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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을 없애려다 급사한 북주 무제

오견(吳見)

【정견망】

중국 역사상 전국적으로 멸불(滅佛 불법 말살)을 명령한 네 명의 황제가 있었다. 이 네 황제는 모두 당시로선 아주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없애려 했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황제라도 하늘의 벌을 받았고 심지어 그 재앙이 후대에까지 이르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멸불은 모두 남북조 시기에 일어났다. 최초 멸불정책을 실시한 북위(北魏)의 태무제 탁발도(拓跋燾)는 두 아들이 피살당했다. 두 번째 멸불은 남북조 시기가 막 끝나려던 시기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다. 그러나 전국적인 멸불정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썩어가면서 죽었고 그의 아들 역시 제위를 찬탈당했다.

당시 중국 북방에는 사찰이 숲을 이뤘고 승려가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을 넘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정말로 출가해서 수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역과 부세(賦稅 부역과 세금)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었다. 불교를 믿는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사찰에 집과 밭을 기부했고, 승려들은 정책적으로 소작농을 부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찰에는 더 많은 돈과 식량이 생겼고, 일부 승려들은 저축한 돈과 식량을 이용해 백성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때문에 무제 우문옹은 불교와 승려들의 자비를 점점 의심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 뿌리를 뽑으려는 의도를 품게 되었다.

또 우문옹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전쟁에 몰두해 병력 및 자금을 조달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런 그의 눈에 부유한 승려들과 사찰이 들어왔고 이들을 제거할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위원숭(衛元嵩)이란 도사가 있었는데 우문옹을 선동해 멸불하려 했다. 하지만 우문옹은 승려와 도사 중에서 누가 더 도행(道行)이 높은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조정에서 토론을 펼쳤고 매번 불도(佛道) 쌍방이 전력을 다해 상대방을 공격했다.

한 차례 토론에서 도사 사제 장빈(張賓)과 승려 지현(智炫)이 우열을 가리지 못하자 무제는 직접 승려들 중에 재물과 색을 탐하는 자들이 있다고 질책했다. 지현은 도사들이 늘 환술(幻術)과 속임수로 사람을 속이고 심지어 노자가 부처가 되었다는 말조차 날조된 것이니 그들의 죄가 불교보다 더 크다고 반박했다. 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다음날 두 종교를 모두 금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고 불경을 불태우고 불상을 무너뜨렸는데, 이는 역사상 두 번째로 멸불 사건이다. 이 기간에 우문옹은 군대를 파견해, 불과 3개월 만에 북제(北齊)를 멸망시키고 장강 이북을 다시 통일했다.

그러나 우문옹은 멸불의 보응이 닥칠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서기 578년 6월, 우문옹이 직접 북방 돌궐 원정을 준비했다. 대군을 모아 출정 준비를 마쳤지만, 우문옹은 그날 밤 36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온 몸에 궤양이 생겨 썩어가면서 사망했는데 대단히 끔찍했다고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