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顏雯)
【정견망】
현대인들은 중의(中醫)의 치료 효과가 양의만큼 즉각적이지 않고 느리다고 오해한다. 사실 약을 써서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실제 사례는 고대 중국 의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수많은 난치병, 약물로 치료할 수 없는 병들이 침술(鍼術)로 손을 대자마자 즉시 낫는 경우도 많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일침견혈(一針見血 침을 한번 놓으면 피가 나온다는 뜻. 여기서 피는 사혈을 말하며 사혈이 나오면 병이 낫는다)’은 원래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신의(神醫) 곽옥(郭玉)의 ‘일침즉채(一針即瘥 침을 한번 놓으면 병이 바로 낫는다)’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또 곽옥 이후 역대로 이처럼 신기한 침술을 익힌 의사와 술사(術士)가 끊이지 않았다. 아무런 기구가 없어도 경락과 혈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데, 이는 서양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송대(宋代) 민간에 숨어 있던 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침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범구사(範九思)라는 사람은 어느 지방 사람인지 모르지만, 침을 한번 놓기만 하면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던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목구멍이 나방처럼 부풀어 오른 병이 생긴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바늘을 무서워하여 붓 안에 감추고, 붓으로 약을 바른다고 하면서 재빨리 바늘을 혈(穴) 자리에 찔러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의 병은 나았다.
또 번우(番禺)에서 한 주관의 아내가 곧 분만할 때가 되었는데 날이 지나도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도광원(屠光遠)이라는 이사(異士 기이한 술사)가 그녀를 보더니 “아이의 손이 엄마의 창자를 붙잡고 있으니 못 나올 게 뻔하다!” 말을 마치고 산모의 배를 통과해 태아에게 침을 놓자 아기가 곧 태어났다.
송대 문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 기록하면서 크게 감격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침의 오묘함은 정말로 기사회생의 공이 있다. 경락이 모이지만 탕약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적중하면 그 효험이 신(神)과 같다.”
동양 사대부가 침술로 벌레를 제거
《가흥부지(嘉興府志)》에 따르면 남송(南宋) 연간 절강(浙江)성 동양현(東陽縣)에 침술에 정통한 독서인(讀書人 글을 공부하는 선비)이 있었는데, 이름은 이명보(李明甫)였다. 한번은 의오(義烏) 현령이 심장에 통증이 있어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 않아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명보가 가서 그를 보고는 말했다.
“이 병은 폐(肺) 아래에 벌레가 있으니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지금으로서는 침밖에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니 최선을 다해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명보는 먼저 그의 등에 몇 개의 혈자리를 찍은 뒤 몰래 물을 받아 입에 머금었다. 갑자기 입안의 물을 현령의 등에 뿜자, 현령이 깜짝 놀랐다. 바로 이때 침을 혈자리에 꽂았다. 이때 이명보가 “벌레가 다 죽었습니다.”라고 했다. 잠시 후 현령의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검은 물 몇 되나 설사한 후, 죽은 벌레들이 몸에서 다 배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령은 완쾌되었다.
농주 도사가 침술로 귀신을 쫓다
《서재활기(西齋話記)》에 따르면 섬서 농주(隴州)에 증약허(曾若虛)라는 도사가 있었다. 그는 의술을 알고,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특히 침술이 출신입화(出神入化)에 이르렀다. 현지의 한 과부가 중병에 걸려 죽은 것처럼 보였는데, 며칠이 지나도 가슴에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가족은 증약허를 청하여 어찌된 일인지 살펴보게 했다.
그는 그 집에 도착해 환자를 자세히 살펴본 뒤 가족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울지 마시오, 그녀는 아직 살 수 있소.”
그는 즉시 침을 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는 깨어났다. 그가 떠나자 과부는 말을 할 수 있었고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방금 꿈을 꾼 것 같은데, 죽은 남편이 찾아왔단다. 나를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밭을 지나 다리를 건너 다시 잡초가 무성한 숲속으로 들어갔지. 나는 그를 바짝 따라 곧장 앞으로 걸어갔어. 갑자기 그는 무언가에 발을 찔린 듯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나는 혼자 가야만 했고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깨어났다.”
나중에 누가 증약허에게 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황제내경》에 일찍부터 있던 침법(鍼法)인데, 나는 그 사람의 ‘팔사(八邪)혈’을 찔렀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만년에 그는 《침구대성(針灸大成)》이란 책을 펴내 후세에 전했다. 그의 제자 요가구(姚可久)가 그 진전(真傳)을 얻었고, 나중에 궁궐에 뽑혀 들어가 상약봉어(尚藥奉禦)라는 직책에 올랐다.
침이 닿기만 하면 병을 고친 무위군 명의
《문견후록(聞見後錄)》에 따르면 북송 시기 안휘 무위군(無爲軍)에 장제(張濟)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예전에 어떤 이인(異人)이 비법을 전수해 주어 침술로 병을 고치는데 능했다. 이때부터 그는 인체를 투시할 수 있었고, 사람 몸 안의 오장과 경락도 훤히 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침을 사용할 때도 더욱 뜻대로 되었다.
한 임산부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고, 일어난 후 그녀의 배가 왼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장제가 그녀의 오른손에 침을 놓자 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항문이 심하게 탈장되어 여러 많은 의사를 불러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장제를 만나 그의 명치에 침을 놓자 병이 곧 나았다.
또 한 사람은 장티푸스에 걸려 밥을 먹지 못하고 속이 울렁거려 며칠 동안 구토를 했다. 장제가 그의 눈가에 침을 한 대 놓자 이 사람은 곧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어느 해, 그 지방의 작황이 좋지 않아 기근이 들었다. 굶주린 백성이 도망치고, 역병이 빠르게 퍼졌다. 그때 장제는 침 하나만을 가지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는 모두 170명을 보았는데, 그가 침을 놓은 후에 그 사람들은 모두 건강을 회복했다.
명신 진관(陳瓘)이라는 사람이 장제의 전기를 쓰면서 그가 사용한 침술은 어떤 방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전전사 의원이 화침으로 폐옹을 고치다
《이견지(夷堅志)》에 따르면 남송 효종(孝宗)이 재위할 때 궁에 있던 성고(盛皋)라는 금군 시위(侍衛)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 그는 매일 음식을 먹지 못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따끔거렸다. 많은 의원들이 와서 보았지만 그가 무슨 병에 걸렸는 지 알지 못했다. 당당한 육척의 사내가 이렇게 나날이 굶으니, 사람은 이미 야위어 말이 아니었다.
몇 달 후, 그는 전전사(殿前司)에 유경락(劉經絡)이란 외과 의사가 의술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도 금군(禁軍)에서 일하는 것을 생각한 성고(皋就)는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유경락은 성고를 보자마자 말했다.
“당신이 걸린 것은 폐옹(肺癰 역주: 폐에 농양이 생긴 증상으로 항생제가 없던 고대에는 난치병에 속했다)으로 보통 병이 아니오. 일반인은 고칠 수 없소.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앓고 있었고, 병 뿌리도 아주 완고해졌으니, 뜸과 탕약을 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내가 화침(火針)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성고의 아내가 처음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성고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세월을 보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오, 언제나 끝이 나겠소! 어쨌든 한번 시도라도 해봐야지,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소.”
이때 유경락은 약상자에서 침 두 개를 꺼내었는데 약 한 자 길이로 뿌리가 젓가락만큼 굵었다. 바늘을 불에 쬐면서 붓을 들고 환자의 왼팔과 오른팔에 두 개의 혈을 찍은 뒤 ‘당삼대전(當三大錢 송나라 동전)‘ 두 개를 혈자리에 놓았다.
그가 먼저 왼팔의 혈에 침을 놓았는데, 침이 몇 치나 박혔는데도 환자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양쪽 팔에 침을 맞은 뒤에도 고름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유경락이 그에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라고 한 뒤 등을 가볍게 두드리자 이윽고 피가 흘러나왔다.
떠나기 전 유경락은 성고의 아내에게 말했다.
“이 피는 아직 이틀을 더 흘려야 하니 신경 쓰지 말고 절대 지혈하지 말고 환자에게 맑은 죽을 먹이면 됩니다.”
사흘째 되던 날 다시 찾아간 유경락은 성고를 보고 기뻐하며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그의 체내에 있던 독은 이미 깨끗하게 배출되었으니 삼오일만 지나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그는 환자의 피가 나는 상처에 고약 두 개를 붙이고 성고의 집을 떠났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성고가 죽을 때까지 폐옹이 재발하지 않았다.
폐옹에 대해 말하자면, 송대 의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에 한사(寒邪)가 폐에 들어간 후 배출되지 않고 장기간 울결되어 발생한다고 했다. 처음 병이 났을 때는 치료할 수 있지만 일단 피고름이 형성되면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유경락은 단지 화침 두 개만으로 고황에 든 병을 고칠 수 있었으니 그의 침술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