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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 시기 ‘원허지술’을 지닌 두 관상가

안단

【정견망】

관상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일종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관상·골상·기상(氣相) 등 다른 사람의 외적인 정보를 통해 생사화복(生死禍福)과 귀천요수(貴賤夭壽)의 앞뒤를 낱낱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관상가[相士]들은 제왕의 즉위 전후의 기이한 현상과 운세, 나아가 왕조 교체 전후의 미세한 징후까지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소위 ‘원허지술(袁許之術)’이란 한대의 허부(許負)가 유방(劉邦 훗날의 고조)을 보자마자 그가 초대 천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당대 원천강(袁天罡)은 포대기에 싸인 무측천을 보자마자 그녀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유래한다. 이후 이 단어는 역사책에 반복적으로 쓰여져 왔으며, 역대 왕조와 선비들의 뛰어난 관상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후당 명종이 귀하게 될 것임을 오래 전에 안 관상가

후당(後唐)의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이 황제를 칭하기 전에, 한 술사가 그에게 황제의 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술사의 이름은 주원표(周元豹) 였는데, 그는 연(燕 지금의 북경 근처) 땅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때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사부를 따라 10년 동안 떠돌아 다녔다. 스승은 그의 천성이 순진하고 착하며 고생을 겪는 걸 보고 그에게 관상술을 물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고향 진양(晉陽)으로 돌아오자 노징(盧澄)이라는 도사가 친구 두 명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는 세 사람을 만나본 후 조용히 고향 친구 한 명에게 말했다.

“비록 세 사람 모두 마음은 도를 향한 사람인데 앞날의 운명은 너무 다르다. 노 도사는 분명 존귀하게 될 것이고, 두 도우(道友)는 단명할 상입니다. 내년에 꽃이 필 때면 아마 고인(故人)이 될 겁니다.”

과연 이듬해 봄이 되자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20년 후, 노 도사는 임금에 의해 관직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주원표가 진양 판관을 만나 말했다.

“당신은 닷새 이내에 만 리 밖에 파견되어 공무를 보시게 될 텐데 한 번 가시면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며칠 뒤 그가 외지에서 술에 취해 옷깃에 목이 졸려 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당조 말기 여러 왕을 보필했던 권신 장승업(張承業)도 진양 사람이었다. 그는 관상을 잘 보는 주원표가 고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주 그를 찾아갔다. 많은 일들이 적중했고, 그때부터 장성업은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당시 이사원은 궁에서 한직만 맡았는데 장승업은 그를 각별히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는 이사원이 과연 큰 임무를 감당할 자가 될지 궁금하여 주원표를 찾아보았다. 그는 이사원에게 옷을 바꿔 입고 시위대 뒤편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게 했다. 주원표는 힐끗 쓸어보더니 맨 뒷줄에 서 있는 이사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골상을 보건대 어떻게 이런 한직을 맡을 사람이 아닙니다!”

장승업은 깜짝 놀라 주원표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장차 벼슬이 어떻겠소.“

주원표는 한참 생각 끝에 한마디만 말했다.

“그의 마지막 벼슬은 진주(鎭州 오늘날의 하북) 절도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종 즉위 전의 마지막 벼슬이었다.

명종의 초대 황후인 하씨(夏氏)는 일찍이 그의 음식과 기거를 돌보는 시첩(侍妾)이었다. 하씨는 이사원이 황제가 되기 전에 그의 명령을 거역해 늘 벌을 받곤 했다. 주원표는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다.

“이 여자는 제후 부인이 될 것이고, 장차 모친이 아들 덕분에 귀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원이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하씨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후에 그녀는 과연 진국 부인으로 봉해졌고, 이어서 지위가 올라갔다. 두 아들 중 한 명은 진왕(秦王)에 봉해졌고, 한 명은 송왕(宋王)에 봉해져 결국 황위를 계승했다.

예전에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이 재위에 있을 때 이미 주원표를 진양에서 관리로 삼으려고 했다. 명종이 즉위한 후 갑자기 이 일이 생각나서 신료들에게 말했다.

“방사 주원표는 도술이 꽤 있다. 몇 년 전에 짐의 관상을 보아주었는데, 많은 일이 영험했다. 지금 그를 궁으로 불러들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어떤 신하는 이 일이 옳지 않다고 여겨 명종에게 간했다.

“관상술은 주원표가 능하지만 폐하는 원래 고귀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왕위에 올랐으니 더 이상 그에게 점을 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를 조정에 들이면, 명리를 다투는 권신들이 어떻게든 그를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힐 것입니다.”

명종이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주원표에게 많은 금과 비단을 후하게 하사하여 광록경이라는 한직을 사직하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송 고종의 남쪽 천도를 미리 안 관상가

송조가 둘로 나뉘어 남북의 서로 다른 지역과 시기를 형성했다. 북송에서 남송으로 바뀐 상징적인 사건은 단연 고종의 남쪽 천도(南渡)다. 다만 당시 고종은 아직 양주(揚州)에 머물며 장차 남도(南渡)가 일어날 것을 알지 못했다. 관상쟁이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남도, 심지어 남송도 없었을 것이다.

이 관상가의 이름은 묘응방(妙應方)인데, 그의 관상술은 입신의 경지에 달해 조야에서 꽤 유명했다. 당시 그는 양주에 있는 장준(張浚)의 저택에서 손님으로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장준에게 말했다.

“오늘 성에 들어가 보니, 큰길의 사람들이 십중팔구 죽을 기색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금나라 병사가 곧 범할 불길한 징조입니다. 폐하께 즉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라고 권하십시오.”

묘응방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음을 장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고종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마침 그날은 정월 대보름날이라 고종은 밤이 되면 등불을 구경할 작정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금병(金兵)이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종이 어가를 타고 떠나자마자 금나라 군대는 성에서 살계를 시작했다.

참고자료:
《구오대사(舊五代史)》71권
《흠정고금도서집성》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