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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이 주왕을 무찌른 비밀병기——전가후무

소양춘

【정견망】

최근 중국 대륙에 중국산 애니메이션 영화 《나타 2》가 인기리에 상영된 후, 각계의 찬사와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 실제 역사에 대한 회고와 현실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어래에 무왕이 주왕을 공격하고 싸우지 않고 굴복시킨 비결인 전가후무를 살펴보겠다.

맹진관병(孟津觀兵)

상나라 말기, 주왕纣王은 포악하고 무도하여 인심을 모두 잃고 천하가 혼란스러워 민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주 무왕周武王은 하늘의 뜻과 민심에 순응하여 거병하여 상나라 주왕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주 무왕은 먼저 맹진孟津에서 군사를 참관하고 800명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지금의 대규모 열병식과 합동 군사 훈련에 해당한다.

맹진관병에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널 때 두 가지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첫째, 주나라 무왕이 강을 건너는 중간에 흰 물고기 한 마리가 왕이 탄 배舟로 뛰어들었고, 무왕은 그 자리에서 이 흰 물고기를 제물로 바쳤다. 《사기·주본기》

둘째, 강을 건넌 후 대군이 황하 북쪽 언덕의 왕옥산 근처에 도착했는데,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색으로 변한 까마귀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혼백이 말하는 것”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일은 주나라 사람들에게 크게 길한 징조로 여겨져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상나라의 금덕은 흰색이고, 주나라의 화덕은 붉은색이다. 따라서 백어(상商)가 주(주周)에 들어오고, 천화화오天火化乌는 화극금에 속하며, 주나라가 곧 상나라를 대체할 것임을 예고하는 의 천문 현상을 말한다.

강을 건넌 후, 주 무왕은 선서식을 열고 상나라 주왕을 성토하는 격문인 《태서》를 발표했다.

“제후들이 약속없이 만난 자가 팔백 명이다.“

모두 말했다.

“주紂왕을 정벌할 수 있습니다! “

주 무왕 가로되,

“당신들은 천명을 알지 못하니, 아직 할 수 없다.”

그래서 군사는 조정으로 돌아가 쉬었다. 2년이 지나서야 목야전투가 시작되었다.

천도와 인심이 인자한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서주(西周-무왕의 봉토)에 있는데 무왕은 왜 군대를 철수하고 전쟁을 멈추었을까? <월절서(越節書)>에 이렇게 쓰여있다 : “인자한 사람이 가지 않으면 함부로 하지 못한다.” <상서정의尚書正義>에는 “약함을 보이기 위해 물러서고, 제후의 마음을 예측하며, 상나라의 정치를 관찰하고, 전쟁을 선포한 후 싸운다. 《여씨춘추·신대람》: 무왕이 주왕과 결전을 벌이기 전에 사람을 은나라 수도로 보내 정보를 염탐했다. 첫 번째 보고는 《은나라는 매우 혼란하다》, 《참소함이 좋은 사람을 이긴다》, 두 번째 보고는 《그 혼란이 더하다》, 《현자가 떠나간다》, 《왕자와 비간을 죽이고, 때문에 기자, 태사 자疵와, 소사 강彊은 악기를 안고 주나라로 도망갔다》, 세 번째 보고는 《그 혼란이 심해졌다》, 백성들은 감히 원망하지 못한다.” 무왕이 급히 여상(강자아)을 찾아가 의논하니, 여상은

“아첨꾼이 충신을 압도하니 이를 육戮이라 하고, 현명한 신하가 떠나가니 이를 붕崩이라 하며, 백성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니 형승刑勝이라 한다. 고문으로 민심을 억누르니, 은상은 이미 완전히 통제 불능이 되었다.” 두 사람은 박자가 맞아 “혼란이 지극하다”고 생각했고, 은나라와 가 상대할 만하다. 고 생각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주왕을 벌하기 전에 무왕과 여상, 임금과 신하 두 사람의 이 대화를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은 《육도六韜》로,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고도 불린다.

무왕이 군사를 물리친 또 다른 이유는 “국가의 대사는 오직 제사와 융戎이다. 천명이 주周나라를 천하의 공인된 주인으로 인정해야만 도의의 고지를 차지할 수 있으며, 천하의 제후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때만이 천하의 유일한 주인인 것이다. 선서할 때 제사에서 하늘과 하늘이 소통할 권리와 악기는 여전히 상나라에 있으며, 태사 자와 소사 강이 제사를 지낼 악기를 안고 서주로 돌아간 후, 은상과 하늘의 소통은 이미 단절되었고, 하늘의 명령은 주나라에 돌아갔다. 이때 무왕이 상나라를 쳐야 비로소 명분이 서지 ‘하극상(下犯上)’이나 ‘난신적자(亂臣敵子)’가 아니라 하늘의 명을 받들어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했다고 한다. 이른바

“하늘이 주는 것을 차지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책임을 지고, 기회가 왔을 때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 天與不取,反受其咎;時至不行,反受其殃” 라는 것이다.

목야지전(牧野之戰)

무왕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은상 왕조는 이미 비바람에 흔들리는 전야에 있었다. 각종 놀랍고 기이한 현상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오성취방; 낮에는 별이 보이고, 하늘에는 피와 재의 비가 내리고, 6월에 눈이 날리며, 귀신이 울고 산이 울리는 것;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져, 큰 것은 항아리 같고, 작은 것은 삼태기 같았다.

조가성 구석에 작은 술잔이 있는데 갑자기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왔다. 상나라 주왕은 먼저 크게 놀라 점쟁이를 시켜 길흉을 점치게 하였다. 그는

“이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이 생기는 것이니 보기 드문 길조입니다. 나라에 복이 많을 것이며 대왕의 영명함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하는 주왕은 그때부터 걱정 없이 잠을 잤고, 하루 종일 명성을 드높이는 자기 도취에 빠져 조정의 정치를 외면하며 더욱 황음무도하게 되었다.

무왕이 팔백 제후와 맹진에서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주왕도 《나타 2》에서처럼

“나의 운명은 나에게 있지 하늘에 있지 않다”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천명은 내게 있지 주나라에 있지 않다”고 굳게 믿었다. 이 일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은상 왕조는 가파른 경사면의 구르는 돌처럼 빠르게 만장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목야 전투 전날, 무왕과 주공단은 풍읍에서 군사를 일으켜 상나라를 벌할 계책을 강구하였다. 주공은 “시기가 도달했으니, 군사를 일으켜 옛 것을 따르라. 초용삼동三同: 1. 척취동, 이가. 임용능, 3. 시무성. 삼양三讓: 1. 근시, 2. 천죽, 3.시자본. 삼우三虞: 1. 변경에서 내부를 침범하지 않고, 2. 길에 방목을 하지 않으며, 3. 교외에 사람을 남기지 않는다.”

“삼동三同”이란 관료 중 친인척 동시 배치, 현명하고 능력자를 임용한다, 기밀을 지킨다는 세가지를 가리킨다. “삼양三讓”은 상업에서 시장에 접근하여 상인에게 유리하게 하고, 쌀 가격을 낮추어 국민에게 유리하게 하며, 자본을 빌려주고 대출에 유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삼우”三虞는 국경 주민이 내륙으로 이주할 수 없고, 도로에 가축을 쫓아낼 수 없으며, 교외에 백성이 거주할 수 없는 등 우발적인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지역 통제 조치를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목야전투 진군 노선도

마침 주 무왕이 강자아를 스승으로 삼고 주공단을 보좌로 삼아 적극적으로 ‘흥주멸상’의 대계를 짜고 있던 중, 고집 센 상나라 주왕은 오히려 국가의 힘을 기울여 동남쪽으로 군사를 움직였고, 가까운 곳은 텅비어 목야일전에 이르렀고 이에 주왕은 불을 질러 분신하여 상나라는 멸망을 선언했다.

전가후무(前歌后舞)

주 무왕이 여러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목야에서 주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멸망시키겠다는 격문 《목서》를 발표한 후, 상나라 군대는 잇달아 진 앞에서 화살을 돌려 조가를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해서 서주는 단 하루 만에 4만 5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상나라의 70만 대군을 크게 물리쳤으니, ‘피를 흘리지 않고 천하가 귀순하다’라 할 수 있다. 손자병법이 그러하듯

‘옛날에는 싸움을 잘하는 자의 승리는 쉽게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출토된 서주(西周)의 ‘이궤(利簋)’ 명문에 따르면 “무왕정상武王征商 유갑자조(唯甲子朝), 세정(世鼎), 극혼숙유상(克昏夙有商)이다. 즉, 무왕이 주왕을 공격하여 하룻밤 사이에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성(목성)이 하늘에 떠 있는 갑자일 새벽에 조가를 점령했다. 이로써 고서의 “하루 만에 주나라를 무너뜨렸다”는 기록을 증명했다. 목야 전투는 인류 전쟁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76년, 산시성 린퉁에서 출토된 청동기 《이궤》는 현재 유일하게 “무왕정상”이 기록된 유물로, “진국지보”로 불린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주나라 무왕이 적은 수로 많은 사람을 이기고, 싸우지 않고 승리하게 했을까?

​일부 사학자들은 상나라가 정규 주력 병사들이 모두 조가를 떠나 동이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기 때문에, 이 70만 병사는 현재의 예비군에 해당하며 대부분 임시로 모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대전이 시작되자마자 일격에 무너져 하루 만에 전멸했다. 그러나 70만 명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사학자는 하늘의 뜻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맹자의 말로 한다면 지인벌지불인(以至仁伐至不仁 지극한 인으로 불인을 정벌했다)이었다. 수천 년 동안 주 무왕은 천고의 명군으로 인정받았으며, 정의의 화신이었다. 반면에 상 주왕은 무도한 혼군으로 ‘助紂爲虐 조주위왕-주왕을 도와 학정을 하다’는 말은 악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둘의 싸움은 ‘인의’와 ‘사악’의 대결이자 정사의 대전이다. 즉 ‘사악함은 바름을 이기지 못한다’ ‘인자천하무적’이다.

이 밖에도 주 무왕은 비밀병기를 하나 사용했다. 『화양국지·파지』에 따르면,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벌하여 실제로 파촉의 군대를 얻었으며, 『상서』를 저술하였다. 군사는 용맹하고 예리하며, 노래와 춤으로 은나라 사람을 능멸하고, 앞의 무리가 창을 거꾸로 잡는다고 하여, 세간에서는 이를 무왕이 주왕을 벌하는 것은 앞노래와 뒤춤이라고 불렀다.”

“용, 촉, 강, 무, 미, 노, 팽, 복(庸、蜀、羌、髳、微、纑、彭、濮)”은 서남 지역의 8개 부족을 의미한다. 일찍이 문왕 때 서주에 귀순했다. 그중 강은 촉군의 서쪽에 있고, 무는 파촉에 있으며, 노와 팽은 서북쪽에 있고, 용과 복은 강한의 남쪽에 있다. 무왕이 주나라를 공격한 목야 전투에서, 이 여덟 부족도 함께 출정하여 싸웠다. 파촉 선민들은 무예를 숭상하고 전투에 능한 용감한 민족으로, 마치 기문공법처럼 ‘전가후무’를 포함한 많은 뛰어난 비장의 무기를 연마해냈다.

유방劉邦은 삼진을 평정한 후, 무왕벌주의 ‘전가후무’를 궁정에 도입하여 파유무라고 명명했다. 궁정 연회에서 군대의 전투 장면을 공연하고,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며, 한나라 시대의 유명한 잡무가 되었고, 이후 이를 아악 무용의 체계에 포함시켰다. 발전하여 위진魏晋이 되었을 때, 파유무는 완전히 사원 제사 성격의 춤이 되었고, 당 태종 대력 연간에 널리 퍼지면서 중국 고대 무용 예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춤의 기본 동작은 첫째, 모유(矛渝), 둘째, 안노(安弩), 셋째, 안대(安臺), 넷째, 행사(行辭)이며, 그 기본 형식은 ‘집장执仗하여 춤을 춘다’이다. ‘仗’은 병기이고, ‘执仗’은 무기를 들고, 반주는 북을 친다. 반고(班固 동한의 사학자)의 《한서》에는 “파유고원, 36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서는 궁정 연악의 파유무를 의미한다. 정벌 전장의 파유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전했느냐에 따라 노래하고 춤춘다. 전진阵前에서 싸우는 자들은 창을 들고 큰 소리로 외치며, 뒤에서 반주하는 자들은 북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위세를 더한다. 이것이 바로 무왕이 주왕을 공격하는 ‘전가후무’이다.

파유무는 고대인들이 맹수 및 부족과 경쟁하면서 발전한 집단무로, 귀신을 쫓고 전염병을 피하는 나무(傩舞-푸닥거리 춤)와 마찬가지로 고대 촉국 무술의 전신이다. 비록 파유무가 원시적인 무도에서 제사와 축제적인 춤으로 변모했지만, 그 내면의 살벌한 위엄과 율동의 힘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 사마상여는 《자허부子虚赋》에서 파유무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천 명이 노래하고, 만 명이 화답하며, 산이 진동하고, 계곡이 물결친다.”

무왕벌주의 “가무이능은인歌舞以凌殷人”은 마치 순임금이 지은 《대소》가 삼묘를 평정하는데 천군만마에 의지하지 않으며 오직 음악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초한 전쟁에서 한신은 십면매복의 계략을 사용하여 항우군을 해하에 포위하고 다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적군의 투지를 흩뜨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강산을 기세 좋게 하여 군심을 진작시키는 《진왕파진악》등도 있다. 모두 노래와 춤의 형태로 사기를 북돋우고, 적을 겁주며, 상대방의 군심을 흔들고, 적군이 소문을 듣고 겁을 먹고 어둠을 버리고 밝은 곳으로 투항하게 하여 결국 싸우지 않고 항복하게 하는 병법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