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顏雯)
【정견망】
고대 일부 제왕은 선방(仙方 신선의 처방)을 찾기 위해 온갖 곡절을 겪었지만 얻지 못했다. 선방은 만날 수는 있지만 구할 수는 없는 것이라 만약 세간에 알려졌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늘이 중생을 불쌍히 여겼거나 또는 여러 세대에 걸쳐 덕을 쌓아 복보(福報)를 받은 것이다.
설령 황제가 바뀌어도 세상에는 또 천신(天神)과 지선(地仙)이 보살피는 구원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다. 신비한 약방(藥方 약 처방)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단지 하늘은 생명을 아끼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있으며 사람을 질병의 고통과 고통에서 진정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神)뿐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1. 영아가 붓을 들어 하늘의 기방(奇方)을 전하다
《영풍현지(永豐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북송(北宋) 선화(宣和) 2년(1120년) 정월 어느 날 장안성(長安城)의 김(金) 씨와 탕(湯) 씨 집에서 각각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이 두 아이는 태어난 지 5일 만에 말을 할 수 있었고, 7일 만에 글씨를 쓸 수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과의방(女科醫方)》 한 권을 썼다. 이 일은 현지에서 떠들썩하게 퍼졌고, 나중에 경성(京城) 관리들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그때, 흠종(欽宗) 황제가 막 제위를 계승했는데 어떤 관리가 조정에 들어가 이 사실을 알렸다. 황제가 듣더니 호기심이 생겨 두 여아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가 그녀들에게 물었다.
“내 듣자하니 너희들은 강보에 쌓여 있을 때부터 말도 하고 글도 쓸 줄 알며 또 병을 치료하는 처방도 펴냈다는데, 어떻게 그런 재주가 있는 것이냐?”
두 아이가 대답했다.
“세상의 모든 환자들 중에서 부녀자의 병이 가장 고치기 어렵고, 그녀들이 얻은 질병 중에서 출산 때의 상황이 가장 위험합니다. 하늘이 창생(蒼生)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 두 사람에게 처방을 전해 저희들이 천하의 부인을 위난(危難)에서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흠종이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고 그래서 신방(神方)을 베껴 맹(孟) 태후에게 주어 보관하게 했다. 황제는 또 두 아이에게 많은 하사품을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7개월 후, 그녀들은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그 말을 들은 후, 또 사람을 파견해 돈이며 비단을 보내 가족들을 위로했다.
정강(靖康) 원년에 휘종(徽宗), 흠종 및 육궁의 사람들이 일제히 북쪽으로 끌려갔다. 맹 태후는 폐위된 몸이라 변경(汴京 북송의 수도로 지금의 개봉)에 남을 수 있었다. 나중에 고종이 남쪽으로 내려가 즉위하자 맹 태후는 남쪽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금나라 사람들의 추격을 받아 강서(江西)의 영풍현(永豐縣)으로 도망쳤다.
애초 기이한 영아를 낳은 김 씨와 탕 씨 두 집에 각각 한 명의 의관(醫官)이 태후를 모시고 다녔다. 피난길에 태후는 《여과의방》을 꺼내 두 의관에게 현지 부녀자들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 그 처방은 놀라운 효험이 있어 치료받은 부녀자들 중 낫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중에 김 씨와 탕 씨 두 의관이 영풍에 남았고 대대로 부인과 기방(奇方 기이한 처방)을 전해 현지에서 으뜸이 되었다.
2. 모란 그림에 숨겨진 기방
《항주부지(杭州府志)》 기록에 따르면 송조(宋朝) 절강 전당현(錢塘縣)에 소(蕭)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남에게 베풀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는 일찍이 한 승려와 알고 지냈는데 오랜 세월 줄곧 후대했다.
어느 날 그 승려가 손가는 대로 모란 그림을 그려 그에게 보냈다. 그는 이 그림을 보물처럼 여겨 잘 간직하였다. 나중에 그는 가끔 꺼내서 감상했는데 우연히 그림 속 모란꽃잎 사이로 글귀가 보일 듯 말 듯 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위에 쓰여진 것이 병을 치료하는 데 쓸 수 있는 고방(古方 옛처방)임을 알아냈다.
그는 신기하게 생각해 사위인 곽(郭)씨를 불러 처방전대로 사람을 치료해 보라고 했다. 뜻밖에 그가 치료한 모든 환자들은 즉시 병이 나았다. 나중에 그는 사위에게 처방전이 쓴 약재를 한데 모아 단약(丹藥)을 만들도록 했다. 난로에 불을 붙이면 난로에 모란꽃 모양이 나타나며 그 색채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 약재를 기장만한 크기의 단약으로 제련한 후 약효가 크게 높아져 위독한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기사회생의 효과가 있었다. 이후 소 씨와 곽 씨는 원근에서 유명한 의원이 되었다.
3. 도인이 선사한 모란 꽃잎에 기방이 있다
《전당현지(錢塘縣志)》와 《해녕현지(海寧縣志)》에 따르면 송 철종(哲宗) 때 곽소간(郭昭乾)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는 여단(汝端), 호는 문승(文勝)이며 대선인(大善人)으로 당대(唐代)의 명장이자 분양왕(汾陽王)을 지낸 공신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이었다. 원부 3년(1100년), 그는 변경에서 항주로 거처를 옮겼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선행을 베풀기 좋아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도인(道人)이 동냥하러 오자 곽소간은 푸짐한 식사를 차려 대접했다.
떠나기 전에 그 도인은 자신의 사발을 탁자 위에 놓았다. 곽소간은 사발이 노란 종이로 봉해진 것을 발견하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도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도인이 말했다.
“당신 집안은 대대로 적지 않은 음덕(陰德)을 쌓았으니 오늘 이 물건을 주어 보답하겠소. 한 달 후에 열면 안에 활짝 핀 모란꽃 한 송이가 있을 것이 그 속에는 부인과 질병을 치료하는 처방이 있을 것입니다, 이 처방을 써서 병을 치료하면 후손들이 모두 의술로 명성을 얻고 가문을 빛낼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자 도인은 떠났다. 13일이 지나, 곽소간의 동생 곽소도(郭昭度)가 집을 방문했다. 그는 이런 기이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자 의심이 들었고, 그 도인이 형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여 지체 없이 그 사발을 열어보려고 하였다. 곽소간은 마지못해 열었는데, 그 사발에는 역시 모란꽃이 활짝 피었고, 꽃잎마다 글씨가 적혀 있었다. 형제가 자세히 알아보니, 뜻밖에도 모든 꽃잎에 적힌 것이 일종의 기방임을 발견했다.
그들이 13일을 기다린 후에 사발을 열었기 때문에, 열세 개의 꽃잎에 있는 글자만 선명하게 보이고, 나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때 곽소간은 얼른 처방을 베껴 적었다. 그가 다 쓰자마자 모란은 곧 시들었다.
나중에 그는 13가지 특이한 처방으로 사람들을 치료했고 매번 효과가 있었다. 그가 처방전의 약재를 단약으로 만들었을 때 난로에도 모란꽃 모양이 보였다. 환약 단련한 후 병 치료 효과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래서 곽소간 대(代)부터 곽 씨 가문은 명실상부한 의사 집안이 되었다. 3대에 이르러 곽경중(郭敬仲)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때 맹 태후가 중병에 걸려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궁 안의 태의(太醫)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질고 효성스러웠던 고종 황제는 민간에서 명의(名醫)를 두루 찾으라고 명령했다. 곽경중의 어머니 풍(馮) 씨도 의술을 알고 있으므로 궁으로 불려갔다. 나중에 그녀는 아들을 천거해 궁궐로 불러들였고 모란꽃잎에 적힌 기방으로 만든 환약을 맹태후에게 바쳤다. 태후는 복용을 하자마자 깨어났고, 세 번 더 복용한 후에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를 안 고종은 매우 기뻐 곽경중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어머니 풍 씨를 안국부인(安國夫人)으로 봉하고 아버지를 황실묘지에 묻히도록 했다. 고종은 나중에 조(趙 황실의 성)씨 성을 하사해 곽 씨 일족을 영예롭게 했다. 사람들은 곽경중이 살던 골목을 ‘조곽리(趙郭里)’라 이름 붙였다.
4. 도인의 기방을 전수받아 대대로 의명을 날린 근 씨 가문
《항주부지》에 따르면 북송 때 근호(靳豪)라는 대선인(大善人)이 경성 현인방(顯仁坊)에 살았다. 그 조상은 전국시대 삼진(三晉)출신이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그 족속 중에 근항(靳恒)이라는 사람이 관직이 개봉지부(開封知府)에 이르렀다. 그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했고 관리로서 능력도 뛰어나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근호 대에 이르러서도 그는 백성을 안정시키고 세상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비록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약국을 운영했지만 매일 오가는 행인들에게 무료로 쌀죽을 제공했다. 선화 연간에 두 명의 도인이 매일 그의 약국에 와서 죽을 한 그릇씩 마셨다. 근호는 그들을 매우 공경하여 몇 년 동안 조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중 한 도인이 불쑥 그에게 말했다.
“당신을 오랫동안 떠보았더니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소. 당신이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시작한 후에 자자손손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자 도인은 종이에 몇 마디 써서 종이를 건네주고는 사라졌다. 근호는 종이에 적힌 구절을 읽다가 그것이 소아과 병의 치료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처방전대로 시정의 아이를 치료했는데 매번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명성은 점점 더 널리 알려졌고, 고종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 그는 다시 불려가서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어가(御駕)를 호위한 공로로 근호는 황제에 의해 태의로 임명되었다. 후에 그는 처방을 자손에게 전했고, 근종겸(靳從謙)의 대에 가서도 여전히 그 신기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황제는 근종겸의 품행과 의술을 중시하여 그를 한림원 의관에 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세 등급이나 올려주었다.
소흥 3년(1133년)에 황제는 부고(府庫)에 있는 백자도(百子圖) 한 폭을 그에게 하사하고 아울러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백자도항(百子圖巷)’이라 부르게 했다. 근 씨 가문은 대대로 의사의 이름으로 자손이 그 일을 이어받았고, 모든 것이 두 도인의 말과 같았다.
참고자료: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