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화인(鍾華人)
【정견망】
중화 역리(易理)・술수(術數), 다시 말해 중국전통의 역리학(易理學), 술리학(術理學), 현리학(玄理學) 등의 학설을 방술(方術), 술수(術數), 현술(玄術) 등으로 불리는데 중화 전통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중화 역리술수의 기원은 바로 하도(河圖)・낙서(洛書)로, 이것이 발전해 팔괘(八卦), 주역(周易), 성상(星象 별자리 천문학), 중의(中醫), 풍수(風水), 병법(兵法), 포진(布陣 진법), 오대신수(五大神數), 기문둔갑(奇門遁甲) 등으로 분리되어 나왔다. 실제로는 모두 도(道)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간소도(世間小道) 부분이다.
그러나 현대인에 대해 말하자면 흐릿하고 모호해서 알기 어려워 똑똑히 연구할 수 없다. 이런 장애 때문에 사람들이 중화문화의 내함(內涵 안에 담긴 함의)을 이해하기 어렵게 방해한다.
본문은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중화 역리술수의 연원과 도통(道通)의 전승 즉 도통이 발전해온 맥락(脈絡)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국학(國學)을 좋아하고 국학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맥락을 따라 중화문화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적은 노력으로 큰 공을 이룰 수 있기 바란다.
1. 하도・낙서의 사전(史前) 내원
원고(遠古)시기 대홍수로 전체 지구 문명이 훼멸되었다. 전 세계 245개 주요민족과 84종의 언어에서 모두 대홍수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전 세계 거의 모든 오래된 민족들마다 대홍수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또한 이들 민족의 모든 조상들이 서로 짜고 거짓말을 날조해 자손을 속인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사료(史料)를 통해 보자면 약 6천여 년 거의 전 지구가 물에 잠길 뻔한 대홍수 외에도 이후 여러 차례 지역적인 작은 홍수들이 발생했다. 때문에 홍수에 대한 이들 기록들이 한데 뒤섞여 시간적으로 일부 충돌이 생기면서 현대인들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현대인들은 시간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고인(古人)이 조작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각기 다른 시기의 이런 크고 작은 홍수들은 인류와 인류 문명을 대대적으로 훼멸시켰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대홍수는 대략 6,000년 전 발생했던 세계적인 대홍수로 당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류 문명이 훼멸되었고 단지 해발 고도가 높은 곳에 살던 소수 사람들만이 다행히 살아남아 현재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 중국에도 대홍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와(女媧)와 복희(伏羲) 이야기 속에도 대홍수의 그림자가 있다.
대홍수 이전 인류 문명은 대단히 발달해서 우리 현재의 과학과는 다르며 지금의 과학보다 훨씬 더 발달했다. 아틀란티스 전설과 마야 문화 등은 사실 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인류 문명의 잔재이다. 오직 일부 지역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 살아남았고 거의 모든 문명이 훼멸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다행히 생존한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일부 사전문명(史前文明)을 남겼다.
가령 중국을 예로 들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곤륜산(崑崙山) 일대에 비교적 많았고 이들이 이번 차례 중국인들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아주 많은 사전문명이 보존되었다. 때문에 중화문화의 연원은 아주 심원한 것으로 두 차례 인류 문명을 뛰어넘는다.
하도와 낙서는 이번 차례 문명의 산물은 아니지만 중화 역리(易理)・술수(術數) 근원이라 중국문화를 알려면 하도・낙서를 알아야 한다.
중국 고대 문헌과 각종 역사서에는 모두 복희, 헌원(軒轅 황제), 요(堯), 순(舜) 대제(大帝)가 모두 강하(江河)에서 하도(河圖)를 얻었고 대우(大禹)가 치수(治水)할 때 또 낙수(洛水) 속에서 낙서(洛書)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월성신(日月星辰)과 계절・기후, 초목(草木)의 성쇠를 관찰해 드러나지 않은 자연만물(自然萬物)의 내재적인 연계 및 천지인(天地人)의 대응관계를 찾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다년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그 도(道)를 얻지 못해 망연자실했다. 바로 그 순간 신서(神書) 하도(河圖)를 얻었고 이를 통해 자연만물의 관계를 돈오(頓悟 단번에 깨달음)하고 천지와 사람 사이의 연계를 투철히 깨달아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만들고 음양오행 및 상생상극의 이치를 분명히 밝혔다. 나중에 주 문왕(文王)이 또 팔괘를 연변(演變)시켜 둘 씩 곱해 64괘상(卦象)을 얻어 《주역》을 이뤘다.
중국 사서(史書)에는 곤(鯤)과 대우(大禹)가 물을 다스려 중화대지에서 홍수를 몰아내고 육지를 구주(九州)로 나눴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우가 치수할 때 낙서를 얻었고 이를 통해 천하의 지형지세를 알았으며 이를 이용해 물을 이끌어 강이나 호수 바다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치수에 성공했다. 아울러 이때부터 천하를 구주로 나누고 구정(九鼎)을 주조했으며 《산해도경(山海圖經)》을 정(鼎)에 새겼으며 이에 근거해 구장(九章)의 대법(大法)을 정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처럼 삼황오제(三皇五帝)는 모두 물속에서 하도와 낙서를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마땅히 6천여 년 전 대홍수로 수몰된 상고(上古)시기 사전문명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잃어버린 문명이 때가 무르익은 후 신(神)의 뜻에 따라 삼황오제가 물속에서 얻게 된 것이다. 이는 우연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하늘의 뜻이었다.
지난 차례 인류문명의 발전노선은 지금의 서방과학과는 완전히 달라서 중국 고대의 발전노선과 유사해 직접 인체・자연・우주의 대응관계를 연구했고 몇 천 년에서 만 년 이상의 발전을 거쳐 문명이 아주 높은 정도에 도달했다. 그때 동서방(東西方) 문명의 발전노선은 같지 않았다. 마야문화 역시 그 한 차례 문명을 전승했기 때문에 천문학이 극도로 발달해 현재를 뛰어넘었다. 아틀란티스와 뮤 대륙 역시 지난 차례 서방문명에 속한다.
지난 차례 문명은 대부분 훼멸되었고 오직 소수 사람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문자(文字) 역시 서서히 실전되었다. 나중에는 구전(口傳)을 거치면서 기록이 없어졌고 또 몇 천 년의 전승을 거쳤기 때문에 대부분 다 유실되었다. 지금까지 남겨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극소수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비록 이렇게 작은 일부임에도 지금 사람들은 너무 심오해서 추측하기 어렵다고 여기며 신화로 간주할 뿐이다.
《성경》과 아틀란티스 및 다른 민족들의 전설에 나오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인류는 육욕(肉慾)의 향락에 빠져 도덕이 추락했고 인륜이 난잡했으며 동성애, 난잡한 성교, 마약, 폭력 숭배 등등 인성(人性)의 단속이 없어 마치 금수(禽獸)처럼 변했다. 때문에 신(神)은 인류가 더는 인류가 아니라 여겨 대홍수와 각종 거대한 천재(天災)를 내려 보내 순식간에 인류문명을 훼멸시켜 버렸다.
그 한 차례 큰 겁난에서 인류는 거의 완전히 훼멸되었고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가령 신(神)이 창조한 백인종 중에서는 오직 노아 가족만 살아남았고 이후 서서히 후손들이 번창했다. 당시 문명과 생산도구 등이 전부 훼멸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또 새롭게 원시사회에서부터 시작했으며 동굴에서 살았고 나무껍질로 옷을 입었으며 서서히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때 중화대지에서는 곤륜산 일대의 사람들이 살아남아 비교적 많은 사전문명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명은 훼멸되었고 또 한 세대 한 세대 전승을 거쳤기 때문에 서서히 문명 속에서 일부 관건적인 부분들이 단절되게 했다.
바로 이때 하늘의 명을 받은 복희씨(伏羲氏)란 성인(聖人)이 나타났다. 그의 사명은 중화문화를 수립하고 중화인맥(中華人脈)을 개창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하도(河圖 사전문명의 정수)를 얻어 팔괘를 창립했고 음양오행의 원리를 투철히 깨달아 중화문명의 맥을 열었다.
이어서 헌원황제(軒轅黃帝), 요, 순 등 대제(大帝)의 전승과 발전을 거치면서 중화인맥이 점차 더욱 넓고 더욱 깊어졌으며 이를 통해 튼튼한 뿌리를 내려 화하 오천문명(五千文明)을 운행했다.
이렇게 역사 연대가 오래됨에 따라 곧 신화전설(神話傳說)로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또 몇 천 년의 전승을 거쳤고 또 이 기간에 문자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중에 필연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는 있지만 본래 뜻은 틀림이 없다. 대체로 신화전설은 오직 그 뜻을 깨닫고 그 형태를 바로잡으면 진기(真機)를 얻을 수 있다.
천기(天機)는 누설할 수 없는 것이라 인류 도덕이 타락한 이후 층차와 경계 역시 낮아졌기 때문에 과거 아주 많은 고층의 것들을 저층의 사람이 알 수 없게 했다. 때문에 이를 신화로 여기는 것도 필연적이다.
필자가 보기에 하도와 낙서는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두 장의 단순한 점진도(點陣圖)가 아니라 송조(宋朝)의 수도인(修道人) 진단(陳摶)이 전해준 《용도역(龍圖易)》일 뿐이다. 당시에는 이것을 하도・낙서라 부르지 않았고 단지 후대인들이 이렇게 불러 지금까지 대대로 잘못 전해졌을 뿐이다. 기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갈수록 더 미혹되었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어떻게 해도 팔괘를 추론해내지 못했으며 현대에 이르러 서방과학이 전해 들어옴에 따라 또 이를 수학(數學)으로 삼아 연구했다.
사실은 그다지 신비하지 않지만 투철히 연구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진전(真傳)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은 진전(真傳 진짜 전수)이 한 구절이면, 가짜 전수는 백만 권이라고 했다.
2. 하도의 현기(玄機)
하도와 낙서는 단순히 두 장의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두 권의 그림과 글이 있는 현오(玄奧)한 그림책이다.
하도(河圖)는 천상(天象)의 운행과 인체 경락 운행을 대응한 그림책이다. 이는 사전문명에서 가장 관건적인 것으로 마치 현대 화학의 원소 주기율표가 전체 화학의 기초가 되어 전반 화학이 이 기초위에서 수립되어 이들 원소와 원소 사이의 관계에 근거해 연구하고 발전해 나온 것과 마찬가지다.
복희씨(伏羲氏)는 대덕(大德)을 품고 인간세상에서 천명(天命)을 받아 신(神)의 뜻에 따라 하도(河圖)를 얻었으며 이를 통해 천지인(天地人)의 오묘한 신비를 깨달아 팔괘(八卦)와 태극(太極)을 전해 후세 역리술수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이는 나중에 또 삼황오제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확장과 발전을 통해 중화 역리술수 체계를 완성했다.
예를 들어, 황제는 하도와 대조해 다년간의 깨달음을 통해 인체 맥락이 운행하는 이치를 깨달아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의 저작을 전해 후세 중의(中醫)의 비조가 되었다. 나중에는 또 성상(星象)이 대응과 연계를 깨닫고 구천현녀(九天玄女)의 도움을 받아 병서(兵書)와 진법(陳法)을 일부 전해 병가(兵家)와 기문둔갑(奇門遁甲) 포진(布陣)의 비조가 되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번 차례 중화문명은 비록 이전 차례 사전문명을 전승하긴 했지만 완전히 이전 차례 인류문명과 동일하지는 않다고 보는데, 어떤 부분은 심지어 사전문명을 훨씬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신(神)의 배치 하에 여러 선성대덕(先聖大德)이 비록 사전문명을 기초로 삼아 깨닫고 개척하긴 했지만 보다 박대(博大)한 내함(內涵)을 더했고 신(神)의 부분을 보다 많이 더했기 때문이다.
문자와 문명의 단절 때문에 하도와 낙서를 보고 단번에 이해하게 만들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마치 화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한 장의 주기율표를 준다면 그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것과 같아서 그더러 화학 방정식을 유도해내라고 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고로 하도・낙서를 볼 수 있고 또 개척한 사람들은 반드시 대덕지사(大德之士)로 오성(悟性)이 아주 높아야만 하도・낙서의 현기를 꿰뚫고 성상(星象)과 인체 및 자연이 운행하는 대응관계를 환히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업적을 세울 수 있었다.
가령 공자는 한평생 직접 하도를 볼 수 있기를 소원했지만 만년에 이르러서도 끝내 보지 못하자 몹시 실망했다. 가장 원시적인 하도는 복희씨에서 시작해 줄곧 삼황오제 도통(道通)의 맥락을 따라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고 역조역대(歷朝歷代)에 늘 황궁에 수장되었으며 황실에서 비밀리에 보관되어 일반 백성들은 볼 수 없었다.
비록 동주(東周) 이전의 역대 황제들이 하도와 낙서를 직접 볼 수는 있었지만 오성과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에 오직 덕이 높은 몇몇 대제(大帝)만이 하도・낙서를 꿰뚫어 업적을 수립할 수 있었으며 그 나머지 평범한 자질의 군왕들은 덕행과 오성이 부족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저 황실의 장식품으로 삼았을 뿐이다.
나중에 주(周) 문왕에게 전해졌다. 주 문왕은 하도와 낙서에 근거해 이를 하나로 합해 64괘를 연화(演化)해 《주역》을 전해주었다. 그 후 하도와 낙서는 줄곧 주나라 황실 궁궐 안에 남겨졌다. 하지만 주조에 유왕(幽王)이란 어리석은 군주가 나타나 미인(美人 역주: 포사)의 웃음을 사기 위해 거짓으로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농락했다가 나중에 견융(犬戎)의 난을 자초했다. 당시 견융의 난 때 하도낙서가 훼멸되었고 이후 영원히 황실에서 소실되었으며 역사 기록에서도 더는 하도 낙서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는 극히 큰 한 차례 문화적 손실이자 또한 하늘의 뜻이었다. 인류의 도덕이 안 되었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이렇게 고층의 지혜를 저층차의 인류에게 남겨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사람이 그렇게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이때부터, 한 인류 주기(週期)가 발전시켜 온 전반적인 문명이 정말로 단절되었다. 다행히 여러 선성(先聖)들이 이미 하도낙서를 투철히 깨달아 후세를 위해 음양오행이나 팔괘 주역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남겨놓아 중화문화를 위한 길을 다져주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응용부분일 뿐 원리는 아니다. 마치 중의에서 고정된 약 처방은 남겨져서 일정한 병에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의학의 이치를 잃어버려 오직 증상에 맞춰 약을 투여할 뿐 자유자재로 변증시치(辯證施治)를 할 수 없게 된 것과 같다.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일단 병의 상태가 바뀌게 되면 처방이 맞지 않아 속수무책이 된다.
이후 범인(凡人)은 더는 주역 팔괘 등을 읽고 이해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직 선성(先聖)들이 귀납한 고정된 법칙과 고정된 공식에 근거해 어떤 일을 예측하는 데 사용했을 뿐이다. 그 누구도 더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의 지능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전반 인류 문명 주기에서 발전해 나온 가장 정화적인 부분인 하도・낙서의 원리가 이미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이다. 이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를 투철히 연구할 수 없었고 헛되이 힘만 낭비했을 뿐이다.
내 생각에 공자가 한평생 하도・낙서를 직접 볼 수 없었던 이유 역시 하늘의 뜻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가(儒家)가 단독으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도가(道家)에서 분리되어 나와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없었을 것이다. 유가는 도의 입세(入世) 부분이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세상에 들어가 사람이 되는 도리만을 말했을 뿐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도가와 비교해본다면 수련해서 신선이 되는 부분이 빠져 있다.
공자는 직접 신(神)의 존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에 의혹이 있었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한다”고 했으며 제자들이 귀신에 관한 일을 물었을 때에도 “삶조차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며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만약 공자가 직접 하도・낙서를 보았더라면 공자의 오성에 근거해 진기(真機)를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만약 하도 낙서의 진기를 투철히 깨달았다면 곧 신(神)의 존재를 견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공자는 아마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를 닦거나 또는 이름을 숨기고 은자(隱者)가 되어 더는 인간세상의 시비(是非)를 따지지 않으며 사람의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선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유가는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도・낙서가 공자가 탄생하기 전에 소실된 것 역시 하늘의 뜻이다.
하지만 후세에 또 많은 고인(高人)들이 나타나 많은 역리(易理)문파를 창립했다. 가령 장과로(張果老)는 남극신수(南極神數)를 창립했고 진단(陳摶) 노조(老祖)는 자미두수(紫微斗數)를 만들었으며 소옹(邵雍 소강절)은 매화역수(梅花易數)・철판신수(鐵板神數)・소자신수(邵子神數) 등을 전했다.
이외에 또 많은 세외고인(世外高人)들이 세간에서 도제(徒弟)를 찾아 그들의 일부 특별한 것들을 전해주었다. 예를 들면 황석(黃石)노인이 장량(張良)에게 병법을 전수한 등이다. 이치에 따라 말하자면 만약 그들이 하도・낙서를 보고 투철히 깨닫지 못했다면 이런 문파를 창립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일한 해석은 그들이 아마 하도・낙서를 보았거나 또는 진전(真傳)을 얻어 투철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업적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기왕에 하도・낙서가 황실 내부에 수장되어 있었고 또 주조(周朝) 때 훼멸되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과거에 황실이나 왕실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도를 닦았고 많은 왕자(王子)들이 권력보다는 신선수련을 좋아해 강산을 버리고 인간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홀로 산속에 들어가 이름을 숨기고 도를 닦으며 수련했기 때문이다. 마치 황제와 요, 순 등처럼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도를 닦았으며 아울러 최후에 모두 공성원만(功成圓滿)해서 도(道)를 얻고 신선이 되어 백일비승(白日飛升)했다.
그러므로 중화 역조역대의 황실 성원과 세외(世外)에서 수련한 고인(高人)들 사이에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또한 역조역대로 기본적으로 늘 천상에 순응해 인간세상에 배치되어 조정에 들어와 재상이 되어 도와주는 고인(高人)이 있었다. 예를 들면 강자아(姜子牙), 동방삭(東方朔), 제갈량(諸葛亮), 원천강(袁天綱), 이순풍(李淳風), 유백온(劉伯溫) 등인데 이들은 모두 천상의 변화에 순응해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와서 왕실을 보좌했다.
과거에 황족의 일원이 입산수도할 때 마치 황제, 요, 순 등처럼 그들 역시 하도・낙서의 부본(副本)을 세외에 가져갔고 또한 대를 이어가면서 세외라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전승해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세외고인 도제에게 전해주는 것은 전부 단독전수이고 모두 여러 해를 거쳐야만 덕이 높고 오성이 좋은 도제를 하나 찾아 전승할 수 있었으며 밖으로 전하지 않았다. 아울러 또 모든 전인(傳人)들이 마음대로 세간에 들어와 세간 일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함부로 간섭하면 하늘의 징벌을 받았으며 오직 특수하게 천명(天命)을 받은 그런 사람들만이 비로소 사명을 지니고 세간에 들어와 천상에 순응해 인간세상에 배치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귀곡자, 황석노인 등 역사 기록에 나오는 세외고인들은 진전(真傳)을 얻었지만 세간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세간의 일에 관여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한 일부 도제들은 오히려 세간에 들어와 일을 했는데 이는 천상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수백 년이 지나야지만 비로소 기인(奇人)이 하나 나타나 심오한 문화를 남기고 수수께끼를 남겨 후세에 해독할 수 있도록 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123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