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古峰)
【정견망】
소옹(邵雍 1012-1077 소강절)은 북송시기 역학(易學) 대가로 본관은 범양(范陽 지금의 하북성 탁주涿州)다. 일찍이 이지재(李之才 자가 정지挺之)를 스승으로 모시고 《하도》, 《낙서》, 《주역》, 《팔괘》를 연마해 배움에 큰 성취를 이뤄 고금에 통달했다.
《매화시(梅花詩)》를 써서 후세 약 천년에 가까운 변천을 예언했는데, 실로 북송의 기재(奇才)라 할 수 있다. 북송의 유명한 성리학자 정호(程顥)는 일찍이 “요부(堯夫, 소옹의 자),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의 덕을 쌓고 밖으로는 왕의 도리를 행한다는 뜻)의 학문”이라고 찬탄했다. 그러나 소옹은 평소 처신이 겸손하고 예의가 발랐으며 한가하면서도 고상했다.
송나라 인종(仁宗) 선화(宣和) 연간에 부필(富弼)과 문언박(文彦博)이 동시에 재상이 되었다. 마침 두 사람 다 소옹의 절친한 친구라 그를 조정에 천거했으나 소옹은 벼슬을 사양했다. 나중에 조정에서 천하의 은자 중에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천거해달라고 요청하자 두 사람은 다시 소옹을 천거했다. 하지만 소옹이 다시 거절했다.
나중에 신종(神宗)의 희녕(熙寧) 연간에 세 번째로 조정에서 소옹을 불렀으나 역시 거절했다. 즉 소옹은 평생 조정에 들어가서 벼슬을 한 적이 없고, 절세의 재능과 학문을 지니고도 직접 농사짓는 생활을 하며 즐겼다.
그는 일찍이 지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생 눈살 찌푸릴 일 하지 않았으니
천하에 마땅히 날 미워하는 사람 없으리
잘라져 떨어진 꽃에 비가 무슨 소용 있고
낡은 물건 꾸며본들 어찌 봄을 맞이할까?
다행히 요순(堯舜) 같은 참 임금을 만났으니
소보나 허유 같은 이도 지방관으로 밀려나네
육십 병자의 몸 분수를 알아야 하니
감사가 고달프게 개진할 필요 있으랴.
平生不作皺眉事,天下應無切齒人。
斷送落花安用雨,裝添舊物豈須春?
幸逢堯舜爲真主,且放巢由作外臣。
六十病夫宜揣分,監司何用苦開陳。
[역주: 여기서 소보와 허유는 요임금이 제왕의 자리를 물려주려다 거절당한 은자의 이름이다. 소강절 선생은 이 시를 통해 태평성대라서 수많은 인재들이 기라성처럼 많은 데 굳이 자신이 조정에 들어가 벼슬을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
강자발(姜子發)과 장중빈(張仲賓)이 태학(太學)박사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소옹에게 아내를 맞이할 것을 권했다. 소옹이 노부모를 봉양하느라 45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옹은 우리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아내를 맞을 수 없노라고 대답했다.
이에 강자발이 왕씨 성을 가진 자기 친구의 누이가 어질고 지혜롭다면서 중매 설 것을 자처했다. 또 장중빈은 혼사에 필요한 예물을 자발적으로 준비해주었다. 소옹이 흔쾌히 이들의 청을 수락하자 4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내를 얻고 아들을 낳았다.
소옹은 비록 덕망이 아주 높고 커서 당시 유명한 큰 선비들(가령 사마광, 부필, 여공저, 장재, 정호, 정이 등등)과 두루 사귀었지만 줄곧 소박하고 간단한 생활을 유지했다. 나중에 왕선휘(王宣徽 낙양 부윤), 부필, 사마광 등 여러 공(公)들이 돈을 모아 낙양에 소옹을 위한 저택과 장원을 마련한 후 그를 청해 왔다. 소옹이 흔쾌히 가서 이 집을 받았고 집 이름을 ‘안락와(安樂窩 편안하고 즐거운 집이란 뜻)’라 이름 지었다.
집은 사마광 명의였고 정원은 부필 명의였으며 장원은 왕선휘 명의였다. 나중에 소옹이 시를 한 수 지어 “장원을 사준 여러 선비들에게 거듭 감사드리니 낙양 성안에 숲과 샘이 생겼노라. 칠천 걸음이면 강물에 닿고 20여 집에서 다퉈가며 돈을 냈다네.”라고 노래해 자신을 도와준 친구들의 우정에 감사했다.
소옹은 또 《희락음(喜樂吟)–기쁘고 즐거워 읊다》란 시를 지어 낙양에 거처하는 소감을 적었다.
태어남에 5가지 즐거움 있고
낙양에 거주함에 5가지 기쁨 있네.
사람은 흔히 일상을 가벼이 여기고
특별한 일로 여기지 않노라.
내 재주는 뛰어난 바가 없고
내 지식은 기록할 게 없지만
그 태연한 마음만은
어찌 비할 사람이 있겠는가?
生身有五樂,居洛有五喜。
人多輕習常,殊不以爲事。
吾才無所長,吾識無所紀。
其心之泰然,奈何人了此。
여기서 다섯 가지 즐거움이란 중국에 태어난 것, 남자로 태어난 것, 선비가 된 것, 태평성대를 만난 것, 도의(道義)를 즐겨 듣는 것을 말한다. 다섯 가지 기쁨이란 착한 사람 보기, 좋은 일 보기, 아름다운 물건 보기, 좋은 경치 보기, 성대한 예악(禮樂) 보기를 말한다.
소강절은 이렇게 동토(東土) 대송(大宋)에 태어나 마침 태평성대를 만났고 오로지 대도(大道)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배움에 성취가 있었으니 진실로 기쁘고 축하할 만하다.
매년 봄과 가을이 되면 낙양의 기후가 쾌적했다. 소옹은 이럴 때면 늘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다. 사람들은 소강절 선생이 온 것을 보면 모두들 급히 마중을 나와서는 기쁘게 말했다.
“우리 선생님께서 오셨다.”
또 식사를 준비해 선생을 청해 모셨고 집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모두 선생께 말씀드렸다. 그러면 선생께서는 그들을 도와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소옹의 저택 양식을 모방해 전적으로 선생이 머물 수 집을 지었는데 이를 ‘행와(行窩 임시 거처)라 했다. 당시 낙양성 안에 이런 행와가 십여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소옹은 일찍이 《작은 수레로 다니다》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술을 좋아하니 어찌 천일주가 없으랴
겨울을 아쉬워마라 또 사계절에 꽃이 있다네
작은 수레로 다니는 곳마다 사람들이 기뻐하니
낙양성 안이 온통 내 집과 같구나
喜醉豈無千日酒
惜冬還有四時花
小車行處人歡喜
滿洛城中都似家。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옹이 아무 연회에나 참석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가 쓴 《사사음(四事吟)》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가지 않는 네 곳과 나가지 않는 네 때가 있네.”
여기서 ’가지 않는 네 곳‘은 관공서에서 하는 공식 연회, 생일잔치, 장례식, 주연(酒宴 술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나가지 않는 네 때‘란 아주 춥거나 아주 덥거나 큰 바람이 불거나 큰 비가 내릴 때를 말한다.
소옹의 학문은 천지에 통달했지만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명리에 담담했고 부귀영화를 꾸미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대로 전해져오는 소옹의 명작 《매화시》 마지막 몇 구절을 다시 감상해보자.
一院奇花春有主, 뜰 안의 기묘한 꽃 봄은 주인 있으니,
連宵風雨不須愁. 온 밤의 비바람 걱정해 무엇하리.
數點梅花天地春, 몇 송이 매화 꽃 천지가 봄이라,
欲將剝復問前因. 장차 박복이면 이전 까닭 물으리라.
寰中自有承平日, 천하에 화평한 날 스스로 있으리니,
四海爲家孰主賓. 사해가 집인데 그 누가 주객인고.
아마 이 시에서 묘사한 봄과 화평한 날이 그리 멀지 않을지 모른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