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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국대도(治國大道) 5: 무엇이 중국인가

이도진(李道真)

【정견망】

5. 무엇이 중국인가

중국에서는 역조역대(歷朝歷代) 황제가 설립한 것은 단지 조대(朝代)였지 나라(國)가 아니었다. 그들이 세운 것은 모두 단지 조대명(朝代名)이었지 국명(國名)이 아니었다. 현존 문헌 중에서 일찍이 주조(周朝)가 건립된 초기에 ‘중국(中國)’을 자칭한 후 역조역대로 늘 중국을 자처해왔다. 제아무리 조대가 교체될지라도 설사 이민족이 침입해 중원의 주인이 되어 건립한 조대라 해도 국명은 줄곧 중국(中國)이었고 천조(天朝)를 자처한 것은 종래로 변경된 적이 없었다.

중국은 의식형태상에서 구체적인 국가 개념이 아니며 그것의 의미는 ‘중앙의 나라(中央之國)’란 뜻으로 중토(中土), 신주(神州), 중화(中華)로도 불린다. 그것의 핵심 내함은 바로 신(神)이 선정한 정통 중화신전문화(中華神傳文化)를 계승한 지방이란 뜻이다.

선진(先秦)시기 제도에 따르면 천자의 나라(天子之國)가 대지 중심 위치에 위치하며 이곳이 천하의 중심이자 경제・문화・정치 등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 즉, 신전문명(神傳文明)의 소재지로 천하 사방에 문명교화(文明敎化)를 시행하는 근본이다. 천자의 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천자의 나라를 둘러싼 사방 구역을 거리에 따라서 나눴다. 5백리를 경계로 해서 5개의 각기 다른 구역으로 나눠 서로 다른 정책과 교화를 시행했는데 이를 오복(五服)이라 한다.

《상서(尚書)•우공(禹貢)》에서는 이를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이라 했다.

《상서‧우공(禹貢)》에 따르면 대우(大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한 후 천하를 다시 구주(九州)로 나누고 오복제도를 제정했다. 천자의 도성 밖 사방 5백리를 전복(甸服)이라 하는데 이 구역에서는 주로 농업생산과 세금 납부를 책임져 천자를 부양했다. 즉, 천자가 곡물을 세금으로 받는 지역이다. 도성에서 백리 이내의 지역은 볏단, 백리에서 2백리 사이는 곡식의 이삭, 2백리에서 3백리 사이는 곡식의 낟알, 3백리에서 4백리 사이는 현미, 4백리에서 5백리 사이는 곱게 찧은 쌀(백미)을 부세로 바치게 했다.

또 전복(甸服)을 둘러싼 바깥 5백 리 지역을 후복(侯服)이라 하는데 이곳은 천자 및 천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노역을 바치는 곳이다. 전복에서 가까운 백리는 경대부(卿大夫)의 채읍(采邑)이고 2백리는 작은 봉국(남작의 나라), 3백리부터 제후의 봉지로 삼았다. 또 전복에서 가장 가까운 백리는 천자를 위해 노역하고 2백리는 국가에서 일하는 관리를 위해 노역하며 3백리는 정찰업무를 맡았다.

또 후복(侯服)을 둘러싼 바깥 5백 리를 수복(綏服)이라 하는데 천자가 교화하는 지역이다. 이중 후복에 가까운 3백 리는 예악과 법도, 교육 등을 실시하고 그 바깥 2백 리는 무위(武威)를 떨쳐 천자를 지킨다.

수복(綏服) 바깥 5백 리 지역을 요복(要服)이라 하는데 천자에게 복종하는 지역이다. 수복에서 가까운 3백 리는 교화를 준수하고 평화롭게 지내며 그 바깥 2백 리는 왕법(王法)과 조약을 준수한다.

요복(要服) 바깥 5백리 지역을 황복(荒服)이라 하는데 천자를 위해 변경을 지키는 지역이다. 요복과 가까운 3백 리는 예속관계를 유지하며 그 바깥 2백리는 조공 여부가 정해지지 않아 유동적인 곳이다.

천자는 이 모델에 근거해 안쪽에 있는 지역부터 바깥 번국(藩國)에 이르기까지 층차적으로 천하를 관리하고 등급에 따라 문명교화를 시행하고 아울러 문치(文治)와 무위(武衛)를 일으켜 신전문명의 교화가 사방의 미개하고 황량한 곳까지 영향을 미치게 했다. 이 방식은 또한 중화 역조역대 치국모델에서 하나의 원본이 되었다.[23]

중화신전문화의 개념 중에 군권신수(君權神授 신이 임금의 권한을 주었다는 뜻)를 말하는데 천자(天子)란 하늘의 아들로 하늘이 선정한 인간세상의 대표이다. 그는 뭇신(衆神)을 대표해 인간세상에서 하늘의 뜻을 대표하며 천하에 신(神)의 교화를 시행한다. 그러므로 천자의 나라가 바로 중국(中國)이며, 그것은 중화문화의 정통(正統)과 연원을 대표하며, 천하 사방 구역을 총괄하는 조당(朝堂)이다. 신주대지 위에서 역조역대로 그 영토의 크기나 인종적인 차이를 막론하고 오직 중화신전문화의 정통을 계승하기만 했다면 바로 중국이며 그 제왕이 바로 하늘이 선택한 천자다.

중화 역사는 황도(皇道)에서 기원하며 그 후 제도(帝道), 왕도(王道), 패도(霸道)에 이르렀고 진시황에 이르러 대일통(大一統)의 황제왕조가 시작되었다.

‘황(皇)’이란 직접 하늘(天)과 신(神)을 대표하는데 신(神)의 신분으로 세상에 내려와 직접 신적(神跡)을 펼쳐 화하(華夏)선조들에게 신의 지혜를 전수하고 중화신전문화의 근원을 열었다.

‘제(帝)’는 비록 ‘황’처럼 신통(神通)이 광대하진 못하지만 역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상태로 출현해 직접 천지신령(天地神靈)과 소통할 수 있었고 천지신령의 뜻을 대표해 신적을 행사해 중화신전문화 체계를 계속 완벽하게 하고 건립했다. 오제 중 전욱제(顓頊帝)에 이르러 천지가 단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인류와 신의 직접적인 소통과 연계는 단절되었고 사람은 곧 하늘과 신에서 갈수록 더 멀어졌으며 제왕과 범인(凡人 일반인)은 갈수록 더 접근했으며 중화신전문화는 이때부터 인문(人文)시대로 진입했다.

왕도(王道)시기에 들어온 후 제왕(帝王)은 곧 완전히 범인(凡人)의 상태로 출현했으며 그들은 더는 직접 천지신령과 소통할 수 없게 되었고 직접 신적(神跡)을 펼쳐낼 수도 없었다. 다만 중화신전문화란 이 핵심을 통해 천진신령과 연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면 제사와 점복(占卜), 천상(天象) 등의 방식으로 천지신령과 소통해 계속해서 인간세사에 천의(天意)를 행사하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인물이 되었으며 인간세상에서 뭇신과 하늘의의 대변인이 되었다. 중화신전문화란 이 맥락(脈絡)은 중화역사 전체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해 장차 인간세상에서 전반 우주체계와 대응하고 연계해 하늘의 의지와 교화를 대표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중국과 중화민족 등 개념의 핵심이 담겨 있다.

오직 중화신전문화란 이 맥락과 단절되지만 않는다면 신주대지(神州大地) 위에서, 조대(朝代)・강역(疆域)・정권(政權) 등의 요소가 어떻게 변화하든지 중국은 늘 영원히 존재하며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상 일찍이 여러 차례 이민족이 중원에 들어와 주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중화신전문화에 동화해 의발을 계승했기 때문에 중국은 여전히 건재했다.

하지만 지금 중화를 차지한 공비(共匪 공산비적)들은 극권으로 중화신전문화의 맥락을 파괴하고 단절시켰기 때문에 그것은 중국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 마르크스레닌주의 사교(邪敎)가 우리 중화신주대지에 부체(附體)한 것이다! 마치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해 조종하는 것처럼 장차 우리 신주중화(神州中華)를 좀비로 전락시킬 것이다.

중국인은 반드시 누가 중국인지 똑똑히 간파해야 하며 공산사당(共產邪黨)이 어릴 때부터 주입한 독소(毒素)를 숙청하고 중화신전문화의 혈맥을 다시 연결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몰아내고 중화를 부흥시켜야 한다!

중국은 하늘이 선정한 신전문화(神傳文化)를 전승한 지방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을 선택해 중국을 다스릴 것인가는 그 영향이 지극히 중대하다. 하늘은 반드시 중국을 다스릴 방식을 역사 속에 잘 다져놓고 중화신전문화의 맥락 속에 흡수해 역대 제왕들이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을 것이다.

동주(東周) 시기는 치국의 도를 다진 최후의 성숙기이자 총결기였다. 이때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나타나 여러 가(家)의 치국(治國)학설이 백화제방하면서 정화적인 것과 찌꺼기가 서로 뒤섞였다. 진조(秦朝)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최초의 대일통(大一統) 왕조를 건립했을 때 여러 가의 치국학설은 모두 이미 성숙된 상태였다. 최종적으로 완비된 체계를 형성해 독립적으로 치국에 사용할 수 있는 학설은 바로 도가(道家)・유가(儒家)・법가(法家)였다.

도가치국(道家治國)은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주장하는데 황도(皇道)와 제도(帝道)가 도가치국범위에 속한다. 유가(儒家)는 인의를 시행하고 예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왕도(王道)를 주장했다. 법가는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을 중시하고 강권(强權)과 무력으로 천하를 위력으로 복종시키니 패도(霸道)를 주장했다.

진조(秦朝)의 건립은 중국역사상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진시황은 이 때문에 ‘조룡(祖龍)’ 또는 ‘시황제(始皇帝 최초의 황제)’로 불린다. 진조는 주로 패도(霸道)를 사용했는데 치국방식이 법가에 치우쳐 있었다. 하지만 진조의 운명은 아주 짧아서 겨우 십여 년 만에 멸망했다.

진이 멸망한 후 한조(漢朝)가 건립되었는데 다년간 전쟁을 치르느라 초기에는 국력이 아주 쇠약하고 민생이 피폐했으며 생산도 황폐화되었다. 때문에 한조(漢朝) 초기에 도가치국을 주장해 무위의 다스림(이때 무위의 다스림은 진정한 의미의 무위의 다스림은 아니었다)을 제창하고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며, 세금과 요역을 줄이고, 청정하고 검약하는 등의 치국방침을 제정해 백성들에게 충분히 휴양하며 자식을 많이 낳게 유도해 생산을 회복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화했다. 때문에 문경(文景)의 치를 지나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러 한조는 이미 전성기에 도달했고 국력도 아주 강해졌다. 한무제는 백가(百家)를 몰아내고 오직 유술(儒術)만을 존중해 주로 유가를 사용했고 중화치국 중에서 유가사상의 주도적인 지위를 확정짓고 중화역사상 ‘외유내도(外儒內道)’의 치국모델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역조역대에서 모두 ‘외유내도’의 치국방식이 주도했다. 즉, 밖으로는 유가를 사용하고 안으로는 도가를 사용했는데 청조(淸朝)가 끝날 때까지 줄곧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때로 패도(霸道)를 겸해서 사용했다. 예를 들면 한선제(漢宣帝)가 태자(훗날의 원제)를 가르칠 때 “한조의 제도는 마땅히 왕도와 패도를 겸해야 한다”고 했다.

이상이 중화치국의 대체적인 발전맥락이다.

주:
23. 《尚書•禹貢》:五百裡甸服:百裡賦納總,二百裡納銍,三百裡納秸,服四百裡粟,五百裡米。五百裡侯服:百裡采,二百裡男邦,三百裡諸侯。五百裡綏服:三百裡揆文教,二百裡奮武衛。五百裡要服:三百裡夷,二百裡蔡。五百裡荒服:三百裡蠻,二百裡流。東漸于海,西被於流沙,朔南暨聲教訖於四海。

24. 《漢書•元帝紀》:漢家自有制度,本以霸王道雜之,奈何純任德教,用周政乎!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42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