골문
상조인(商朝人)의 문서관리는 완벽했다. 나중에 주공(周公)은 “은나라 선인(先人)들에게는 책(冊)이 있고 전(典)이 있었다”라고 했다. 갑골문에서 책(冊)이란 이렇게 수직으로 세운 죽편(竹片)으로 된 서‘간’(書簡)이나 목편(木片)으로 된 서‘차’(書箚) 내지는 서‘독’(書牘) 등 대량의 간독(簡牘)을 끈으로 묶은 것을 말한다. 한편 전(典)이란 책 옆에 두 손을 더해 두 손으로 공손히 책을 받든 모습으로 반드시 공경하게 받들고 읽어야 하는 ‘책’이 바로 ‘전’이니 바로 전적(典籍)의 ‘전’이다.
3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지금의 책전(冊典)이란 두 글자와 갑골문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기본적으로 인쇄체와 필기체의 차이일 뿐이다. 애석한 것은 몇 천 년을 내려오면서 상족(商族)의 책과 전이 모두 산실되어 사라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갑골(甲骨)은 재질이 특수하기 때문에 위에 적힌 문자가 지금까지 남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갑골문이 꼭 중국 최초의 한자(漢字)라 할 수는 없으며 상대(商代)보다 훨씬 이른 연대에 창힐(倉頡)은 화하(華夏)자손들에게 한자를 전해주었다. 그가 위로 천상(天象)을 관찰하고 아래로 세간의 만상(萬象)을 굽어 살펴 한문자(漢文字)를 만들자 “하늘에서는 곡식이 비처럼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울부짖었으며 용이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즉 천지와 귀신 등 각계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우리가 갑골문을 한자의 직계 조상이라고 말해도 틀리진 않는다. 지금의 한자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대부분 갑골문 속에서 내원을 찾을 수 있다.
동한의 허신(許愼)은 30권에 달하는 자신의 저서 《설문해자(說文解字)》 1권 서문에서 한자의 어원을 총결해 유명한 ‘육서(六書)’이론을 제출했다. 그는 한자를 만드는 구조에서 지사(指事), 상형(象形), 회의(會意), 형성(形聲) 4가지를 취하고 여기에 전주(轉住)와 가차(假借) 두 가지 한자 사용법을 덧붙였다. 그의 방식을 사용해 갑골문을 검증해보면 육서가 거의 완전히 구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천 개에 달하는 낱글자(單字) 외에도 갑골문에는 또 일정한 문장구조가 있으니 성숙한 문자임이 분명하다.
이에 전문 학자들은 갑골문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체계적인 한자다.”
일반적으로 한자는 수천 년간 내려오면서 갑골문→금문(金文)→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 다섯 단계를 거쳤다고 본다. 지금 세계적으로 14억 명이 한자를 사용하니 어떤 사람은 14억 명이 갑골문의 자손들과 친분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당신과 나를 포함한다.
오류교정 대사(大師)
갑골문이 해석되면서 상조(商朝)의 본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고 기존 사서 기록의 빈약함과 공백도 마땅히 보완되어야 했다.
국학대사(國學大師) 왕국유(王國維)는 갑골문을 근거로 삼아 사마천이 잘못 기재한 상왕(商王)의 세대를 바로잡았다. 또한 동시에 사마천이 서술한 상대사(商代史)를 “검증”한 결과 기본적으로 큰 잘못은 없었으며 또한 이전 왕조인 하(夏)의 존재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동한 시기 허신이 쓴 《설문해자》는 문자학(文字學)의 경전이라 불리는데 갑골문은 또 이 경전의 오류도 수정했다. 가장 대표적인 글자가 ‘위(爲)’가 있고 또 ‘무(武)’가 있다.
허신은 ‘위(爲)’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위는 어미 원숭이로 손톱으로 긁는 것을 좋아한다. 손톱(爪)은 어미원숭이를 상징하고 아랫부분은 어미 원숭이의 모습이다.(為,母猴也,其為禽好爪,爪,母猴象也,下腹為母猴形.)”
하지만 갑골문을 보면 ‘위’는 좌측 상방에 손이 하나 있어서 우측 아래에 꼬리를 아래로 내린 코끼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코끼리를 90도 돌려보면 모양이 더 분명한데 이는 사람이 손으로 코끼리를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학자들은 이 글자의 뜻을 손으로 코끼리를 끌고 가서 노역시키는 것으로 풀이한다.
어찌 보면 허신의 착각도 이해할 수 있는데 “상조 사람들이 코끼리를 조련”했지만 1천여 년이 지난 동한(東漢)시대에 코끼리는 이미 남쪽으로 이동한지 오래되어 볼 수 없었다.
갑골문으로 해결한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학자들은 갑골문 고고학에 근거해 상조 이전의 고대를 연구하고, 상조(商朝) 자체를 이해하며, 언어학을 연구하고, 고대 천문학을 이해하며, 현학(玄學)과 사람의 관계 및 심지어 중화민족의 연원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백여 년간 출토된 갑골의 수량은 약 10만여 편이 넘는데 15만 편이라는 설도 있고 또 5만 편이라는 설도 있다. 가장 상세한 수자는 9만 3849편이다. 연구에 참여한 학자들의 수는 4백 명이 넘고 4천여 개의 서로 다른 글자가 정리되었지만 이중 해석된 것은 아직 많지 않아서 1000여 개이고 3천여 개 글자가 비밀이 풀리길 기다리고 있다.
비록 해독된 글자는 1천여 개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으로 상 왕조는 이미 손만 뻗치면 만질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의 학문이 탄생되었다. 만약 어느 날 갑골문이 전부 다 해독된다면 또 얼마나 많은 오류가 교정되고 얼마나 많은 오묘한 신비가 드러나겠는가?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하다.
상계(上界) 신선의 것(仙物)
갑골문 기록의 절대다수는 신명(神明)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점복(占卜)’에 관한 기록이다. 내용을 보면 제사 시간, 제물의 종류, 정벌전쟁의 승패, 기후와 작황, 화(禍)와 복(福)의 예시 등등 다양하다. 갑(甲)과 골(骨)은 문자의 매개체로 일종의 ‘종이(紙)’다. 즉 신(神)과 소통하는데 사용한 ‘종이’로 ‘책(冊)’이나 ‘전(典)’에 사용한 죽편이나 목편이 아니다.
상조인들은 신령한 조상과 관련된 일은 어느 것이나 함부로 하지 않았다. 가령 청동 예기(禮器)는 주조하기 전에 제사를 해야 했고, 제사에 사용하는 희생은 특별히 사육해야 했으며 제사에 바치는 곡물은 청결하고 하자가 없어야 하며, 신과 소통하는데 일반적인 죽편이나 목편은 사용할 수 없었다. 갑골을 사용하기 전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알려 신명(神明)의 가지(加持)를 얻어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나타나는데 글을 적는 문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결코 작지 않은데 신명에게 가르침을 청한 문제를 적고, 신과 소통한 ‘종이’는 모두 특수한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신계(神界)에 보낸 문자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3천 년의 봉폐된 시간을 거쳐 갑골문이 다시 햇빛을 보면서 그 해답이 나왔으니 그것은 바로 한자(漢字)다.
가장 큰 문제는 사실 문제가 아닌데 상조인들이 직접 영물(靈物) 위에 새겨 신명에게 바친 것도 한자(漢字)였고 또 신명의 가르침 역시 갑골에 새긴 한자였다.
창힐이 글자를 창조하자 천지가 놀라고 귀신이 울었다는 말도 당연한 것이 원래 한자는 세속의 물건이 아니었고 창힐은 “나면서부터 글을 쓸 수” 있었다. 분명 신령(神靈)이 신물(神物)을 지니고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또 인간세상의 만상(萬象)을 보고 그것에 인간세상의 외투를 걸치게 하고 그것들을 다시 사람에게 전수했다. 천지귀신이 이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크게 진동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문자를 통해 신(神)과 소통하는 비밀통로를 지니게 되었다. 서양인들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음양오행(陰陽五行)도 중국인들은 척 보면 안다. 한자는 심지어 일(一), 이(二), 삼(三)도 아주 중시하는데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았다(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는 불과 몇 글자로 만상(萬象)을 두루 망라했다.
하늘은 정말이자 화하자손들을 너무나 편애했다.
참고문헌:
1. 《당신을 갑골문의 세계로 이끄는 은허갑골학(殷墟甲骨學 帶你走進甲骨文的世界)》
2. 《상서정의》
3. 《춘추원명포》
4. 《증정은허서계고석(增訂殷墟書契考釋)》
5. 《여씨춘추》
6. 《갑골학1백년(甲骨學一百年)》
7. 《갑골문자편(甲骨文字編)》
8. 《춘추원명포》
9. 《도덕경》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11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