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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 서서(徐庶)가 신선으로 수련 성취한 기록

덕혜(德惠)

【정견망】

삼국시기 서서(徐庶)라는 모사(謀士 책사)가 있었는데 자(字)는 ‘원직(元直)’이다. 그의 본명은 서복(徐福)인데 일찍이 정의를 위해 남의 복수를 해주다 구출된 뒤 서서(徐庶)로 개명했다. 아마도 생사의 겁난(劫難)을 겪었기 때문인지 이때부터 스승을 찾아 모시고 도(道)를 구하기 시작했고, 제갈량(諸葛亮) 등 도우(道友)들과 친하게 왕래했다.

유비가 신야(新野)에 주둔할 때, 서서가 유비에게 달려가서 제갈량(諸葛亮 제갈공명)을 추천하면서 자신보다 열 배나 뛰어난 인재이니 직접 찾아가서 보좌해 달라고 청하면 패업(霸業)이 이루어질 거라고 했다! 그래서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제갈량을 출산시킨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서서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 어머니가 조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비에게 작별하고 조조 진영에 들어갔다. 나중에 이 일은 문예적인 가공을 거쳐 “서서가 조조 진영에 들어갔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로 가공되었다. 또한 서서는 효자의 모범이 되어 칭송을 받았다.

위문제(魏文帝 조비) 때 서서는 관직이 우중랑장(右中郞將)·어사중승(禦史中丞)에 이르렀지만 나중에 은거해 운유(雲遊)했다.

전설에 따르면 서서가 교남(膠南)에 은거했다고 하는데, 그곳 대주산(大珠山) 모자봉(帽子峰)에 서서의 사당이 있었다. 역사가 흐르면서 점점 서서가 도를 닦고 신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신적(神跡)을 드러냈다는 전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고대 문인들의 수필에 기록이 남아 있고, 민간 전설이 더 많다.

여기서는 강희(康熙) 연간의 기록 두 가지를 뽑아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강희 12년(1673년), 오삼계(吳三桂)가 청 조정에 반기를 들어 삼번(三藩)의 난을 일으켰다. 강희 13년(1674년) 과거 명조(明朝)에서 투항했던 장군 왕보신(王輔臣)이 이 틈을 타 청을 배반하고, 오삼계를 따라 청에 반기를 들었다. 강희 14년(서기 1675년), 강희제는 사람을 보내 왕보신이 바른길로 돌아오면 조정에서 절대 과거 잘못을 묻지 않겠노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왕보신은 결심을 굳히고 계속 반란을 일으켰다. 강희 15년(서기 1676년), 강희제는 공식적으로 도해(圖海)를 무원(撫遠)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급히 섬서(陝西)로 가서 왕보신의 반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야기는 대장군 도해가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던 도중 일어났다. 도해의 군대에 우영(于英)이란 병사가 있었는데, 도중에 돌풍과 뇌우를 만나 길을 잃고 낙오되어 부대와 흩어졌다. 우영 혼자 계곡에서 말을 타고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자 우영은 오늘 밤 나가지 못할 것을 예상해 내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이윽고 붉은 등불이 천천히 다가와 가까이 가 보니 흰 수염과 흰 눈썹을 가진 노인이 옛 그림 속 장수처럼 보였고 그 옷과 모자가 청조(淸朝)의 복장이 아니라 모두 이전 왕조의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다.

노옹(老翁)은 상냥하게 우영에게 길을 잃었느냐고 물었다. 우영은 그렇다고 하며 어르신께서 방향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노옹이 말했다.

“이 산은 황량하고 편벽한 곳으로 호랑이, 늑대, 맹수가 많고 큰길에서 50~60리 떨어져 있다. 자네가 빨리 나를 따라오면 큰길로 데려다주겠네.”

이에 노옹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우영은 말을 타고 따라갔다. 노옹은 한밤중임에도 숲이며 바위, 잡초 사이를 나는 듯이 걸었는데 속도가 아주 빨라 말을 탄 우영이 거의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참을 걸어 평탄하고 탁 트인 곳에 이르자 노옹은 걸음을 멈추고 손에 든 빨간 등롱을 우영에게 주며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앞에 큰길이 있다.”

우영이 그 빨간 초롱을 자세히 보니, 비단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었는데 안에는 양초나 횃불도 없었다. 전체 빨간 초롱은 겉과 속이 일체로 투명하고 밝았으며, 붉은 유리 모양이었고, 붉고 둥글며 밝았다. 우영은 속으로 이상하게 느껴 신인(神人)을 만난 것을 알고 공손히 은혜에 감사하고 노옹의 존함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노옹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바로 삼국시대 서서니라.”

우영이 듣고 몹시 놀라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려 하자 노옹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우영은 노옹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혼자 말을 타고 몇 리를 걸었는데, 과연 큰길에 올랐다. 이때 동녘이 점점 밝아지고 붉은 해가 막 떠오르며 손에 든 붉은 등롱도 꺼졌다.

다시 자세히 보니 그 붉은 등롱이 사발처럼 큰 붉은 살구로 변했다. 큰길을 따라 부대를 찾아간 우영은 자신이 만났던 기이한 일들을 소상히 말했고, 모두들 지금이 한겨울 날씨라 살구가 있을 수 없고 그렇게 클 수도 없다고 했다. 모두 그가 정말 은둔하여 수행하며 신선이 된 서서를 만났다고 여겼다.

말이 나온 김에 왕보신의 최후를 알아보자. 도해가 반란군을 평정하러 오자 왕보신이 이기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다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관대한 강희제는 여전히 왕보신을 평량제독(平涼提督) 및 태자태보(太子太保)라는 직함을 더해주며 위로했다. 하지만 왕보신이라는 사람은 항상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흉금을 헤아려 자신이 모반한 죄가 너무 크다고 의심했고, 강희제의 너그러운 자비는 모두 거짓으로 미래에 청산할 전조라 여겨 독배를 마시고 자결했다. 강희제는 왕보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말이 없었으며 그의 가족, 부하를 연루시키지 않았다. 실로 무량한 자비를 가진 청성조(淸聖祖)였다!

이 외에도 《견문수필(見聞隨筆)》의 기록에 따르면 강희 35년(서기 1696년), 광동 오지산(五指山), 즉 오늘날 광동성 하원(河源)시 오지산에서 어느 날 대낮에 학과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고 “향기로운 안개가 감돌았다.” 이때 모두들 한 신선이 공중에서 날아와 산속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바로 삼국시대 서서다. 은거한 후 1천여 년 수련해서 오늘 원만해 백일비승(白日飛昇 한낮에 하늘로 날아오름)하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신의 기적을 널리 선전해야 한다.”

자료출처:《이식록이편(耳食錄二編)》, 《견문수필(見聞隨筆)》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