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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운문사변’을 말하다

덕혜(德惠)

【정견망】

허운(虛雲) 스님은 근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승(高僧) 중 하나다. 그는 1840년에 태어나 1858년에 출가했는데 평생을 고생스레 수련하다 1959년에 열반했다. 그는 일생 동안 수많은 마난(磨難)을 겪었는데, 마지막으로 겪은 가장 큰 마난이 바로 ‘운문사변(雲門事變)’이다. 허운 스님은 1950년부터 1952년 4월까지 운문산(雲門山) 대각선사(大覺禪寺)에서 수련했고 또한 주지로 있었다. 이 기간에 공산당의 여러 차례 소란과 박해를 겪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운문사변’이다.

1950년 중공(中共)이 막 천하를 얻었다. 전통 왕조에서 집권 초기 백성들을 쉬게 하면서 민생을 회복했던 것과는 달리 무신론으로 출발한 중공은 권력을 잡자마자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해치기 시작했다. 이 해에 중국 공산당은 이른바 ‘토지개혁운동’과 ‘진반(鎮反)운동’을 시작했다. 운문산 대각선사는 전통사찰이라 사찰 토지가 있었다. 때문에 이 사찰 주지인 허운 스님은 ‘토지개혁운동’이 시작되자마자 현지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계급의 적이자 지주로 취급을 받았다.

중공은 처음에는 개별 농민들을 선동하여 산문(山門)에 표어를 붙이고, ‘청산(淸算)’할 때까지, 절의 옷 등의 물건을 가져가게 했고, 또 노스님을 핍박해 운문사가 그들에게 돈을 빚졌음을 인정하라고 하면서 차용증을 쓰라고 강요했다.

또한 당시 허운 스님 및 그 제자들과 사찰 승려들이 출가 전에 각종 일을 했는데, 그중에는 일찍이 중화민국 정부를 위해 일했던 사람이 있었다. 살인이 천성인 중국 공산당은 결코 ‘각자 주인을 위해 일한다’라는 도리를 말하지 않고, ‘진반운동’에서 국민정부를 위해 일했던 이들을 ‘역사 반혁명(反革命)’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되자 허운 스님은 반혁명분자를 은닉한 이른바 ‘죄인’이자 중공 ‘토지개혁운동’과 ‘진반운동’의 이중 공격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운동은 뒤로 갈수록 심해졌고 광범위한 고문과 자백을 강요했다. 중공은 허운 스님에게 다시 특무(特務 국민정부 첩자)란 모자를 씌우려 했다. 어떤 스님은 겁이 많아, 중공 요원의 유도 하에 절에 라디오, 권총 등이 숨겨져 있다고 헛소리를 했다. 이를 근거로 중공 공안국은 사찰에서 라디오, 권총, 황금 등 가능한 증거들을 조사하고 스님들을 멋대로 구금하고 고문했다.

운문사변은 처음에는 소란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경제적 박해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인신박해로 번져 스님들이 모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특히 1951년 12월 중공은 각지에 이른바 제4차 전국공안회의 결의를 관철해서 2단계 진반 공작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고, 진반 및 토지개혁을 반드시 결합하라(역주: 지주나 자본가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강력하게 탄압하라는 의미)고 요구했다. 허운 스님과 운문사는 또 다시 박해의 절정에 직면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운문사변의 전반적인 배경이다.

이런 위태롭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허운 스님과 진정으로 수행하던 많은 불제자(佛弟子)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신앙을 확고히 하는 것 외에 적극적으로 외부로 소식을 전달하고, 문제를 반영했으며, 무고하게 박해당한 진상을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 대만 국립역사박물관에는 허운 스님이 중공의 박해를 받은 경과를 구술해 제자들이 기록해서 ‘제경일송(諸經日誦)’의 내피 속(제본 안쪽)에 비밀리에 숨겨둔 자료가 있다. 이 기록은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를 통해 자유세계에 처음으로 종교박해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언론 매체들이 광범위하게 주목하면서 중공 측에 일정한 압박을 가했다.

박해가 고조되는 가운데 허운 스님은 이제 큰 재앙이 올 것임을 알았다. 이에 만약 북경에 가서 해결하지 않으면 전체 사찰의 승려들이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 이에 모두를 불러 방장실에서 회의를 열고 누군가 북경에 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길 바랐지만, 여러 승려들이 협박에 겁을 먹고 아무도 갈 수 없었다. 허운 스님은 매우 초조했다.

사태가 매우 위급할 때, 한 승려가 나서 자신이 가겠고 말하고, 의연하게 북경으로 갔다. 그는 중공 요원들을 속이고 몰래 도망쳐 먼저 무한(武漢)에 가서 진명추(陳銘樞)를 만나고 북경에 가서 이제심(李濟深)을 만났다. 진명추와 이제심 등은 모두 중화민국 시대 유명한 인물들로 당시 모두 중공의 통일전선 대상으로 일부 표면적인 직책을 받았다. 이제심이 이 일을 안 후, 즉시 당시 중공 총리를 찾아갔다.

중공 총리가 들은 후 허운 스님을 보호할 것을 요구했고, 또 사람을 보내 북경으로 호송하게 했다. 이에 따라 허운 스님은 1952년 4월 27일 운문사를 떠나 입경함으로써 운문사변은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스님은 훗날 회고하기를 두 사람이 북경에 동행해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광동(廣東)을 나가기도 전에 다른 한 명이 중공에 발각되어 맞아 숨졌다고 했다.

허운은 대외적으로 진상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중공 상부에서 파견된 이른바 조사단을 상대로도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사변을 직접 겪은 한 법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중앙에서 대표를 운문사에 파견했는데 덩치가 큰 한 사람이 노스님(허운 스님을 말함 이하 동일)에게 ‘노스님, 우리는 북경 중앙의 X주석이 보낸 사람들인데 이곳에 와서 특별히 이곳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아이고, 우리를 살려줄 은인이 오셨구나! 빨리 불러와라.’라고 했다. 광동성의 그 우두머리들, 해당 현 현장(縣長)과 공안국 국장 등 이곳 지방 정부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서서는 감히 자리에 앉지 못했다.

노스님은 중앙의 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 공안국장이 말했다.

‘노스님, 저는 단지 당신을 두 번 당신을 검사했을 뿐입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아니오, 검사는 처음부터 오늘까지 열여덟 번이나 검사하지 않았소. 열여덟 번 검사했고 나를 방안에 가두고 이 곳간과 객당을 모두 봉인했으며 우리 이 스님을 선당(禪堂) 안에 가두어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갔소. 밖에 있는 그 공안대대는 위타전 앞에 기관총 두 개를 설치했고, 마치 범인 다루듯이 만약 화장실에 가려면, 양쪽에서 몇 명의 공안원이 총을 들고 서서 화장실 안을 노려보았고, 하루에 두 번만 보내 감옥보다 더 긴장하게 하지 않았소!’

노스님은 또 한마디 말을 했다.

‘이 스님과 비구니를 한 방에 가두기도 했소.’

그러자 중앙에서 파견된 사람이 탁자를 치면서 성과 현 간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래의 여기 동지들은 징계를 받아야겠소!’”

바로 허운을 중심으로 한 진수(眞修) 스님들이 용감하게 박해 진상을 직접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결국 중공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박해 수위를 낮췄으며 마침내 표면적으로는 운문사변이 종결되게 했다. 사변 기간에 허운 노스님은 또 한 번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이 역시 언급할 가치가 있다.

한번은 중공 공안의 검사에서(사실은 가택수색, 협박, 고문까지 포함하여 이러한 ‘검사’는 위에서 최소 18번임을 알 수 있다). 허운 스님은 방장실에 구금되었다. 여러 사람을 보내 그를 지키게 했다. 이어서 다른 스님들을 선당과 법당에 각각 감금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수색하기 시작했는데, 위로는 대전의 지붕, 아래로는 당 아래 벽돌, 그리고 부처님 금상, 법기, 경을 넣어둔 장까지 모두 이 사람들이 수색하여 훼손했다.

그렇게 이틀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스님을 붙잡아 고문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며칠 동안 26명을 잡아갔는데 그 중 한 명이 맞아 죽었다. 이렇게 열흘을 들볶아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이 사람들은 허운 스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3월 1일, 그들은 허운 스님을 다른 방에 가두고, 문과 창문을 닫고, 음식과 물을 주지 않으며, 물론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3월 3일, 10명의 중국 공산당원이 방에 침입하여 허운 스님에게 황금과 은, 총기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허운 스님이 “없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스님을 심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각목으로, 이어 쇠막대로 허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렸고 갈비뼈도 부러뜨렸다. 그들이 악을 행할 때 허운 스님은 가부좌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보지 않았으며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악당들은 하루 동안 허운 스님을 네 번 때렸고, 결국 그를 땅에 쓰러뜨렸다. 그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떠났다.

3월 5일에도 허운 스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때렸다. 밤이 되자 지키던 제자가 허운 스님을 끌어안아 앉히자 허운은 단정하게 앉아 입정(入定)했다. 3월 10일 아침이 되자 석가모니불의 열반상과 같이 점점 옆으로 누워 하루 종일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지키던 제자가 초를 허운 스님의 코끝에 놓고 확인해보니 숨이 이미 끊어진 것을 발견했다. 허운 스님의 좌우 맥을 짚어도 맥이 없었다. 그때도 허운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고,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다음날 새벽, 지키던 제자는 문득 허운 스님이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뜬 것을 발견했다. 제자는 그에게 숨이 끊어진 지 하루가 지났다고 했지만 허운은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는 즉시 제자에게 자신이 하루 동안 겪은 경험을 기록하게 했고,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해서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다음은 허운 스님의 말이다.

“나는 꿈속에 도솔천(兜率天) 내원(內院)에 갔다. 그곳은 장엄하고 화려했는데 일체가 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륵(彌勒)께서 법좌에 앉아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자리 앞에는 듣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그 중 십여 명은 전에 알던 분들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니 그들은 동쪽에서 세 번째 빈자리를 가리키며 나더러 앉으라고 표시했다. 아난(阿難) 존자가 나와 아주 가까이 앉아 있었다.

미륵의 설법을 다 끝내기도 전에 미륵께서 나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자네는 마땅히 돌아가야 하네.’

내가 여쭤보았다.

‘제자의 업장(業障)이 깊으니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미륵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업연(業緣)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반드시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오거라.’

미륵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고해에서 자비로 항해하며 물러서지 말라. 연꽃이 진흙에 피어나면 불타가 단정히 앉아 있노라(苦海慈航 毋生退卻 蓮開泥水 端坐佛陀)’”

그래서 허운 스님은 불계(佛界)에서 인간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생명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허운의 원신이 몸을 떠나 다른 공간에 가서 본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는 원신이 있고, 원신은 육체처럼 죽지 않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무신론은 잘못된 것이다.

또 수행의 관점에서 보자면, 허운의 원신이 몸을 떠난 후 미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행이 있는 고승임을 증명한다. 또한 그가 박해 진상을 널리 알린 행위가 옳았음을 증명하는데 다시 말해 미륵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때문에 미륵이 “고해에서 자비로 항해하며 물러서지 말라. 연꽃이 진흙에 피어나면 불타가 단정히 앉아 있노라”라고 한 것이다.

이상 운문사변 상황을 대략 소개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오늘날 파룬궁(法輪功) 수련생들의 위대한 행동이 떠올랐다. 파룬궁은 파룬따파(法輪大法)라고도 불리는데 기공(氣功)의 형태로 전해진 불문(佛門)의 수련대법(修煉大法)이다. 파룬궁은 사람을 제도하는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수련생들 중에 병을 물리쳐 몸이 건강해지고, 도덕이 회복된 실제 사례가 보편적으로 나타났으며 또 수많은 백성들이 파룬궁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당시 중공 두목 강택민(江澤民 장쩌민)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질투로 인해 1999년 7월 수중의 권력을 총동원해 파룬궁을 불법으로 박해했고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이 사악한 박해 속에서 중공은 파룬궁을 모함하기 위해 수많은 거짓말을 퍼뜨렸고,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신앙과 수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백여 가지의 고문을 가했으며, 가족과 친지들을 연루시켰으며 심지어 산채로 장기를 적출한 뒤 시신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중공의 사악한 정도와 박해 규모는 당시 허운과 운문사 승려들에 대한 박해를 훨씬 능가한다.

그렇다면 이런 박해 앞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마음속으로 신념을 더욱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나섰다.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겹겹의 봉쇄를 뚫고 북경에 가서 관련 지도부 및 부서를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도 셀 수 없이 보냈다. 그러나 이번 박해가 중공 최고 두목의 지시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박해가 중단되지 않았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또 중공이 독재정권임을 똑똑히 보았고 당 두목의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파룬따파는 위대한 불법(佛法)이자 우주의 법(法)이기 때문에, 사람 마음에 대법(大法)에 대해 저촉되는 사념(邪念)이 있으면 미래 우주에 발을 붙이기 어렵고, 생명이 장차 슬픈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일반 대중들에게 파룬궁의 진상을 알렸고 중공이 대법을 무함한 거짓말을 폭로해 중생의 머릿속에서 대법에 반대하는 악념(惡念)을 없애기 시작했다. 그들은 박해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각자의 계층, 생활, 근무환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상을 전하고 거짓말을 폭로했다. 설사 중공의 불법 감금으로 자유를 잃은 수련자들조차 역시 특수한 환경 속에서 여전히 진상을 알리고 있다.

이들이 진상을 분명히 알린 장거는 당시 허운 및 운문사 스님들의 행동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들이 미래에 성취할 것은 전례 없던 위대한 위덕(威德)이 될 것이며, 영원히 환우(寰宇)에 빛나고 역사책에 길이 빛날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명심하기 바란다.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

대법을 선하게 대하면 미래에 행복과 평안이 있을 것이다.

사실 역사란 신(神)이 배치하신 것으로 역사의 모든 것은 신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오늘날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허운 스님 등이 운문사변에서 박해받은 진상 알리기를 견지한 것은 이미 후대에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상을 똑바로 알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자칭 불교 신자라는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는 행위를 반대하는데 이에 저자는 특별히 허운 스님 등이 박해를 받을 때 했던 일을 말해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는 역사의 증인으로 삼았다. 동시에 또 우리 모두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절대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을 믿지 않기를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