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顏丹)
【정견망】
중국 고대에는 의술이 높을 뿐만 아니라 덕을 중시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칭송받는 민간 의사들이 많았다. 인술(仁術)을 행한 이들의 공덕에 대해 《태미선군공과격(太微仙君功過格)》이라는 책에는 “부적, 침, 약(符法針藥)으로 중병을 구하면 한 사람당 열 개의 공(功)이 있고, 작은 질병을 고치면 다섯 가지 공이 있으며, 약(藥)을 한 첩 쓰면 하나의 공이 있다.”고 평했다.
당대(唐代) 명의 손사막(孫思邈)은 “고통받는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어두운 길 한복판에서도 스스로 복이 많다고 느낄 것이다”라고 했다. 청사에 이름을 남긴 재상 육지(陸贄)도 “의가(醫家 의사 집안)의 후예들은 대부분 조상의 은덕을 받아 영예를 얻고 과거에 붙었으니, 이는 천도(天道)의 인과응보를 증험한 것”임을 발견했다. 즉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면 좋은 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송대(宋代) 명의 장고(張杲)는 말했다. 의사가 “만약 사람을 구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인연을 맺어 복을 쌓으면 암암리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명대(明代)에도, 많은 민간 의사들이 그들의 선한 행동으로 복을 받았는데 현지 백성들이 이런 역사적 순간들을 목격했다.
늦게 아들을 얻은 명의 세가징
《광동통지(廣東通志)》에 따르면 남해현(南海縣)에 세가징(洗嘉徵)이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익혀 서당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중에 세상 밖의 고인(高人)을 만나 의술을 전수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병을 치료해 주었고 항상 즉효가 있었다. 그는 매일 약 100제만 처방할 뿐 자신이 얼마나 벌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역주: 중국과 한국의 제(劑) 개념이 다른데 중국에서는 보통 하루 먹을 분량을 한 제라 하고 한국에서는 열흘 분량을 한 제라 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100제란 환자가 100일 먹을 수 있는 약의 분량을 말하며 한국식으로 하면 대략 10제 정도 된다.]
그의 맥술(脈術)은 현지에서 일절(一絶 가장 뛰어나다는 뜻)이라 불렸으며, 맥을 짚은 후 즉시 병정, 병의 원인, 환자의 생존 여부를 진단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그의 집 뜰에는 이미 신발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명문가도 있고 가난한 집안도 있었지만, 그는 문벌과 집안 형편을 보지 않고 오로지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왕(王)씨 성을 가진 한 장군이 괴질에 걸려 다른 의사들이 속수무책이었는데 그를 모셔간 후 약 한 첩만에 다 나았다. 그 장군은 행군길에 산길을 걸어야 했고, 숲의 더러운 기운에 습격당할까 봐 세가징에게 동행하게 했다. 그들이 성공적으로 산을 넘어 강가에 도착한 후 장군은 매우 감격하여 후한 선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내 세가징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중에 세가징은 자기의 학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남이 보낸 현판을 모두 거두었다. 그는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했으며 다시는 다른 사람을 진찰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여, 내년에 있을 과거시험에 참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매일 그의 집 안과 밖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몇 달 후, 그가 다시 문을 열고 환자를 치료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의술이 퇴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우 진보했음을 발견했다. 많은 환자들이 그를 화타와 편작이 환생했다고 칭찬했다. 후에 그는 과거 성적도 괜찮아서 현에서 태학에 가서 공부하도록 허락받았다.
세가징은 이미 오십이 넘었지만 여전히 자손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꿈에 천제(天帝)가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인술(仁術)을 시행해 많은 사람을 살렸으니 하늘이 장차 너에게 자식을 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아들을 여럿 낳았다. 그곳 사람들은 그가 수년간 인명을 구한 데 따른 복이라고 말했다
화재를 면한 명의 임이기
《절강통지(浙江通志)》에 따르면 항주에 큰 자선가가 있었는데 소아과 의원 임이기(任二琦)로, 자는 서암(瑞庵)이었다. 북송의 명신 한기(韓琦)의 후손인데, 조상이 임씨 성을 가진 유명한 소아과 의원을 따라 의학을 배웠다는 이유로 임씨 성으로 바꿨다. 뛰어난 의술이 대를 이어 이어왔는데 그의 세대에 이르러 더욱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이르렀다.
예로부터 소아과는 ‘아과(啞科)’라 불리는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현지의 소아과 명인 임이기는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아픈지 알 정도로 놀라운 관찰력을 자랑했다. 그가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하니 아이가 먹자마자 나았다. 그는 가난한 집 아이들도 잘 보살폈다. 그들의 병을 치료할 때 진료비나 사례금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치료에 필요한 약재도 무료로 주었다.
어느 날, 도시의 한 부자가 하인을 보내 그를 청했다. 그가 입구로 갔을 때, 하인 옆에 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매우 난처해 보이는데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바로 다가가서 물어보니,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집안의 아이가 두드러기에 걸려 상태가 매우 위급하여 의사를 찾아가 진찰을 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않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임이기가 듣고는 그 하인을 먼저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두말없이 그 사람과 그의 집으로 갔다. 아이를 진찰한 후 그는 또 사람을 보내 약재를 보냈다. 비록 약재에 값비싼 인삼이 들어갔지만 그는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매일 외출할 때, 그 집을 지나가기만 하면, 임이기는 아이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들어가 보았다. 그 가족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역주: 일반적으로 중국 고대의 의사는 환자를 찾아가 진맥하고 약을 처방한 후 진료비를 받았으며 환자가 처방전을 가지고 약방에 가서 약을 사서 직접 약을 달여 먹었다. 임이기는 진료비는 물론이고 약재비까지 받지 않은 것이다.]
임이기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줄곧 계모에게 효성스러웠다. 그는 또한 당당하게 세 여동생과 한 남동생의 혼사를 치러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 불길이 두 번 연달아 그의 집을 향해 타올랐으나, 매번 갑자기 역풍에 의해 꺼지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았다. 그의 집이 큰불을 막아 주위에 많은 집들이 화재를 면했다. 이를 알게 된 이웃들은 “당신이 효심과 인의를 중시하고 선행을 베풀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준 복입니다!” 훗날 두 아들도 공명을 이루었고, 아버지의 덕행과 의술도 물려받았다.
도둑도 죽이지 않은 명의 곽민안
《소현지(巢縣志)》에 따르면 현지에 곽민안(郭民安), 자는 화대(華台)라는 의사가 있었다. 예전에 현의 수재였는데, 후에 의서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의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맥술에 정통하여 처방도 꽤 신기한 효험이 있었다.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이웃 현의 사람들까지 잇달아 그를 찾아와 치료와 약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의술을 이용해 이윤을 챙긴 적이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자주 구제했으며, 환자를 가장 가까운 친척처럼 대했다.
숭정 8년,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소현도 도둑의 약탈을 당했다. 순방을 맡은 현령과 일부 사대부들이 끌려 나와 참수됐고, 곽민안도 그 속에 있었다. 칼을 내리치려 할 때 옆에서 어느 도둑이 소리 질렀다. “그는 팔십이 넘었는데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를 죽이는 것은 더욱 헛수고입니다!” 도적의 패거리들이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후, 곽민안은 그제서야 그 도둑이 바로 그가 작년에 길에서 만난 환자였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은 당시 병을 고칠 돈이 없었는데, 바로 곽민안이 그에게 준 약으로 그의 병을 고쳤다. 그렇다면 그 도둑의 훗날의 보답은 곽민안이 그해에 선행을 심어 얻은 보답이 아닌가.
참고 자료: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4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