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穀雨)
【정견망】
《서유기》가 수련인의 이야기와 수련의 이치에 대해 명확히 말했다면, 사대 명작의 으뜸으로 꼽히는 《홍루몽(紅樓夢)》의 배후에는 또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을까?
《홍루몽》이 이룩한 성취는 단순히 인물 형상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배치하며 사회 풍속을 전면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여준 것에 있을 뿐만 아니라, 《홍루몽》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바로 그 심오한 주지(主旨 취지 내지는 중심 사상) 표현에 있다.
왜냐하면 《홍루몽》은 내용이 너무 풍부하고 호번(浩繁)하기 때문에 심지어 ‘홍학(紅學 역주: 전문적으로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장르가 나타났을 정도다. 《홍루몽》의 주제에 대해서도 역대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홍루몽》의 영향은 왜 이렇게 깊고 또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주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저 《홍루몽》 안에서 빙빙 돌게 되는데 다시 말해 ‘홍루(紅樓 붉은 누각은 원래 저택에서 여성들이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속세로도 볼 수 있다)’를 뛰쳐나와 ‘몽(夢)’을 볼 수 없다. 특히 현대인들은 흔히 소위 ‘역사적 한계’ 때문에 《홍루몽》에 대해 횡설수설하거나, 심지어 그 이론의 지도하에 ‘속편’까지 만들어냈는데 정말로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다.
한 문학 작품의 주지(主旨)의 높이는 그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사상적 경계(境界)와 완전히 일치한다. 또한 그렇게 높은 사상경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작가가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한 사상을 완전히 깨달아낼 수 없다. 《홍루몽》의 주제는 제1회에서 이미 상당히 분명하게 나오고 제5회에서 진일보로 드러난다. 조설근의 삶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은 불도(佛道) 양가(兩家)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즉 조설근은 수련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고 있다. 당연히 그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한 가지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이 《홍루몽》을 인식하는 기초이자 전제다. 저자는 제1회 서두에서 “이번 회에서 무릇 ‘꿈(夢)’이나 ‘환(幻)’ 등과 같은 글자를 쓴 것은 독자들의 안목을 일깨우기 위한 것으로 또한 이 책을 쓴 취지이기도 하다”라고 명확히 썼다. 절름발이 도인(道人)의 〈호료가(好了歌)〉와 견사은(甄士隱)의 오묘한 풀이는 인생에 대한 수련자의 견해를 아주 분명히 보여준다. 외부인이 보기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치 미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도인은 몇 마디 말로 견사은을 제도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명리(名利)의 마당에서 뒹굴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가?
《홍루몽》을 말하자면, 제5회에서 조설근은 이미 전체 작품의 인물과 배치에 대해 개괄하고 배치했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이 책에 대해 이미 통달했음을 볼 수 있으니 그가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은 사실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이미 이 작품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다시피 “열 번을 읽고 다섯 번을 첨삭했다.” 만약 작품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면 “첨삭”이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작품 일부가 유실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웃음거리가 아닌가? 만약 우리가 완전히 저자의 사상경계에 서서 저자의 의도를 바라본다면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물질 세계를 가장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소위 모든 것이 다 환상(幻象)이고 몽환(夢幻)이란 것이다. 인생은 가장 무상(無常)한 것이다. 사람이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그러나 불가에서 보기에 사람 속의 복(福)은 진정한 복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은 원래 고생을 겪기 위해 사람 속에 온 것으로 수련하는 목적이 바로 자신을 해탈시키고 승화해서 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 속에 어디 원만(圓滿)한 일이 있는가? 인생은 본래 흠결이 있는 것으로 설령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해도 역시 흠결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갈망과 추구는 끝이 없기에 기껏해야 어느 한 상태에 머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수련자들이 말하는 ‘청정(淸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때문에 속인사회에 대해 말하자면 ‘완전’이란 일시적이고 ‘흠결’이 영원한 것이다. 사람은 바로 사람이라 영원히 흠결된 것 속에서 완전한 것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다 원만한 결말을 얻고자 함은 그저 자신의 감정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젠가는 가족이 된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사람의 일방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설령 정말 뜻대로 소원이 이뤄졌다 해도 역시 수련자가 보기에 ‘아름다운 원만’은 아니다.
누군들 《홍루몽》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왜 80회까지만 쓰고 갑자기 사라지는가? 그래서 많은 호사가들은 책 속 등장인물의 성격을 감안해 전체 줄거리 흐름에 따라 또 다른 ‘속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조설근의 입장에서 보자면, 책속의 일체 배치는 모두 적절하게 펼쳐진 것으로, 그는 당연히 이렇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책을 전부 완성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처리했는가? 그가 일부러 상식적인 이치에서 벗어나서 굳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한 것일까? 이는 불가능한데 그의 사상경계는 일반인을 멀리 멀리 초과했다.
그가 이렇게 한 의도는 바로 그가 세간의 만상(萬象)을 꿰뚫어보았고, 심지어 더 아득히 먼 것까지 다 훤히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완전[全]’한 것을 보고 싶어함은 사람 마음으로, 글을 원만하게 쓰는 것보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다 표현한 후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더 낫다. 마치 인류에게 겁난(劫難)이 닥치는 것처럼 일순간에 중단된다. 이것이 작품의 주지를 표현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홍루몽》의 심오함은 조설근이 전체 책의 후반부를 가볍게 삭제한 것에서 일부를 엿볼 수 있다. 함부로 속편을 만드는 것은 실로 용두사미에 불과하니 마땅히 전부 버려야 한다.
사실 조설근의 배치에는 또 그만의 독창적인 이치가 있는데 이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해보자.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3/8/10/2777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