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
【정견망】
인간 세상은 수명이 짧을 뿐만 아니라, 공명과 이록(利祿) 모두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는데 모든 배치는 전세(前世)의 인과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비록 운명에 정해져 있지만 금생(今生)에 큰 덕을 쌓거나 큰 업(業)을 지으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수명이 연장되거나 감소하거나, 부자가 되거나, 벼슬을 하거나, 재산을 잃거나, 녹을 잃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고서에 모두 기록이 있다.
세상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장사를 잘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미리 신의 계시[神示]를 받은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운명은 신의 계시와 정확히 일치할까? 여기서 세 가지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1. 명조 재상 양정화가 천문이 열리는 꿈
명조 헌종, 효종, 무종, 세종 등 네 황제를 모신 양정화(楊廷和)는 특히 무종과 세종 초기 수보(首輔), 즉 재상이었다. 그는 청렴결백한 관리로, 비록 “지위는 높았으나 거처는 초라했다.”
양정화는 1459년 사천 성도(成都)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성률(聲律 역주: 당시처럼 성조 규칙을 지키는 운문을 지을 줄 알았다는 의미)을 알았고 일곱 살 때 매일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열두 살 때 향시(鄕試)에 합격해 그 지역에서 이름을 떨쳤다.
어릴 적 어느 날, 양정화는 꿈에 천문(天門)이 크게 열리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천문 옆 기둥에 “제창시이공현(際昌時而公顯)”이라 쓰여 있었다. 그것은 명조(明朝)가 중흥할 때가 되었으니 양공(楊公)의 위상도 대단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양정화는 열두 살에 향시에 급제한 후 열아홉에 진사(進士)에 급제해 한림원 검토(檢討)라는 관직을 받았다. 효종 때 황태자였던 주후조(훗날의 무종)의 스승이 되었다. 무종은 즉위 후 그를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 소부 겸 태자태부(太子太傅), 진신전대학사(晉身殿大學士) 등에 차례로 임명했다. 1512년에 수보가 되었다.
무종이 붕어한 후 양정화는 권력을 농단했던 평로백(平虜伯) 강빈(江彬)을 제거하고 무종의 사촌 동생 주후총을 맞이하니 이가 바로 명 세종, 즉 가정제(嘉靖帝)다. 세종이 북경에 오기 전 38일간 조정의 정치를 도맡아 무종의 폐단을 혁파해 조정 안팎의 찬사를 받았다. 후세에 그에 대해 “대간신을 주살하고 큰 정책을 결단하고 위태로운 조정을 도와 사직(社稷)에 공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서한(西漢) 초기 여씨 세력을 몰아낸 주발(周勃)이나 북송(北宋) 인종 시기 후사가 없자 종실의 일원인 영종을 황제로 세운 한기(韓琦)와 견주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이름을 떨친 재상이다.
양정화는 세종 즉위 후 좌주국(左柱國)이 더해졌다. 그러나 ‘대례의(大禮議)’ 사건으로 세종과 뜻이 맞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528년 삭직되어 평민이 되었고, 이듬해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목종(穆宗) 때 관직이 회복되었고 태보(太保)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죽기 전에 다시 천문이 활짝 열리는 꿈을 꾸었고 두 사람이 깃발을 들고 그가 떠나는 것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양정화는 두 차례 꿈에서 천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으니, 그는 바로 천인(天人)이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목적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신인이 엄눌의 복록과 지위를 보여주다
엄눌(嚴訥)은 명(明) 세종 가정 20년(1541년) 진사가 되었고 서길사(庶吉士)가 된 후 한림원 편수를 부여받았다. 태상시(太常寺) 소경(少卿), 예부 좌·우시랑, 이부 상서 겸 무영전 대학사를 역임했다. 내각의 수보였던 서계(徐階)를 보좌했고, 엄숭이 수보로 있을 때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았다.
《명사·엄눌전》에는 엄눌이 이부를 관장할 때 엄숭이 조성한 부패 국면을 되돌리기 위해 동료들과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만들었는 기록이 나온다.
1) 공사(公事)에서 이부아문까지 사저를 얻지 못하게 하고,
2) 이부의 중간층인 낭중(郎中)·주사(主事)를 신중히 선택하여 뒷문을 여는 통로를 끊는다. 당시 말로 ‘무억분경(務抑奔競)’이라 했다.
[역주: 분경이란 좋은 벼슬을 얻기 위해 실권자를 찾아가 로비하는 것을 말한다. 무억분경은 분경을 힘껏 눌렀다는 뜻이다.]
3) 인재를 선발하는 데 자격에 구애받지 말고, 주현 하급 관리라도 치적이 우수하면 파격적으로 승진시킨다.
서계(徐階)의 지지와 엄눌의 노력하에 관리들의 부패가 일신되었다. 엄눌은 “이부상서와 내각수보가 합심해야 일이 잘 풀린다”고 여겼고 “내가 이부를 관장한 2년동안, 마침 서계가 내각을 주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 원하는 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565년 엄눌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세종이 승하하자 복귀하지 않고 노부모를 모셨다. 1584년 세상을 떠나니 74세를 누렸고 소보(少保)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일찍이 엄눌이 벼슬길에 올랐을 때 꿈에 한 신선이 종이 두 장을 보여주는데 한장에는 “문정(文正)”이라 쓰였고 “차이수화정서상공(此以授華亭徐相公 이것을 화정 서상공에게 수여한다는 뜻)”이라고 했고, 다른 종이에는 “문정(文清)”이라 쓰여 있었으며 “이수상공(以修相公)”이라고 했다. 화정(華亭)은 바로 서계이며 사후에 시호가 ‘문정(文貞)’이었고다. 여기서 ‘정(貞)’은 ‘정(正)’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엄눌이 세상을 떠난 뒤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필획이 문청(文淸)과 비슷하다. 신선이 미리 엄눌에게 그가 서계가 조정을 주재할 때 중신이 되어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보좌했다고 알려준 것이다. 역시 신(神)의 말은 헛되지 않다.
3. 신이 계시한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한 진헌
송 휘종 때 진헌(陳軒)이란 인물이 있었다. 자는 원여(元輿)이고 복건 건양(建陽) 출신으로 용도각(龍圖閣) 직학사(直學士)였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진헌은 84세에 사망하였으며 재임 중 용감하게 직언하고, 자주 글을 올려 조정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며, 송 휘종에게 청정하게 정치하고 한문제(漢文帝)와 한경제(漢景帝)를 본받아 절약을 실천하도록 권했다.
진헌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을 때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느 관청에 도착했다. 관청 앞에는 두 개의 높은 문이 있었고 문 위에는 각각 글씨가 적힌 금색 현판이 있었다. 하나는 ‘좌승진헌(左丞陳軒)’이고, 다른 하나는 ‘우승황이(右丞黃履)’였다. 이런 식으로 하늘은 그에게 미래의 벼슬길을 알려주었다.
후에 진헌은 인종(仁宗) 가우(嘉佑) 8년(1063)의 과거시험에 진사 2등으로 급제하여 평강절도추관(平江節度推官), 예부낭중(禮部郞中), 중서사인(中書舍人), 병부시랑(兵部侍郞) 겸 시독을 거쳐 최종 관직은 용도각직학사에 이르렀다. 가우 연간에 같이 진사가 된 황이는 꿈에서 보듯 철종 때 상서우승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자신의 관운은 신이 보여준 것과 다른데 황이는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일까? 만년의 진헌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민 출신으로 벼슬길에 들어갔고 평생 남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지금의 벼슬은 꿈에 본 것과 맞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내가 항주에서 태수로 있을 때, 한 고관 귀인이 노병에게 매우 화가 나서 그를 관부로 압송해 장형에 처할 것을 원했다. 이 노병은 칠십이 넘었으니 국법에 따르면 장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가족이 돈을 써서 속죄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 고관 귀인이 그걸 알고 편지를 써서 나를 비난했다. 부득이 노병을 불러 매질을 하라고 명령했다. 노병은 매를 맞아 죽었다. 이 일은 이미 20년이 지났고, 나는 항상 죄책감에 자책했다. 국법을 어기고 사사로운 정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천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벼슬이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
진헌이 꿈을 꾸었을 때는 송 인종 때였는데, 당시 좌우승은 직급을 나타내는 기록관일 뿐 직명은 아니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정부의 대권을 장악한 구체적인 관직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하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세 고위 관리들의 이야기는 후인들에게 사람의 녹봉과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지만, 만일 덕을 해치는 일을 하면 복도 깎이게 된다. 이것은 지금 중국 본토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한 고급 관리들에게 경고가 되지 있을까? 이들의 복이 다 소진되면 과연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참고자료: 《용당소품(湧幢小品)》, 《소림필담(巢林筆談)》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0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