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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으로 가난한 이를 구해 복을 받은 명대 의사들

안단

【정견망】

중국 고대의 의사들은 세상과 백성을 구제하고, 위험에 빠진 자와 곤궁한 자를 도우려는 마음을 품었다. 풍부한 사료에서 쉽게 볼 수 있다시피 “욕심도 없고 구함도 없이 먼저 큰 측은지심을 내어 널리 생명의 고통을 구하겠다는 맹서를 했다.”

또 손사막이 쓴 《대의정성(大醫精誠)》에는 “질병이 있어 구원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귀하고 천함, 가난하고 부유함을 따지지 말고, 남녀노소 친소관계를 따지지 말며 민족이나 어리석고 똑똑함을 가리지 말고 모두 일률적으로 가까운 가족처럼 여겨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사실 중국 고대의 많은 의사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도(道)가 먼저고, 술(術)은 나중이며 도를 닦고 선을 행하며 덕을 쌓음은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자신과 후손들이 하늘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

노자는 “사람이 양덕(陽德)을 행하면 사람이 스스로 갚지만 사람이 음덕(陰德)을 행하면 귀신이 갚는다.”고 했다.

[역주: 여기서 말하는 양덕과 음덕은 겉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선행이 양덕이라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남몰래 하는 선행이 음덕이다.]

이것은 명대의 꽤 유명한 몇몇 의원들에게 남김없이 표현되었다

당시 절강성 임안(臨安)에 추관(鄒觀)이란 의원이 있었는데 호는 개암(介庵)이었다.

그는 의술이 뛰어났지만 마음 속에는 병 고칠 돈이 없는 사람들을 늘 염려하고 있었다.

한 번은 이웃 마을 사람이 정독[疔毒 역주: 주로 얼굴에 나는 작고 깊은 피부병의 일종. 독이란 병이 심한 것을 뜻한다]에 걸린 적이 있었다. 추관이 즉시 약재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갔다. 한 차례의 세심한 치료를 통해 그는 곧 완쾌되었다. 그의 집은 이미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는데, 유일한 가져올 것은 밖에 매어둔 소 한 마리가 있었다. 하지만 추관은 아무것도 받지 않고 맨손으로 돌아갔다.

2년 후 어느 날, 그가 외부에 일을 나갔다가 마침 그 마을을 지나갔다. 당시 날이 어두워졌는데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그의 갈 길을 막았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소 한 마리가 옆 풀숲에서 뛰쳐나와 맹호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그 호랑이는 황급히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 주인도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가 자세히 보니, 지금 그는 바로 2년 전에 자신이 약재를 가지고 와서 그의 정독을 치료해 준 추 선생이었다! 뜻밖에도 그 집의 소가 한눈에 이 큰 은인을 알아본 것이었다. 이번에 맹호를 쫓아내고 추관을 구한 것도 어쩌면 주인을 위해 은혜를 갚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또 운남 학경현(鶴慶縣)에 이덕린(李德麟)이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그는 의술이 뛰어나고 맥을 짚는데도 정통했다. 많은 난치병들은 오직 그만이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그를 찾는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하(洱河 강 이름) 동쪽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앓아 누웠다. 이덕린(李德麟)은 두말없이 치료하러 찾아갔다. 그는 한 푼도 받지 않고 바로 그 사람의 병을 고쳤다. 얼마 후 어느 날 이덕린은 배를 타고 이하를 건너게 되었다. 나루터의 배가 막 떠나려 했기에, 그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여 기슭으로 걸어갔다.

그때 길가에 있던 집에서 갑자기 대야를 든 부인이 나왔다. 그녀는 밖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대야의 물을 버렸다. 때문에 이덕린은 온몸이 흠뻑 젖어 어쩔 줄 몰랐다. 그때, 남편이 방에서 나와 눈을 들어 보니, 바로 앞에 이가 바로 지난번에 자신을 무료로 치료해 준 이 선생이 아닌가! 그는 큰 은인을 알아보고는 즉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아내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집에서 하룻밤을 묵도록 정성껏 초대했다.

다음 날이 되자 나루터에서 어제 그 배가 강 위에서 전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덕린이 이 재난을 피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가 큰 덕을 쌓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진료비를 받지 않는 의원뿐 아니라 자기 돈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의원도 있었다. 남경 상원현(上元縣)에 요간(姚侃)이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자는 문강(文剛)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이씨 성을 가진 명의에게 의술을 배웠고, 곧 선생님의 진수를 전해 받았다.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 않는 그런 질병들은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즉시 치료할 수 있었다.

그는 의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의리도 중시했다. 그는 가까운 이웃 중 생활이 가난하고 돈이 없어 장례를 못 지내는 사람을 보면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었다. 그 후, 그의 아들은 진사에 급제했고, 곧 관직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공부(工部)의 주사(主事)가 되었다가 곧 영주지부로 승진하였다. 아버지의 너그러운 마음을 이어받아 벼슬한 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요간은 말년에 아들 덕분에 황제의 신임을 받아 예부낭중(禮部郞中)에 올랐다.

이런 의원은 절강성 처주(處州)에도 있었는데 이름이 허성인(許成仁)이고 자는 자미(子美)였다. 그는 원래 유학(儒學)을 공부하다 나중에 의술을 닦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그는 결코 명예와 이익을 따지지 않았으며, 병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 스스로 숯과 약을 사서 그들을 위해 약재를 요리하고 몸을 보양하도록 하였다. 그는 오로지 환자를 위해서만 생각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신의 돈을 내놓고, 돈을 절대 남겨 저축하지 않았다. 그가 정성껏 치료한 환자는 완치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덕행이 출중하여 현·군에서 모두 그에게 편액을 보내어 표창하였다. 이후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고, 손자도 태학에 선발되어 공부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그가 덕을 쌓고 선을 행한 후의 복이라고 말했다.

강소 무석(無錫)에는 이름이 시교(施敎), 자는 자승(子承), 호는 심국(心菊)이라는 의원이 있었다. 그는 비록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지만, 자라서 과거시험에 번번이 불합격하였다. 그는 독서를 매우 좋아해서 한가할 때 그 어렵고 어려운 고대 의서들을 꺼내서 연구했다. 시간이 오래되어 의술도 많이 늘었다. 그는 맥을 짚어서 병의 원인을 빨리 알아낼 수 있었다. 환자는 그가 처방한 약을 먹으면 항상 즉시 나았다.

그는 그곳에서 꽤 명성이 높았지만, 여태껏 이것으로 명리를 추구한 적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러 오면 보수를 받기는커녕 스스로 돈을 내 그들을 도왔다. 환자가 없을 때는 가르침도 매우 친절하고 베풀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그는 항상 아낌없이 주머니를 열었다. 훗날 그의 자손이 번창하여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家門必有慶)”는 것이다.

참고자료: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