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제자
【정견망】
《서유기》에 손오공이 주자국(朱紫国)에서 국왕을 위해 처방을 내는 대목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역주: 제69회 심주는 밤새 약을 짓고 군주는 연석에서 요괴를 말하다]
팔계가 국왕의 처방에 대해 묻자 행자(行者 손오공)가 말한다.
“너는 대황(大黃) 1냥을 가져다가 약 절구에서 가루로 만들어라.”
그러자 사오정이 말했다.
“대황은 맛이 쓰고 성질이 차고 무독(無毒)하지만 약성이 가라앉아 뜨지 않으니 소통하되 지키지 않고 온갖 울체(鬱滯)된 것을 제거하고 옹체(壅滯)된 것을 없애주니 마치 화란(禍亂)을 가라앉히고 태평을 가져오는 것과 같아 장군(將軍 역주: 대황의 별명)이라 하죠. 이것은 뚫어주는 약이니 오랜 병으로 허약한 사람에게는 쓸 수 없어요.”
그러자 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현제(賢弟 아우)가 모르는 소리네, 이 약은 담(痰)을 없애고 기(氣)를 순조롭게 해 장속에 응체된 한열(寒熱)을 쓸어버릴 수 있다네. 내 일에는 상관하지 말고 자네는 가서 파두(巴豆) 1냥을 가져다 껍질을 벗겨 기름을 빼서 가루로 만들어주게.”
그러자 팔계가 말했다.
“파두는 맛이 맵고 성질이 뜨겁고 독이 있어서 심한 적체를 제거하고 폐부(肺腑 대장을 말함)의 오랜 한(寒)를 몰아내죠. 또 막힌 것을 뚫어주며 수곡(水穀)의 통로를 열어주니 그야말로 관문을 부수고 빼앗는 참관탈문(斬關奪門)의 장수라서 섣불리 사용해선 안 돼요.”
행자가 말했다.
“현제,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다. 이 약은 뭉친 것을 깨뜨리고 장을 순통하게 만들어 심장이 붓는 부종을 다스릴 수 있단다.”
여기서 사승(沙僧)의 대황에 대한 지식과 팔계의 파두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인 중의사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행자(行者 손오공)의 대황과 파두에 대한 인식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여기서 필자는 이런 인식이 꼭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왜 오공의 인식은 오정이나 팔계와 완전히 같지 않은가?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오공의 인식이 더 전면적(또 실제로 국왕의 병을 치료함)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인식의 차이는 바로 오공의 층차가 오정이나 팔계의 층차보다 높아서 동일한 사물에 대해 인식이 더 낫고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고대 중의(中醫)가 변이되어 지금의 중의학이 된 한 가지 주요한 원인이다. 그것은 바로 도덕의 타락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진정한 층차는 덕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도덕이 고상한 사람은 층차가 높아서 낮은 층차에서 요해할 수 없는 것을 자연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낮은 층차의 사람은 아무리해도 고층의 이치를 알 수 없다.
고대 중의는 덕(德)의 수양을 아주 중시했다. 그들은 자신의 의술(醫術)을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일종의 기술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전수자에 대한 요구도 아주 엄격해서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차라리 전수자를 두려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 필자는 90대 노중의(老中醫)를 뵌 적이 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쌀이며 기름 등 생필품을 주기도 했다. 또 처방을 낼 때도 늘 환자 처지를 고려해 가급적 저렴한 약재만 처방했다. 그는 진맥을 한번 하면 30분 이상 했다. 그의 환자들은 모두 큰 병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중환자들이었다. 뛰어난 의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더러 사회에 나설 것을 청하고 또 그를 스승으로 삼아 모시려 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필자 부친은 어깨 부위에 뼈가 웃자라서 두꺼워지는 증상이 나타나 온갖 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없었지만 그분의 치료를 받자 아주 간단하고 또 저렴한 소방(小方)으로 근치되었다.
[역주: 중국에서 중의사는 일반적으로 처방만 내리고 환자가 처방전을 근거로 약재상에 가서 자비로 약을 구입해 달여 먹는다. 만약 처방전에 고가의 약재가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약재가 들어가는 대방(大方)이면 환자가 부담하는 약값이 비싸진다. 때문에 저렴한 약재를 위주로 소량의 약재만 사용하는 소방(小方)을 처방한 것이다.]
지금의 중의사는 모두 대학에서 배출한 것으로 학생들 자신도 중의학이란 그저 대학에서 배우는 일종의 기술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 누구도 학생들에게 도덕 수양을 중시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누구도 의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의술과 도덕이 분리된 결과 지금의 중의학은 전반적으로 한 층차에 국한되어 앞서 언급한 그런 이야기는 볼 수 없고 그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방(秘方)에 의지해 현상 유지에 급급할 뿐 진정한 창신(創新)은 더욱 불가능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