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穀雨)
【정견망】
그렇다면 사대 명작은 인류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어떤 특수한 사명을 갖고 있을까?
수련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전반 인류의 역사와 우주 변화는 일치하는 것으로 모두 법칙이 있는 것이다. 이번 차례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이미 성주괴멸(成住壞滅)의 전 과정을 거쳐 왔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말법(末法)’ 시기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세상에 내려와 법을 바로잡고 사람을 구도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역사가 축적한 모든 문화는 다 정법(正法)을 전하기 위한 기초를 다져준 것에 불과하다.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전수하신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제시하는 우주 법리는 오늘날 대법제자들의 수련실천을 통해 검증되었다.
다시 맨 처음 화제로 돌아가보자.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왜 지금 우리가 ‘말법(末法)’의 때에 있다고 말하는가? 이는 불교, 도교, 기독교는 물론이고, 각 민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을 포함해서, 그 어떤 수련방법이든 수련계에서는 모두 동일한 뜻을 표현한다. 즉 사람은 하늘에서 왔으며 자신이 지은 죄업(罪業 원죄라고도 함) 때문에 사람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때문에 비로소 각종 다양한 종교와 수많은 수련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윤회를 뛰어 넘어 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모든 신앙의 기본이자 인생 최고의 지향이다.
‘삼국’ 이야기는 오랫동안 유전(流傳)되어 내려오다가 나관중(羅貫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집대성됭 책으로 되었다. 약 백년에 걸친 복잡다단한 ‘의(義)’에 관한 이 이야기는 어찌하여 이토록 왕성한 생명력이 있는가? 사실 이 이야기가 유전되는 과정 중에 ‘의(義)’리를 인간 세상에 전파한 것이 아닌가? 중국인의 의(義)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신주(神州)’의 땅에서 발생한 특정한 내함을 지닌 역사적 사건은 모두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는 모두 명조(明朝)에 씌어졌는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사실 중화민족의 전성 시기는 대당(大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단지 영토의 넓이만이 아니라 문화, 백성들의 풍속(民風) 및 사회관리, 세계에 대한 영향 등을 종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청조(淸朝)나 중화민국 또는 중공이 집권한 지난 수십 년을 보자면, 중국에서 ‘의’에 관한 일을 언급하는 사람과 일이 없었겠는가? 설령 존재한다 해도 사람들이 ‘삼국’ 이야기처럼 그렇게 유전되진 않았을 것이다.
인성(人性) 역시 전반 사회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지금처럼 퇴화했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뉴스를 세계 각지에 동시에 퍼뜨릴 순 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영웅(英雄)이 자리할 공간이 없고, 또한 ‘의(義)’에 대한 표준 역시 점차 낮아지고 있다. 사실 좀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도덕 수준은 완전히 떨어졌고 인성(人性)의 이기심은 이미 사람의 ‘의’로운 절개[義節]를 훼멸시켜 버렸다.
특히 중공이 정권을 잡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개체로서 사람의 모든 것이 중공에 의해 독점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사상 깊은 곳에서 전통적인 ‘의’의 가치에 대한 지향은 더 이상 중공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심지어 청말 민국 초기에 구걸을 해서 의학(義學)을 설립했던 무훈(武訓)의 ‘의거(義擧 의로운 행동)’조차 비판받는데, 또 무슨 ‘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의(義)’는 갈수록 더 그저 하나의 글자로 되었고 그것이 마땅히 지녀야 할 내함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의’는 역사적으로 중국인이 지닌 고유한 일종의 문화적 특징으로 존재해왔다. 나관중은 ‘의를 풀어내어[演義]’ ‘의’를 전면적이고 투철하게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후인들에게 ‘의’의 가치를 분명히 제시해주었다. 때문에 지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의’에 대한 이해가 비록 강제로 제거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상 깊은 곳에서는 ‘의’에 대한 특유의 해석을 지니고 있다.
이야말로 중국인(中國人)이 중국인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은 현대 중국어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전해 중국인들이 지닌 특유한 문화적 내함을 분명히 아셨다. 때문에 비록 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가더라도 일단 사람들이 진정한 불법(佛法)을 접하게 되면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불성(佛性)이 깨어난다. 사람들이 대법의 홍대(洪大)하고 정심(精深)함을 이해하면서 사람들의 도덕의식이 날로 되살아났다. 때문에 대법이 박해당할 때 대법제자들은 대법에 대한 존중과 견정한 믿음으로 언제든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義)’거(擧)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다.
역사가 이 한 페이지를 넘어가면 사람들은 오늘날 대법제자들은 확실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의(義)’라는 한 글자만으로 대법제자들이 법을 실증한 장거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약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명의 본원에서 우러나온 대법에 대한 견정한 신념 때문이며, 그것은 한 생명이 그 어떤 이유도 지니지 않고 또 그 어떤 이유로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본성(本性)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대법(大法)’은 일체 생명의 근본이자 생명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3/8/11/277731.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