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생(道生)
【정견망】
10. 문자의 변화
중화문자의 자형(字形)은 역사적으로 몇 차례 큰 변화가 발생했는데 이번 장에서는 이에 대해 개략적으로 정리해보자.
현재 우리는 창힐이 애초 만든 자형이 어떤 모습인지 모른다. 현재까지 전해진 가장 오래된 문자 판본은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이다. 이것들은 창힐이 글자를 만든 시기와는 이미 천년 이상 떨어져 있다.
갑골문은 상대(商代)에 거북의 등껍질과 짐승 뼈에 새긴 글자로 일반적으로 점복(占卜)의 결과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상대(商代)의 갑골은 약 10여만 편이며 이중 문자로 정리된 것이 3978개다. 현재까지 이미 확인된 갑골문은 약 900여개로 대부분 비교적 자주 사용하는 글자들이며 나머지 3천여 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금문(金文)은 진조(秦朝) 이전 각종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들을 가리킨다. 이들 청동기 중에는 악기(樂器)로는 종이 가장 많고 예기(禮器)로는 정(鼎)이 가장 많기 때문에 이를 또 종정문(鍾鼎文)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 출토된 금문 청동기는 8천여 개이고 중복되지 않은 글자는 3천여 개이며 이중 식별된 글자가 1800자 가량 된다.
주선왕(周宣王) 시기에 이르러 태사(太史) 주(籀)가 고문자를 수정해 주문(籀文)을 만들었다. 그러다 진시황(秦始皇)이 육국을 통일한 후 춘추전국 시기 분열국면이 워낙 오래되어 각국이 사용하던 자형(字形)에도 모두 일부 변화가 발생하거나 심지어 같은 글자임에도 제후국마다 쓰는 방법이 다 달라졌다. 진시황은 중화문자를 통일하기 위해 이사(李斯)에게 진나라 자형을 기초로 수정해서 소전(小篆)을 만들게 했다. 소전은 아주 짧은 기간만 사용되었고 한조(漢朝)가 들어선 이후 더는 사용되지 않았다. 《설문해자》에 수록된 소전은 9353자다.
소전보다 이전 시기 문자를 모두 대전(大篆)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주문, 금문, 갑골문 등은 물론이고 창힐이 처음 만든 자형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중 주문(籀文)만 대전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중화문자의 몇 차례 변형에 해당하지만 이런 변형과 변화는 모두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고문자의 자형을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한차례 변형은 바로 예서(隸書)의 출현이다. 예서는 진조(秦朝)에 처음 나타났고 한대(漢代)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래서 ‘진예’(秦隷 진조의 예서) 또는 ‘한예’(漢隷 한조의 예서)로 나눈다. 진예는 또 ‘고예’(古隷)라고 하며 한예는 ‘금예’(今隷)라 한다. 예서에는 또 다른 명칭도 있는데 가령 ‘좌서(佐書)’, ‘팔분(八分)’ 등이 있다.
예서는 만들어진 후 곧바로 보급되었고 한조(漢朝) 시기 완전히 보급되었다. 예서가 나온 이후 중화문자의 자형은 기본적으로 고정되었고 줄곧 현재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중공의 한자 간화는 제외). 때문에 예서의 확립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는 중화 고문자의 형상을 지금의 ‘필획(筆劃)식’으로 변화시켜 글로 쓰고 응용하기에 편리하게 했으며 이는 중화문자가 보다 널리 보급되게 했다.
예서를 창조한 사람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진조(秦朝)의 옥리(獄吏)들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진조(秦朝)의 선인(仙人) 왕차중(王次仲)이 만들었다고 한다.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예서는 정막(程邈)이 만든 것이다. 정막은 원래 진조(秦朝)의 옥리였는데 대전(大篆)을 잘 썼다. 나중에 진시황에게 죄를 지어 운양(雲陽)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 10년의 연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대전과 소전을 기초로 예서를 만들었고 3천개의 예서문자를 만들어 진시황에게 바쳤다. 진시황이 몹시 기뻐하며 그의 죄를 사면해주었고 아울러 그를 발탁해 어사(御史)란 관직을 주었다.”[1]라고 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진조의 선인 왕차중이 고문자를 기초해 해서 예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왕차중이 고문의 형상을 고쳐 예서를 만든 이야기는 《권학편(勸學篇)》, 《진서(晉書)·위항전(衛恒傳)》, 《고금문자지목(古今文字志目)》, 《서단(書斷)》, 《회래현지(懷來縣志)》 등 여러 문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중 《수경주(水經注)》, 《서선기(序仙記)》, 《북도부(北都賦)》 등 고서에 모두 이런 기록이 있다.
왕차중은 진조(秦朝) 상곡(上谷)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일반인과는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그의 몸에는 늘 기이한 일이 발생하곤 했다. 왕차중이 스무 살 무렵 창힐이 만든 고문에 기초해서 자형을 고쳐 예서를 만들었다. 당시 진조 관리들은 업무량이 아주 많았는데 문서가 산처럼 쌓여 주문(籀文)으로 쓰자면 속도가 너무 느렸다. 왕차중의 예서를 얻은 후 업무효율이 크게 증가했다. 시황제가 몹시 기뻐하며 왕차중을 기인으로 여겨 사람을 파견해 불러오게 했다. 그러나 연달아 3차례나 불렀음에도 왕차중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진시황이 크게 노해 사람을 파견해 왕차중을 죄수용 수레에 태워 압송하도록 했다. 수레가 중도에 왔을 때 왕차중이 갑자기 한 마리 큰 새로 변해 날아오르더니 높은 하늘 위로 길게 울며 날아갔다. 서산(西山) 상공에 도달했을 때 두 개의 깃털이 떨어지더니 두 개의 산봉우리로 변했다. 이것이 바로 저양성(沮陽城) 동북쪽에 있는 대핵산(大翮山)과 소핵산(小翮山)이다.
이상이 역사적인 중화문자 자형의 변화이다. 이외에도 중국 문자에는 또 자체(字體)의 변화가 있었다. 여기서 자형(字形)과 자체(字體)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문자의 기본구조에 변화가 발생한 것을 가리켜 자형 변화라 한다. 가령 갑골문, 주문, 소전, 예서 등이 자형의 변화다.
반면 문자의 기본구조는 변화하지 않고 단지 표면적인 풍격만 변했다면 이를 가리켜 자체(字體)변화라 한다. 가령 안체(顏體), 유체(柳體), 송체(宋體), 흑체(黑體) 및 현대 미술디자인에서 사용하는 각종 글자체들이 모두 자체의 변화다. 사람마다 글자를 쓰는 풍격이 다르지만 모두 한 가지 자체이고 기본글자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또 상고시기의 과두(蝌蚪)문자 및 춘추전국시기의 조충서(鳥蟲書) 등도 당시의 자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서가 만들어진 후 중화문자의 형상은 기본적으로 고정되었고 현재까지 줄곧 큰 변화가 없었다. 예를 들면, 현재 대만에서 사용하는 문자 등이다. 그러나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1956년 대륙에서는 대대적으로 간화자(簡化字)를 보급시켰고 중화문자를 철저히 불구로 만들어 신(神)과의 연계를 끊어버렸다. 중공은 단지 문자만 거세한 것이 아니라 또 하마터면 한자를 완전히 폐지하고 병음으로 한자를 대체하려고 시도했다.
1931년 9월 26일, 소련 공산당은 중국 신전문화(神傳文化)를 파괴하기 위해 한자를 폐지하고 라틴 알파벳으로 대체하고자 추진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국 공산당 대표 구추백(瞿秋白), 오옥장(吳玉章)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중국 신문자(新文字) 대회’를 개최해 소련과 함께 ‘북방어 라틴 신문자’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9년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 중국 공산당은 한자 간화자(簡化字)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1952년 3월 ‘한자 간화표(簡化表)’ 초안을 작성해 700개의 간체자를 선정했다. 모택동이 이를 본 후 불만을 품었고 700개의 간체자는 별로 간단하지 않다면서 한자의 수량을 줄여 한 글자로 여러 글자를 대체하게 했다.
그러다 중-소 관계가 악화된 후 중국 공산당의 한자 폐지 계획은 추진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자가 병음화 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중국 본토에 불구가 되어 불완전한 한자들을 남겨놓았다. [4]
《인민일보》 1955년 10월 26일자 1면에서 “한자 간체화는 문자의 근본적인 개혁이 아니라 진일보로 병음화가 필요하며 중공 전문가들이 병음문자를 위한 준비 작업을 완수하길 바란다”고 보도했다.
1977년 12월 20일 《인민일보》는 1면에서 “문자는 반드시 개혁해야 하며, 세계 문자와 동일하게 병음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중국 공산당은 권력을 탈취한 후 전반기 30년간 중화 신전문화(神傳文化)를 파괴했다. 고서를 불태우고,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쳤으며, 문화 유적을 파괴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데 전념해 중국인들의 뿌리를 철저히 단절시켜 자신의 조상과 문화를 망각시켰다. 이 후 30년 동안 중공은 중화 대지의 환경을 철저히 파괴해 아름다운 강산을 황폐화시켰고 토양을 오염시키고 물과 공기를 오염시켰으며 음식마저도 오염시켰다. 또한 중화민족이 수천 년간 지켜온 전통 도덕과 예의를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완전히 파괴해 중국인들을 세계적으로 “교양이 없는” 대명사가 되게 만들었다.
중공은 이처럼 불과 몇 십 년 만에 신(神)이 줄곧 돌봐오던 땅을 인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것들은 이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한 후 이것으로도 모자라 백성들이 힘들게 번 돈을 마지막까지 착취해왔다. 반면 중공 간부들은 자기 자식이나 가족들을 해외로 내보내 해외 민주 사회에서 깨끗하고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며 살게 했다. 대체 중공은 얼마나 깊은 원한이 있기에 중화민족을 이렇게까지 증오하는 것일까? 천만 번의 난도질로도 오히려 훼멸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가? 그것들은 사실 서방에서 온 마르크스-레닌의 마귀가 중화민족에게 달라붙어 화하(華夏) 자손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도 오히려 중국인들더러 그것을 “엄마(당 엄마)”라 부르게 한다!
중국인들이여! 빨리 깨어나야 한다. 빨리 대기원(大紀元) 탈당 사이트로 달려가 이렇게 사악한 중국 공산당 관련 조직(공산당, 공청단, 소선대)에서 탈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낯으로 우리 조상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자신을 중화인(中華人)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주:
[1] 《書斷》:“傳邈善大篆,初爲縣之獄吏,得罪始皇,系雲陽獄中,覃思十年,損益大小篆方圓筆法,成隸書三千字,始皇稱善,釋其罪而用爲禦史,以其便於官獄隸人佐書,故名曰‘隸’。
[2] 《懷來縣志》:王次仲,上穀郡人,始爲楷法(隸書)。 《勸學篇》:“上穀次仲,初變古形”。 《晉書·衛恒傳》:上穀王次仲,始作楷法。 《古今文字志目》:王次仲始以古書方廣少波勢;建初中以隸草作楷法,字方八分,言有楷模。 《書斷》:王次仲即八分之祖也
[3] 《水經注》:郡人王次仲,少有異志,年及弱冠,變蒼頡舊文爲今隸書。秦始皇時,官務煩多,以次仲所易文簡,便於事要,奇而召之,三征而輒不至。次仲履真懷道,窮數術之美。始皇怒其不恭,令檻車送之,次仲首發於道,化爲大鳥,出在車外,翻飛而去。落二翮於斯山,故其峰巒有大翮、小翮之名矣。《魏土地記》曰:沮陽城東北六十裏有大翮、小翮山。
《序仙記》:“王次仲,上穀人,少有異志,少年入學,屢有靈奇。年未弱冠,變蒼頡書爲今隸書。始皇時官務煩多,得次仲文簡略,赴急疾之用,甚喜,遣使召之,三征不至,始皇大怒,制檻車送之,於道化爲大鳥,出在檻外,翻然長引,至於西山,落二翮於山上,今爲大翮小翮山,山上立祠,水旱祈焉。”又楊固《北都賦》:王次仲匿術於秦皇,落雙翮而沖天。
[4] 見維基百科《廢除漢字論》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7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