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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심투골(剜心透骨)의 고통

소우(小宇)

【정견망】

“완심투골(剜心透骨)”이란 성어(成語)를 검색해보니 기본적으로 수련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직역하면 “심장을 도려내고 뼈를 뚫는다”는 뜻으로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고통스럽기에 심장을 도려내고 뼈를 뚫는다는 표현을 썼을까? 수련자는 또 왜 이렇게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자체가 각종 크고 작은 고생을 겪음을 피할 수 없는데 때문에 ”완심투골“의 고통을 많은 사람이 체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고통의 실질은 어디서 오는가?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똑똑히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박대정심(博大精深)한 중국 신전문화(神傳文化)에서는 일부 수련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이 고통을 묘사하고 또한 그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서유기》에서 당승(唐僧)의 81난을 두루 살펴보면 대부분 성명(性命)과 관련된 생사관(生死關)인데, 앞길에는 늘 당승의 고기를 먹으려는 요정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당승이 겪었을 고통의 정도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초반부에 당승은 늘 자신의 사심(私心)에 제한되어 오공을 믿지 않았고 또한 이들 요마귀괴(妖魔鬼怪)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고통은 심장을 도려내고 뼈를 뚫지만 또한 겨냥성이 있다.

“백골정을 세 번 치다[三打白骨精]” 이야기에서 당승은 배가 고파 오공에게 동냥을 얻어올 것을 재촉한다. 하지만 오공은 이곳은 온통 황량한 교외 지역이라 음식을 구할 곳이 없다고 대답한다. 당승은 불쾌하게 여기며 오공의 게으름을 꾸짖으면서 말한다.

“이 원숭이 녀석아, 네가 양계산(兩界山)에서 여래부처님의 돌 상자 안에 눌려 말도 할 수 없고 걸을 수도 없었는데, 내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계(戒)를 받아 내 도제(徒弟)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노력하지 않고 늘 게으른 마음만 품는 것이냐!”

당승은 자신이 오공을 구해 준 공로가 있다고 여겼고 또 스승으로서 윗사람이라 여기며 오공에게 음식을 구해오라고 독촉했다. 자신의 사심(私心)을 드러낸 것이다. 원래 부처 수련을 하는 사람은 남의 보답을 바라지 않고 세간에 대해 구함이 없어야 함을 망각한 것이다.

백골정은 부처님을 공경하는 선량한 사람으로 가장하고 또 맛있는 음식으로 당승과 팔계의 불순(不純)한 부분을 겨냥했다. 이렇게 당승을 속이는 데 성공했고 최후에 오공을 몰아냈다. 사부가 존귀하고 제자의 시봉을 받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이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 등은 이치를 말하자면 확실히 틀리지 않다. 하지만 사심(私心)의 농간을 부리자 단지 표면적인 형식만 지켰을 뿐 이런 이치 배후 불법(佛法)의 참뜻은 망각햇다. 사부가 존귀한 것은 좋지만 당승은 자신이 아직 수행 중인 사람임을 망각했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선량한 것은 맞지만 반드시 내심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 공경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백골정을 세 번 친 이 단락 이야기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승, 오공, 팔계 세 사람의 순정하지 못한 부분이 아주 생생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사심이 크게 충돌해서 생긴 것이다. 하지만 당승은 취경(取經)의 길에서 기둥[主心骨]이고 선택받은 인물이지만 또한 육체범태(肉體凡胎)를 지녀 사람 마음이 가장 무거웠다. 이는 또한 비록 육체적인 일은 모두 도제(徒弟)들이 맡아 함에도 완심투골하는 마음의 고통은 당승이 관관(關關)마다 피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이 신(神)으로 성취하려면 그럼 이런 마음속 뼛속까지 자신마저 의식하지 못하는 사심(私心)을 제거해야 한다. 마음을 파고 뼈를 깎는 것이 아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물극필반(物極必反)이고 비극태래(否極泰來 역주: 천지가 서로 소통되지 않고 막힌 비괘가 지나가면 천지가 태평한 태괘가 온다는 의미. 물극필반과 유사하다.)라 이런 불순한 부분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예전의 신위(神位)로 돌아갈 수 없다.

또 당승이 외운 긴고주(緊箍咒)는 원래 관음보살이 진수자(真修者)에게 직접 전수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진언[定心真言]이다. 표면적으로는 심원(心猿)인 오공을 제어하는 데 사용되지만, 이 단락에서는 오히려 오공을 쫓아내는데 사용되었다. 긴고주가 비록 좋긴 하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려 한다면 또한 사심(私心)의 불순을 제거해 없애고 아주 오랫동안 뼛속깊이 박힌 사념(邪念)을 제거해야만 오래 지속할 수 있다. 《서유기》 후반부에 나오는 당승과 오공의 관계 변화에서 일부를 보아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여러 방면의 지각이 있어서 기쁨, 분노, 슬픔 및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감수는 쉽사리 사람이 세상에 빠지게 만들고, 참과 거짓을 가리지 못하게 만들며, 외부 환경이 어떤 감수를 주면 곧 믿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지각(知覺) 때문에 사람은 비로소 이렇게 완심투골한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 이 고통을 초월하면 아마 일종 제고와 정화일 것이다. 서쪽 여행의 길에서 당승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취경이라 모든 마음과 생각이 그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이 취경의 마음 역시 수련 과정 중에서 순수해져야 한다.

왜 취경하려 하는가? 사람은 오직 불순(不純)을 제거하고 생명 본원의 심경(心境)을 드러내야만 비로소 무엇이 구함이 없는 진선(真善)인지 알 수 있고, 비로소 마음이 평온하고 상화(祥和)해질 수 있거나 또는 비로소 진정으로 이번 여행에서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4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