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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연심 (9): 번뇌가 바로 보리

요연(了緣)

【정견망】

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원숭이들은 왕이 있고 또 믿을 만한 의지처가 생기자 날씨의 영향도 받지 않고 외사(外邪)의 침범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은 늘 너무 빨리 지나가고, 단번에 300~500년이 소리 없이 지나갔다.

좋은 날은 흔히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무슨 설레는 자극이 없으며 단지 안일과 향락만 가득하다. 정말로 매년 오늘과 해마다 오늘과 똑같아 천편일률적으로 좋은 시간을 보낸다면 복(福)을 누리고 나서 막연히 되돌아볼 때 원숭이의 삶 역시 이러한데, 늘 좋은 날이 반복되지만 오히려 특별할 게 전혀 없다. 설령 이렇게 천 만 년이 지난다 해도 모두 똑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 원숭이의 삶은 단지 한 글자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단순한데 바로 상쾌(爽)함이다.

그러나 세월은 마치 낫과 같아서 매 분 매 초마다 생명을 거두어들인다. 만약 제 때에 손실을 방지하지 않고 무상(無常)을 고려하지 않으면 인생이 끝날 때 그것은 거울에 비친 꽃이나 물에 비친 달에 지나지 않아 심지어 거품마저도 없을 것이다.

이날 미후왕(美猴王)은 문득 마음에 번뇌(煩惱)가 생겼다. 즐거움이 극에 달하니 슬픔이 일어나 눈물이 흘러나왔다. 뭇 원숭이들은 겁에 질려 대왕(大王)이 왜 번뇌하는지 몰랐다. 원래 원숭이 왕은 즐기는 가운데 먼 근심이 하나 있었다.

뭇 원숭이들이 좀 의아해하며 웃으면서 말했다.

“대왕님께서는 정말 만족을 모르시는군요! 저희는 날마다 선산(仙山) 복지(福地) 오래된 동굴 신주(神州)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무슨 기린이며 봉황의 간섭도 받지 않고 또 인간 세상의 왕위(王位)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며 무량한 복이 있는데 어찌하여 먼 앞날을 걱정하십니까? 이는 얼마나 많은 세인(世人)들이 동경하는 삶이고 하늘이 낳고 땅이 길러주니 힘들게 일할 필요도 없고 옷이며 음식을 걱정할 필요도 없으며 신선의 동부(洞府)에 사니 무슨 호화로운 저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관건은 여전히 아무도 관할하지 않는 지역에 있으니 염라왕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관할도 받지 않고 세간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오직 죽지만 않으면 자유자재로 먹으면서 죽음을 기다리며 한평생 편히 살 수 있습니다! 취한 듯 살아가고 꿈꾸는 듯 죽으니 얼마나 편안합니까! 그럼에도 왜 만족하지 못하시나요?”

그러나 원숭이 왕의 영성(靈性)은 그리 오랫동안 안일함에 묻혀 있지 않았고,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세상사의 무상함과 나이가 들어 혈기가 쇠약해지면 어느 날 염라대왕의 손에 떨어지게 되고 어디로 갈 것인지 스스로 정하지 못하게 됨을 생각했다.

“오호라 슬프구나, 일단 죽으면 염라왕의 손에 떨어져 어디로 갈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구나. 오호라 일단 몸이 죽으면 세상을 헛되이 산 것이니 천도(天道)나 인도(人道)에 오래 머물 수 없지 않느냐?”

뭇 원숭이들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근심이 되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며 삶의 무상함을 근심했다.

사람에게 먼 근심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생긴다고 했다. 취경인(取經人)의 영성을 상징하는 미후왕은 선석(仙石)이 갈라지면서 세상에 나온 그 순간 곧바로 하늘과 땅을 놀라게 했고 상계(上界)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취경(取經)이란 대업(大業)의 서막을 알린 것이니 또 어찌 오랜 시간 안락한 둥지에서 깊이 빠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첫 번째 번뇌가 나타날 때 영성(靈性) 중의 명오(明悟 밝은 깨달음)를 격발시켰다. 생과 사의 무상함을 밝게 깨달았으니 소위 자유자애의 국한성과 자신의 결함을 똑똑히 깨달았고 천지의 결함을 똑똑히 알았다. 천지는 본래 완전하지 않은데 또 어찌 완벽한 원숭이의 삶이 있겠는가? 생명의 결함은 바로 무상(無常)으로 명(命)속에 수명이 부족한데 이를 명결(命缺 수명의 흠결)이라 한다. 결국 인생은 고달프고 짧은 것으로 일체 아름다움은 마치 헛깨비나 거품 또는 그림자와 같다.

수련에서 걷는 길은 바로 누락을 찾아 결함을 보완하는 것으로, 결실(缺失 모자람)이 있기에 비로소 번뇌가 있고 번거로움이 있으며 각종 마난(磨難)과 구하려 해도 얻을 수 없는 삶의 집념(執念)이 생긴다. 더욱이 집념에서 각종 명리정구(名利情仇 명예 이익 사랑 원수)를 파생시켜 한 가닥 순정(純淨)한 마음을 변이시키고 왜곡시킨다. 욕망이란 구덩이는 메우기 어렵고 사람이 자아를 똑똑히 구별하지 못하게 하는데 욕망에 이끌려 안일한 삶에 빠지면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한다.

[역주: 마난(磨難)과 마난(魔難)은 개념이 다르다. 전자는 마치 맷돌로 물건을 갈 듯이 끊임없이 감당하고 버티는 가운데 저절로 닦이는 것이라면 후자는 마(魔)가 개입해 난을 가중하기에 괴로움도 크지만 층차 제고가 빠르고 위덕을 수립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수개(修改) 과정에 경문에 나오는 대부분의 마난(磨難)을 마난(魔難)으로 고치신 것에는 사부님의 가지(加持)와 많은 깊은 함의가 있으니 한글 발음이 같다고 무심코 넘기지 말아야 한다.]

각종 번뇌가 닥쳐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결실을 보완하고 욕망을 만족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는 서쪽 담을 헐어 동쪽 담을 보충하는 것과 같으니 결과는 바로 사는 게 별 볼 일 없다. 어쨌든 자신이 선천에 가져온 복덕(福德)에 정해진 수(數)가 있으니 이것을 다 소모하고 나면 수명도 끝난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저 복보(福報)를 미리 가불해 수명을 손상할 뿐인데 원래 백 년 동안 누릴 복분을 멋대로 낭비해 수십 년만에 고갈시키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업력뿐이다. 만약 세인이 진정으로 이 이치를 알고 지나친 물질적 향수는 수명을 가불해서 바꿔온 것임을 안다면 정말로 울고 싶어도 울 곳조차 찾지 못할 것이다.

인성(人性)의 자사(自私)가 걷는 것은 사람의 길이며 부족한 것을 덜어내서 남는 것을 떠받든다. 하지만 물질은 영원히 심령(心靈)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으며 이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길을 확대하고 가중시킬 뿐이다. 무사(無私)만이 하늘의 길인바 남는 것을 덜어내 부족한 것을 보완한다. 명리를 담담히 여기고 편안하고 차분해져야만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고 심태를 바르게 해야만 번뇌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찾을 수 있고 안으로 찾아 결함을 보완할 수 있다. 밖으로 찾아 모순을 격화시키지 않는 것만이 진정으로 번뇌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수련 과정에서 복보(福報)가 부족하면 지혜로 보충하고, 지혜가 부족하면 오성(悟性)으로 메꾼다. 오직 도심(道心)을 개발해 수련하려는 바람이 있다면 온 하늘의 신불(神佛)이 모두 와서 도와줄 것이다. 생명의 국한은 사람의 인지(認知 인식하여 아는 것)로 조성된 것이니, 정법(正法)을 찾아 얻고 바른 믿음[正信]을 지니며,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고, 관념을 개변시켜, 사람의 인지를 신(神)의 인지(認知)로 전변시키는 것이 바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며 천지를 교체하는 과정이다. 정념(正念)이 그 한 층까지 올라가면 인지(認知)는 곧 그 한 층의 지혜를 쳐서 열어주고 정신(正神)의 에너지를 일으켜 법을 바로잡으니 환우(寰宇)에 불가능이란 없고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무슨 사악을 제거하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없고 마(魔)를 제거하고 도(道)를 수호해 정법제자의 사명을 이행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오성을 제고하는 관건은 시시각각 안으로 찾는 법보(法寶)를 운용해서 장악하는 것이다. 무슨 구구 팔십일난(八十一難)이든 상관하지 말고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만물이 모두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내 마음에 누락이 있다면 만물이 창궐할 것이다. 바로 사람 마음에 누락이 있고 천도(天道)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삼계(三界)는 비로소 수련할 수 있다. 법에서 깨달은 지혜를 배워 안으로 생명의 흠결을 찾아서 보다 높은 명오(明悟)를 격발해 그런 누락을 보완한다면 이것이 바로 수명(修命 명을 닦는 것)이다.

성명쌍수(性命雙修) 공법의 오묘함은 바로 보다 높은 법리를 밝게 깨닫는 동시에 생명의 두 번째 계통 경락 역시 동시에 작동해 우주의 대응하는 기제(機制)와 연결되어 육신을 더 고에너지 물질로 전화하도록 이끈다. 또한 사상(思想)과 육신(肉身)이 동시에 연계되는데 오직 육신이 좀 늦게 동화하면 심성을 제고한 후 5가지 공법의 연공을 통해 에너지를 전화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법에 동화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만(圓滿)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명의 흠결은 바로 오성(悟性)을 격발해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바로 소위 말하는 번뇌가 바로 보리[煩惱即菩提]다. 각종 번뇌는 사람 마음의 집념(執念)에서 파생된 것으로 각 로(路)의 요마귀괴(妖魔鬼怪)와 대응하는 것은 바로 사람 마음의 험악(險惡)이다. 수련 원만은 바로 근원(根源)상에서 원인을 찾는 것으로 백 가지 종류의 병에는 백 가지 종류의 치료법이 있지만 그 어느 길이든 오직 마음의 틈을 찾고 법에서 깨달아 극한의 지혜를 돌파해 관념을 전변하고 보다 높은 우주 층면의 인지(認知)를 쳐서 열어야 한다. 법속의 바른 깨달음[正悟]은 바로 근원상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제고된 후의 무량한 지혜는 모두 누락을 찾아 결함을 보완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 번뇌가 여전히 번뇌인가? 확실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닌가! 그 마난(魔難)이 여전히 마난이란 말인가? 이는 우리더러 앞으로 전진하도록 채찍질하는 동풍(東風)이자 일체 집착을 융화시키는 연단로(煉丹爐)이자 진금(真金)을 단련해 내는 삼매진화(三味真火)가 아닌가!

창세주께서는 환우(寰宇)에서 이렇게 많은 찌꺼기들을 찾아 모아 진금(真金)을 용련(熔煉)하셨고, 무수한 극한를 돌파해 대법제자의 원만을 성취하게 하셨으며,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우주를 개창하셨다. 이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지구의 생명은 한 차례 철저히 정화를 거쳐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제거해야 한다.

만고의 기연이 역사적으로 작동되었고 5천년 신전문화(神傳文化)가 풀어낸 것은 수련(修煉)이란 두 글자 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한 부의 서쪽 여행은 역사상 현장(玄奘)이 취경한 과정인 동시에 생명의 제2차 계통이 승화되고 단련되는 과정이다. 육신의 경험이 역사적으로 기재 되어 있다면 주원신과 부원신의 협력해 한 몸 한 마음으로 요마(妖魔)를 베고 항복시키며 본진(本真)을 깨달아 천인합일에 이르는 무수한 기제를 작동시키는 과정은 소설에 기록되어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