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羽化)
【정견망】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 사람은 분명 정신병자로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다니.”라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자신이 정말 어디에 있는지,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꼭 아는 게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나잖아?”라고 말할 것이다. 현실 생활에서 보면, 확실히 이 육신이 당신이다. 이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신과 당신의 근본(根本)은 다르다는 점이다. 당신의 옷, 당신의 집, 당신 회사, 당신 친척 등등,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고 또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인체에 대한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신체의 모든 조직과 장기도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의 손, 당신의 사지(四肢), 당신의 심장, 당신의 뇌, 심지어 당신의 몸 전체도 당신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당신 몸의 모든 세포, 분자, 원자 등은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진정한 당신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자신을 마주하면서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는 농담이 아니며, 또한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철학과 심리학 연구 주제 중에 ‘자기’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현실의 자신이 사람의 신체와 심리적 측면의 모든 면을 포함한다고 여기고, 경험적인 자신은 현실의 자신 중에서 언제나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일부라 여긴다. 어떤 사람은 진정한 자신은 일종의 동력(動力)으로 개인이 자아실현을 추구하게 만드는 동력이며, 사람마다 모두 하나의 고유한 진실한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상화된 자신은 개인이 자신에 대해 갖는 비합리적인 상상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상징적 자신은 개인의 감정, 사상,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인생관 등을 포함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개인의 이해라고 본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각종 물질은, 동물, 식물, 산, 강, 바다 또 별, 은하, 우주 등은 모두 크기가 서로 다른 입자로 구성된 서로 다른 모양과 밀도를 지닌 서로 다른 체계일 뿐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체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수많은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진 밀집된 체계다. 사람이 먹는 산해진미와 감자, 사람이 먹는 고급 옷과 헌 옷, 사람이 사는 고층 빌딩과 초가집을 미시적인 층차에서 보자면 아무런 차이도 없다. 원자라는 이런 층차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며 모두 입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디 높고 낮으며 귀하고 천한 구별이 있는가? 어디 부자와 가난뱅이의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미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하고 일시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2001년 12월 17일, “국제 뉴스”에서 다음과 같은 소식을 방송한 적이 있다. 몇몇 미국 과학자와 의학 전문가들이 혼수상태에 빠져 심장이 멈췄다가 나중에 응급치료를 받고 살아난 중증 환자들의 상태를 조사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들은 이들에게 죽음의 상태에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이야기한 결과는 놀라웠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신체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고 느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구해준 병동과 의사를 본 등등. 현재 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이것이 환상이라고 간주한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이는 사람의 육체가 그 사람의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이 의식을 잃으면, 그 몸은 그저 단순하고 감정 없는 살덩어리일 뿐, 진정한 ‘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의 의식(意識)과 사유(思惟)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신’인가?
의식과 사유는 철학과 심리학에서 모두 중요한 연구 주제다. 의식과 사유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관점으로 인해 다양한 학파와 이론이 형성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의식이란 물질 또는 정신적인 요소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은 의식을 일종의 특별한 물질, 즉 일종 정신적인 고차원적 산물이라 보며, 사유는 일종의 정신 활동이라고 보는 등등이다.
의견은 다양하지만, 그들은 모두 의식과 사유가 ‘자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라고 인정한다. 의식과 사유가 없다면 사람은 완전할 수 없고, ‘자신’도 없다. 그러므로 의식과 사유를 진정한 자신으로 삼아 분석하는 것이 꽤 합리적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신체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는 것을 조사했는데 이는 의식이 신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의식이 죽은 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는 의식과 신체의 관계는 어떠한가? 의식은 어떻게 이 신체를 제어하는가? 왜 가끔 자신이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가? 등등의 많은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현실 생활에서는 종종 사상관념(思想觀念)과 경험(經驗)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한다. 후천적인 사회 환경에 의해 형성된 관념은 사상 의식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행동을 통제할 때,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관념인지 아니면 의식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관념에 따라 사고(思考)하고 행동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믿는다. 사람이 평온할 때 냉정하게 일부 일들을 회상해보면 많은 경우 자신도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면서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일은 모두 그들 자신의 관념과 경험이 그들을 지휘해서 시킨 것으로 진정한 자신의 내심에서 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통제하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사유 의식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명확히 구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신체가 한 일들은 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 두무뭉술하게 인식한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많은 일들은 우리의 진정한 “자신”(사상의식)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사상관념이 사람의 의식을 대신해 신체를 통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을 통해 ‘나’를 찾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망망한 천지여 나는 누구인가
얼마나 윤회했는지 기억마저 희미하네
고난 속에 막막한 아득함이여
기대 속에 마음 이처럼 힘겹구나
한밤중 흘러내리는 창상(滄桑)의 눈물
진상을 본 그때서야
대법을 찾은 그때서야 천둥소리 들리는 듯
나는 알았노라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았노라 신의 길을 힘차게 달려가야 함을
(《홍음 3》)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35746
